[장우석의 電影雜感 (전영잡감) 2.0] 장항준 감독 ‘기억의 밤’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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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08   |  발행일 2017-12-08 제43면   |  수정 2017-12-08
충무로 재담꾼, 스릴러로 돌아오다

‘비상구는 없다’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
‘박봉곤…’으로 천재 스토리텔러 입증
2002년 ‘라이터를 켜라’로 감독 데뷔
이듬해 ‘불어라 봄바람’ 연이어 흥행
캐릭터 코미디물로 특유의 재능 발휘

드라마·예능서 아내 김은희 작가와 협업
‘싸인’ ‘무한도전’ 등 통해 대중에 각인
14년 만의 영화계 귀환 作 ‘기억의 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스릴러와 접목
109분 간 예측불허 반전의 미학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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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

1996년 12월 성탄절 무렵으로 기억한다. 당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던 나는 무료한 시간을 때울 심산으로 근처 비디오대여점을 찾았다. 몇 가지 외화와 함께 제목이 독특해 눈여겨 두었으나 극장에까진 가지 않았던 한국영화 하나가 눈에 띄어 빌려왔다. 그리고 기존 한국영화들과는 다른 재미에 깜짝 놀라 몇 번이고 돌려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영화 ‘늑대의 유혹’을 연출한 김태균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박봉곤 가출 사건’(1996)은,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을 간직한 주인공 박봉곤이 남편 최희재의 가부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에 시달리다 가출을 단행한 후 어릴 적 꿈이었던 가수가 되기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게 된다. 아내의 가출이 이웃까지 소문이 나자 희재는 ‘집 나간 마누라를 찾는 전문가’ X에게 봉곤을 찾아줄 것을 의뢰한다. 그러나 봉곤을 추적하던 X는 봉곤의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다 그녀의 천진난만함에 매료되고 급기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은 코미디 영화였다. 봉곤 역을 맡은 배우 심혜진은 이 영화로 제17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그녀는 이후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프란체스카’ 역을 맡게 되는데, 뱀파이어였던 그녀가 인간 세상에서 썼던 이름이 ‘박봉곤’이었다. 배우 최지우의 영화 데뷔작(최지우는 1995년 이자벨 아자니 닮은꼴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데뷔했다)이기도 했던 이 영화에서 정육점 여주인 역을 맡은 최지우는 희재 역을 맡은 여균동 감독과 깜짝 놀랄 만한 키스 신을 연기했다. ‘겨울연가’를 기억하는 이들은 놀랍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장항준이라는 한 명민한 스토리텔러의 출연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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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밤’ 포스터

장항준 감독은 서울예술전문학교(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다 강한섭 교수의 소개로 김영빈 감독의 ‘비상구는 없다’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장진 감독과는 동기이기도 한 그는 ‘박봉곤 가출 사건’ 이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김의석 감독의 ‘북경반점’(1999)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며 자신만의 시나리오로 입봉을 준비하다 무산되고, ‘판도라’ 박정우 감독이 쓴 ‘라이터를 켜라’(2002)를 데뷔작으로 내놓는다. 기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여러 인물들이 정신없이 대사를 쏟아내는 이 소동극은, 전국 관객 130만 명을 동원해 평단과 관객들의 호응을 고루 이끌어내며 장 감독이 충무로에 안착하게 한다. 주연을 맡은 배우 차승원과 김승우의 코믹 연기도 돋보였는데, 특히 김승우는 이 작품을 통해 전작들의 실패를 딛고 흥행배우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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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를 켜라’ 포스터

“이번 영화가 실질적인 데뷔작”이라며 출사표를 던진 차기작 ‘불어라 봄바람’(2003)은 데뷔작을 만든 다음해 곧장 만들어지는데, 이는 장 감독이 스토리텔러의 재능과 전작의 흥행 지속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마치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전작의 백수에 이어 김승우가 좀팽이 소설가로 등장하고 여기에 당시 코미디의 여왕으로 불렸던 배우 김정은이 다방 레지로 나오며 캐릭터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924,190명)이었지만 이후 장 감독의 침묵은 길었다. 이 시기 김상진 감독의 ‘귀신이 산다’를 각색하고 OCN에서 ‘최강 로맨스’ 김정우 감독과 ‘장감독 vs 김감독’ 프로젝트로 TV용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던 그는 2010년 tvN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를 아내인 김은희 작가와 함께 쓰게 된다. 원래 지상파 방송을 목표로 출발한 드라마였지만 다소 불편한 소재와 수위 문제로 거절당한 것을 tvN이 적극적으로 제작에 나서 당시 케이블로는 이례적인 완성도와 시청률을 얻어냈다.

이 성공을 밑거름 삼아 김은희 작가가 쓰고 장 감독이 연출한 SBS 드라마 ‘싸인’은 배우 박신양과 김아중을 기용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려 2011년 시청률 1위를 기록한다. 영화와는 다른 드라마 제작 현장의 험난함을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배우 김명민, 정려원, 시원을 기용해 2012년 제작한 SBS ‘드라마의 제왕’에서 시청률 지상주의와 과도한 PPL, 쪽대본, 밤샘촬영 같은 방송계의 부조리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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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라 봄바람’ 포스터

장 감독을 최근 대중에게 각인시켰던 또 다른 작품은 2016년 MBC 예능 ‘무한도전’ 에피소드 가운데 ‘무한상사: 위기의 회사원’일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 예능과 장항준 감독·김은희 작가의 컬래버레이션에 영화 ‘끝까지 간다’와 ‘터널’ 등을 만든 제작자 장원석까지 합류한 다시없을 프로젝트였다. 배우 구니무라 준, 김혜수, 이제훈, 지드래곤 등의 출연까지 확정되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를 표방한 장 감독의 신작 ‘기억의 밤’(2017)은 개봉 전 매우 이례적으로 60분 분량의 시사회를 진행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러닝타임 109분 가운데 절반만 공개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관객들은 절대 외부에 내용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스포일러 금지 서약서까지 작성했다. 작가적 야심으로 충만한 이 작품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로운 설정과 스크린을 압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였다. 배우 강하늘의 군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는데, 강하늘은 여전히 또래 배우들이 갖지 못한 얼굴을 보이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한편 배우 김무열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하기도 했다. 배우 문성근과 나영희의 연기도 극의 몰입을 한껏 도왔는데, 최근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그간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문성근을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도 했다.

무려 14년 만의 신작 개봉 후 다시 드라마 연출을 할 의사가 없냐는 한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장 감독은 “영화는 어릴 때부터 늘 하고 싶었던 꿈이었다. 주변을 보면 첫 작품이 곧 ‘유작’인 감독이 많았다. 그만큼 다음 작품을 만들기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감독의 목표는 같다. 오래 하는 것. 본업인 이 현장에 오래 머무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스릴러를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설득하는, 그간 한국영화가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장항준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독립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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