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흔적 쫓던 영남알프스서 소금길도 찾다

  • 이춘호
  • |
  • 입력 2018-01-19   |  발행일 2018-01-19 제34면   |  수정 2018-01-19
[人生劇場] 소설가 배성동
호랑이 흔적 쫓던 영남알프스서 소금길도 찾다
배성동 이사장은 지난해 말 한 달 일정으로 연해주 최북단 아그주를 탐사했다. 거기서 만난 현지 가이드와 산막에서도 생활했다. 낮조차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혹한이라서 자칫 방심하면 치명적 동상에 걸릴 수 있다. 호랑이 탐사에 절대 혼자는 못 간다. 당국의 허가증, 호랑이 전문가와 통역인 현지 지리에 밝은 소수민족 사냥꾼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 <영남알프스학교 제공>
호랑이 흔적 쫓던 영남알프스서 소금길도 찾다
이젠 500마리도 채 남지 않은 시베리아호랑이. <이돈수 제공>
호랑이 흔적 쫓던 영남알프스서 소금길도 찾다
1896년으로 추정되는, 진도호랑이를 사살한 뒤 등에 올라탄 한국인 포수 사진을 보는 배성동 이사장.
호랑이 흔적 쫓던 영남알프스서 소금길도 찾다
배성동 이사장이 지난해 펴낸 소금다큐에세이 ‘소금아 길을 묻는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 나는 울산과 밀양의 경계에 서 있는 해발 700m 배내고개로 갔다. 밀양과 울산을 오가던 민초들의 생계의 최전선을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능선의 칼바람 앞. 양팔을 벌렸다. 몸이 휘청거렸다. 저 멀리 사자평의 억새바람까지 감지됐다. 여긴 영남알프스. 간월산, 신불산, 가지산, 운문산, 채약산 등 해발 1천m 이상 산이 9개 몰려 있다. 둘레는 250㎞. 어떤 이는 백두산, 설악산, 지리산, 태백산, 한라산 등을 운운하지만 난 영남알프스에 더 방점을 찍어주고 싶다. 영산이면서 명산이기 때문이다.

1987년부터 주말 영남알프스 살다시피
의료기사업 거덜나 엄청난 빚에 쪼들린
97년 외환위기 때도 ‘희망의 돌파구’돼
1천여m의 명산 9개 빼곡한 영남알프스
능선에 서면 호랑이 등에 탄 듯이 호쾌

10여년 전 본격 영남알프스 풍찬노숙 삶
그곳서 살던 소금장수 등 민초들에 관심
작년 6월 책 ‘소금아 길을 묻는다’ 결실
언젠가는 범과 빨치산 책도 펴낼 계획

◆천하의 산하…영남알프스

눈을 감는다. 울부짖는 산. 순간 능선이 아니라 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 같다. 이 무렵 산정 억새밭에 불을 댕기면 하늘과 땅이 하나로 뚫린다. 영남알프스에 빌붙어 살았던 민초들은 기원처럼 태워올렸던 억샛불을 영험한 존재로 섬겼다. 그들은 그 불을 사특한 기운을 뚫어버리는 ‘천화(穿火)’로 봤다. 천화는 이제 울산문화의 주요한 덕목이다. 영남알프스학교를 만들 때도 천화를 솟대처럼 앞세웠다.

‘호염일여(虎鹽一如)’. 호랑이와 소금은 하나다. 이 둘은 나를 흔드는 신령스러운 힘이다. 겨울 산에 오면 둘을 동시에 감지할 수 있다. 눈이 내겐 소금으로 보인다. 폭설을 맞은 산. 거대한 소금덩어리. 소금이 없다면 생명도 없을 것이다. 그럼 뭇 동물을 호령하는 범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소금과 범의 뿌리를 모르면 한민족의 정신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영남알프스는 소금·범 인문학의 초석이었다.

영남알프스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살았던 민초들의 삶부터 탐구해야만 했다. 내 눈에 맨 처음 들어온 시련의 삶은 바로 영남알프스 ‘등금쟁이(소금장수)’였다. 등금쟁이의 길을 파고들면서 한국 전통 자염(煮鹽)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염은 일본에서 전해진 천일염과 달랐다. 큰방만 한 쇠솥에 해수를 넣고 끓여 추출해낸 것이다. 염전이 아니라 소금솥을 갖고 제염한 것이다.

