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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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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뉴스팀기자
  • 20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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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일간 80여 작품…고흐,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곳

오베르 교회.
라부 여관. 이 여관에는 여관 주인의 딸 ‘애들린 라부’ 초상화가 붙어있다.
라부 여관 옆의 고흐 박물관.
고흐와 테오의 묘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이하 오베르)’라는 이 어렵고 긴 이름은 고흐가 아니었으면 절대 기억하지 못했을 도시다. ‘Stary stary night∼’로 시작되는 돈 맥클레인의 팝송 ‘Vincent’로 각인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슬픈 삶의 종착지가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는 마음이 이 도시의 이름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 파리 여행길에 마침내 이 도시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고흐가 머물렀던 집에서부터 무덤까지 온통 고흐의 흔적이 묻어 있는 도시였다. 그 기억을 새록새록 되살려준 것은 세계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러빙 빈센트’였다. 고흐 그림 속의 풍경과 인물을 고흐풍의 유화로 재생한 이 영화를 세 번이나 보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다음에는 그림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삶 때문에.

영화는 고흐의 최전성기로 평가받는 프랑스 아를(Arles)에서 시작된다. 고흐는 아를에서 같은 뜻을 가진 화가들과 예술공동체를 꿈꾸며 함께 살 ‘노란 집’을 마련하여 먼저 폴 고갱을 초청했다. 그러나 불화 끝에 고갱은 떠났고, 고흐가 꿈꾸던 이상도 무참히 깨어졌다. 그 후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등 정신병이 생겨 1년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결국 파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파리 근교의 이곳 오베르로 이주하였는데, 이곳 생활 70일 만에 1890년 7월29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47년의 짧은 삶 속에서 고흐는 그림을 배운 적도 없었으며 본격적으로 활동한 기간도 겨우 8년이었다. 그가 남긴 800여 점의 작품 대부분이 마지막 4년간 아를과 오베르에서 그린 것이다. 특히 70일간의 짧은 오베르 생활에서 80여 점의 그림을 그리면서 최고의 창작욕을 불태웠다.

파리서 북서쪽으로 27㎞ 떨어진 시골
고흐가 머문 집부터 무덤까지 고스란히
시간 멈춘 듯한 거리·시청·교회·밀밭…
그림 속 풍경 걷다보면 그와 마주칠 듯
동생 테오와 나란히 묻힌 묘엔 쓸쓸함만



오베르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27㎞ 떨어져 있는 시골 도시다. 이 작은 도시의 어떤 매력이 고흐의 창작욕을 일깨웠는지 몹시 궁금했다. 아를에서 파리로 다시 돌아온 고흐가 이 도시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의학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폴 가셰 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던 가셰 박사는 의학적인 면뿐 아니라 예술적인 면에서도 고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고, 이것이 고흐의 왕성한 창작의욕을 유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오베르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의 창작욕을 일깨웠을 것이다. 오베르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자연의 풍경에 젖어서 테오에게 오베르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았다.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오베르는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다. 전형적이고 그림과 같은 시골의 풍경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고 적고 있다. 오베르의 풍경을 그린 그의 ‘오베르의 거리’에 보이는 화사한 색채감은 그의 들뜬 기분과 기대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고흐에 앞서 폴 세잔,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카미유 피사로, 아르망 기요맹 등 유명 화가들도 이곳에 정착하여 예술 활동을 했으니, 이 도시 자체가 예술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도시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내 느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특히 시간이 멈춘 듯 고흐 그림 속의 풍경이 변함없이 유지되어 있었다. 그의 그림 속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어깨에 이젤을 멘 고흐가 어디쯤에선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먼저 도비니 박물관을 찾았다. 거기에 관광안내센터가 있어서 한글로 된 오베르 지도를 구할 수 있고, 교통편도 알아볼 수 있으며, 오베르 정보를 얻거나 영상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유명 화가 도비니의 박물관이므로 오베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도비니의 그림을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에 설립되어 19세기 인상파 화가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들렀던 날은 휴관일이어서 그저 고흐의 ‘도비니의 정원’을 떠올리며 정원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도비니의 정원’은 고흐가 이 마을에서 추구했던 이상향, 즉 오베르의 ‘노란 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샤를 도비니는 밀레와 더불어 바르비종파의 대부였고, 아틀리에를 벗어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롱전의 엄격한 심사와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예술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뒤프레, 코로, 세잔, 피사로 등 풍경화의 새로운 장을 연 화가들에게 도비니는 큰 영감을 준 화가였다. 특히 도비니가 자신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절친한 벗이자 뛰어난 화가였던 오노레 도미에와 함께 살았었다는 사실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것은 이러한 도비니의 삶이 고흐가 아를에서 이루고자 했던 고갱과의 이상적인 공동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고흐가 이곳에 왔을 때는 도비니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난 뒤였지만 도비니의 부인이 지키고 있는 이 저택은 여전히 고흐의 이상향이었던 셈이다.