한국소금길 지도를 만들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만들던 김정호 정신으로 걷고 또 걸었다. 거의 10년이 걸렸다. 많이 걸을 땐 하루 52㎞도 돌파했다. 청포도 같은 물집이 내 발바닥을 집어삼켰다. 나중엔 곰발바닥처럼 딱딱해져버렸다. 이젠 발톱보다 굳은살을 더 자주 깎아낸다. 영남알프스 풍찬노숙의 삶은 2013년 ‘영남알프스 오딧세이’란 다큐에세이로 엮어냈다. 지난해 6월 대한민국소금인문학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소금아 길을 묻는다’(민속원 간)까지 출간했다.

◆무전여행 스무 살

소금길 저 멀리 아스라이 걸려 있는 내 스무 살. 무전여행으로 시작됐다. 절친과 함께 부산 달맞이고개에서 7번국도를 따라 꼬박 1개월을 걷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부잣집 아들이었던 친구는 기장 근처에서 사라져버렸다. 혼자가 됐다. 호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땡전 한 푼도 없으니 비로소 맘이 담대해졌다. 이틀 이상 굶으니 비로소 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더라. 가장 좋은 잠잘 공간은 교회와 절. 거기 수북한 방석은 더없이 좋은 침구였다. 꿈보다 ‘땀’이 인간을 더 성숙하게 만든다는 걸 알았다.

경남 고성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가난에 길들여진 집이었다. 집 앞 바다는 내겐 해수풀장이었다. 수영하다가 발가벗은 몸으로 뒷산으로 올라가서 새를 잡던 천둥벌거숭이 시절. 그걸 뒤로하고 나는 부산 최강의 달동네로 떠내려갔다. 우리 가족은 유민(流民)이었다. 처음 도착한 데는 수정시장 언덕배기 달동네였다.

아버지는 천하태평 한량. 가업은 엄마가 독차지했다. 엄마는 여자로 살 수 없는 팔자였다. 주렁주렁 달린 자식 때문이리라. 자식이 엄마를 억척스럽게 만들었다. 늘 생선 뱃속으로 굵은 소금을 집어넣던 거센 여자. 엄마 눈에는 항상 핏발이 서릿발처럼 돋아나 있었다. 난 교실보다 만화방이 좋았다. 돈이 없으면 쪼르륵 엄마 생선가게 앞에로 달려갔다. 엄마는 곱게 돈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장바닥은 오물투성이, 생선핏물이 흥건했다. 그 더러운 바닥에 돈을 내던졌다. “동아, 제발 나가 죽어뿌리라!”

설악산 울산바위에서 내 스무 살도 화장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김성동의 장편소설 ‘만다라’에 등장하는 지산 스님 비슷한 포스의 청파 스님을 만났다. 전국을 정처없이 떠도는 운수납자였다. 그를 만나면서 내 삶의 한 축도 영글어진다. 그가 승복 바지를 선물로 내밀었다. 출가하라는 묵언의 압력 같았다. 그날 완행열차 안에서 당대 최고승의 다비식 뉴스를 접한다.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거기서 난생 처음 다비식에 몰려든 구름인파를 봤다. 그가 바로 1982년 입적한 경봉 스님이다. 난 안개가 되어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영축산 정상에 펼쳐진 신불평원의 억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거기까지. 문학청년의 열정으로부터 발원된 내 방랑도 영남알프스에서 1막을 내렸다.

◆빨치산 루트도 추적 중

1987년 사회인이 됐다. 주중에는 생계를 위해 직장, 주말엔 영남알프스에 살았다. 산을 위해 산으로 간 것이다. 산·강·바다가 삶의 원천 아닌가. 책보다 그게 더 근본이라 봤다. 일단 산부터 품었다. 하지만 산의 외형만 봐선 산의 원기(元氣)를 헤아릴 수 없다. 원기는 산의 뿌리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산에 500번 정도 올라가면 산의 굴곡이 보이고 500번을 더 오르면 비로소 산의 뿌리가 보인다. 그 뿌리는 내가 발견하는 게 아니다. 산이 내게 알려주는 것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모두에겐 절망이었지만 내겐 ‘희망의 돌파구’였다. 산에 올라탄 세상사는 항상 변한다. 임진왜란 때 영남알프스는 승병과 의병이 넘나들었던 호국의 산,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과 맞물린 이승만 정권 때는 좌익의 산이었다. 난 지리산에서 총살당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보다 신불산의 마지막 빨치산이었던 ‘남도부(南到釜)’의 삶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함양의 부잣집 아들인데 세월을 너무 앞서나가는 바람에 세상한테 잡아먹혀 버렸다. 그도 또 다른 한 마리의 범이라 생각됐다. 등산로 곳곳에 드러난 빨치산의 무덤과 피신장소, 한때 한국 마지막 빨치산 본거지로 불렸던 681 갈산고지 등의 흔적을 차곡차곡 메모해 나갔다. 좌익의 산은 IMF 환란 때 실직자의 산이 되고 지금은 생태관광의 중심이 돼버렸다.