고흐의 당시 모습은 현재 작은 공원에 동상으로 서 있다. 이젤을 어깨에 둘러멘 채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깡마른 모습은 쉽지 않았던 그의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동시에 온전히 작품 활동에 집중했던 이곳에서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반 고흐 공원에서 조금 걸어가면 고흐의 ‘오베르 시청’ 그림의 배경이 된 시청이 나온다. 표지판으로 붙어있는 고흐의 그림과 현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마치 고흐 시대에 와 있는 듯하다. 근처에는 고흐가 머물렀던 집이 있다. 지금은 고흐의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고흐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이곳은 ‘라부 여관’이었다. 고흐는 이 여관 3층 다락방에 투숙했다. 이곳도 휴관을 해서 그 방을 구경하지는 못했다. 그저 주위를 맴돌며 대문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라부 여관 주인의 딸 ‘애들린 라부’ 초상화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 벽에는 주변 풍경을 그린 ‘오베르의 계단’도 붙어 있어서 한동안 그의 생각에 잠기게 했다.

이어서 방문한 곳은 가셰 박사의 집이었다. 고흐가 이곳에서 편안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생 못지않은 가셰 박사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아를에서 파리로 돌아온 고흐는 몇 번의 발작을 일으켰고 불면증과 환각 증세에 시달렸다. 이에 테오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여러 화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는 오베르의 가셰 박사에게 형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둘의 만남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었지만 고흐의 재능을 알아본 가셰 박사는 진심으로 그를 후원했고 예술을 사랑하는 두 사람은 빠르게 친해졌다. 가셰 박사는 고흐에게 그림 그리기가 그의 건강에 도움을 줄 것이라 조언했고, 그는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종일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마음 내킬 때마다 가셰 박사의 집을 방문했고, 가셰 박사는 물론 그의 딸과 아내, 집의 정원까지도 화폭에 담았다. 가셰 박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며, 같은 그림을 또 그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과 매우 유사한 또 한 점의 ‘폴 가셰 박사’ 초상화는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천250만달러에 낙찰되어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고 경매가 작품의 자리를 유지했다.

고흐의 또 다른 걸작 ‘오베르 교회’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박한 이 교회는 고흐의 화폭 속에 담김으로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것처럼 삐뚤삐뚤 그려진 고흐의 그림이 이 교회의 안내판처럼 먼저 눈에 띈다. 목사 아버지의 영향하에 한때 선교사의 길을 걸었던 그의 의식 속에 비친 교회는 이처럼 비뚤어져 있었다. 이에 대해 후대 호사가들이 여러 해석을 내놓았지만 그의 정신병을 중요한 이유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현실의 차갑고 날카로운 교회의 직선을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의 곡선으로 변형한 것처럼 보였다. 고흐의 흔적을 마주할수록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오베르 교회를 지나 작은 오솔길을 오르니 이 마을의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고흐와 동생 테오가 나란히 묻힌 곳이다. 묘지에 들르기 전에 보아야 할 곳이 있다. 그의 걸작 ‘까마귀 나는 밀밭’의 배경인 오베르 들판이다. 공동묘지 정문 쪽에 그곳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있었다. 휑한 들판과 공동묘지가 만들어내는 쓸쓸함은 고흐의 삶 같다. 그림의 배경이 된 밀밭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그의 그림 간판만이 그의 흔적을 증거하고 있다. 그때의 빛이 아니어서 그때의 풍경은 아니겠지만 모사된 그림 간판만으로도 그의 외로움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과 사람들을 오브제로 택한 그의 그림은 폭넓은 붓놀림에 산뜻한 색조로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러빙 빈센트’에서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가 “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초록 잔디 결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까지 느끼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이 적절하다. 그것은 “내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 이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마음에 품은 것들을”이라는 내면의 열정이 만들어낸 것이리라. 허한 밀밭을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를 화폭에 붙들어 놓은 것도 이러한 그의 창작욕이리라.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외로움까지는 어쩌지 못했나 보다. 볼수록 쓸쓸하다. 헤어 나올 수 없었던 현실의 궁핍과 외로움은 끝내 그를 나락으로 내몰았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묻혀 있는 묘역은 초라했다.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만에 형을 따라간 동생 테오와 함께 담벼락에 나지막하게 자리를 잡았다. 크고 화려한 비석은 없지만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석처럼 둘러서서 떠날 줄을 모른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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