의료기사업을 하다가 한 방에 거덜나 버렸다. 새끼를 먹여살리기 위해 민가로 내려오다가 죽임을 당한 범의 최후 같았다. 감당하기 힘든 빚이었다. 가족은 살림이며 동시에 죽임이었다. 그리고 모순이었다. 파산을 잊기 위해 김밥과 생수를 사들고 종일 산을 탔다. 77m 높이의 간월재 천길바위는 내 수호천사였다. 당시 그 바위는 누군가에게는 자살바위였다. 내가 심약했다면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 땀에서 발견한 울산소금길

땀이 삶의 묘수란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더 큰 땀을 쏟아내야 더 고귀한 깊이를 만날 수 있다. 땀을 따라가보니 거기에 영남알프스의 뿌리가 있었다. 그 뿌리에서 발견한 첫 수확물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각지대에서 망각되고 있던 ‘울산소금’이었다. 난 그 소금을 인문학적으로 복원하고 싶었다. 울산소금은 자염을 생산하는 ‘염부’, 그리고 염부가 생산한 소금을 내륙 곳곳으로 유통시키는 등금쟁이가 구축한 하나의 거대한 식문화의 보고서였다. 서해안의 소금밖에 몰랐다. 그런데 한국 전통소금인 자염의 메카 중 한 군데가 울산소금이라니! 10년 ‘소금길 고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단 울산석유화학단지와 현대자동차공장 등에 매몰된 여러 울산염전의 실체 확인에 나섰다. 마채염전부터 찾아갔다. 거기서 일했던 차동근씨의 기억을 거슬러 올랐다. 멀리 남암산과 문수산이 보이는 개운포성에 올라갔다. 청량천과 두왕천이 합강하는 언저리에 있던 마채염전을 비로소 지도에 그려넣을 수 있었다. 차씨로부터 염전 위치를 확인한 나는 1918년 지형도와 항공사진을 대조하면서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1960년대 항공사진에는 염전을 비롯한 주변 모습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선조엔 개운포 수군들까지 소금을 구웠는데 그들이 생산한 소금을 ‘관영염분(官營鹽盆)’이라 했다. 1425년 ‘경상도지리지’에 그 사실이 적혀 있다. 유윤선씨는 하개염전의 원형을 알려주었다.

모두 85명 퇴역 염부의 구술을 채록했다. 덕분에 한국 염전문화와 소금유통망의 얼개를 얼추 완성시킬 수 있었다. 모두 8군데의 주요 울산염전을 파악한 뒤 나는 다른 지역의 염전과 소금유통 루트를 직접 걸어보기로 했다. 동해안·남해안·서해안·지리산·영남대로소금길. 마지막엔 낙동강 하구 부산 명지소금을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랐던 낙동강 소금배에 대한 기록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여정 속에서 소금의 한자어인 ‘염(鹽)’ 자의 유래도 알게 됐다. 로(鹵)는 ‘소금밭’, 네모 모양의 소금밭에 찍힌 점들은 ‘소금알갱이’, 신(臣)은 누군가를 감시하는 ‘관리’, 명(皿)은 소금물을 끓일 때 쓰는 ‘솥’을 상징한다. 즉, 나라가 관리하는 소금밭에서 만들어진 소금을 그릇에 담는 의미를 지닌 게 바로 염 자였다.

소금길에 대한 책이 출간됐을 때, 난 그걸 영남알프스에 헌정했다. 부산과 울산에서 국내 첫 소금콘서트도 벌였다. 이때 소장수 김정두, 소금장수 윤삼철, 억새꾼 이우정 등도 초대했다. 하지만 팔린 책은 고작 4권. 봉사자들이 화를 냈다. “왜 이렇게 적게 팔렸냐”란 푸념이었다. “세상사 다 그런 것 아니냐”고 웃어넘겼다.

언젠가 범과 빨치산에 대한 책도 펴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일을 대비해 영남알프스학교 부설 호랑이학교와 박물관을 중국과 러시아에 열 계획이다. 내가 만들어낸 모든 가치는 전적으로 영남알프스의 몫이다. 자연파괴시대를 딛고 범과 사람이 하나되는 ‘호인일여(虎人一如)’ 통일세상을 미리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된 조국의 범한테 먹힌다 해도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