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내린 피아노 “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합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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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20   |  발행일 2018-04-20 제34면   |  수정 2018-04-20
■ 방랑 피아니스트 윤효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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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잦을 날이 없는 윤효간. 그의 방랑적 기질은 해풍이 난무하는 바닷가에서 더욱 예술적으로 승화된다. 긴 머리 풀풀 날리면서 울산 간절곶 석양을 배경으로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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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간은 현장이 있는 공연을 중시한다. 기존 연주자들은 감히 생각하지 못한 발상의 전환은 공군부대 전투기 앞 공연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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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데스밸리에서 화보 촬영을 위해 연주 포즈를 취한 윤효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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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이빨’이란 타이틀의 윤효간 피아노 콘서트 포스터.

‘11시30분 방향에 빛이 보인다.’ 그건 내 삶의 모토다. 그리고 ‘미친 긍정’은 내 별명이다.

‘천하의 윤효간’. 이건 내 음악적 동지가 지어준 닉네임이다.

◆ 반려견과 피아노

부산시 동대신동 엄청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생애 첫 친구는 반려견과 피아노였다. 어린 시절 난 2층 창문에 갇혀 있었다. 편함이 주는 불편함, 부유함이 주는 허탈함 같은 걸 절감했다.난 자꾸 몽상가로 내몰렸다. 현실에 뿌리를 못 내렸기 때문이다. 집에는 모두 7개의 방이 있었다. 네 형제는 모두 각자 방이 있었다. 빨간색 피아트 승용차, 가정부 아줌마, 운전기사 아저씨, JBL 스피커, 마란츠 전축. 1960년대 내가 품고 있었던 품목이다. 그래, 부모가 깔아놓은 호사스러움, 사치스러움. 그게 얼마나 연약한가를 난 가늠할 수 없었다. 난 부모의 연장선상에 있었지 결코 내 삶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다.

아버지는 나의 음악 사부. 악기를 하나씩 안겼다. 난 피아노를 배웠다. 재능은 내가 최고였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했다. 80년대 불티나 라이터가 나오기 전 국민성냥으로 불렸던 ‘UN성냥’이 바로 아버지가 만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오순도순한 가족이 아니었다. 풍요 속 빈곤이었다. 모든 게 개인적으로 흘러갔다. 살가움과 부대낌이 없었다. 웬만한 건 돈으로 해결해버렸다. 부모의 편애만 있고 ‘가족애’는 말라버리고 없었다. 형과 대화할 겨를이 없었다. 난 혼자 방치된 ‘아기곰’이었다.

7세에 시작한 피아노 연주, 아버지는 싹수를 발견했다. 당신은 늘 서울대 음대를 외쳐댔다. 유학을 다녀와 음대교수가 되길 기원했다. 하지만 호강이 극에 달하면 무난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법. 아버지가 원하는 길과 반대의 길에 대한 호기심만 날로 팽창해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했다. 콩쿠르는 최악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돌아갔다. 모두 자기 아이의 연주에만 관심이 있었다. 너무나 이기적이었던 부모들. 그 어떤 대화도 없고 참가한 아이들의 표정도 꼭 ‘포로’ 같았다. 참가자 연주는 대동소이했다. 선생도 다르고 배운 공간의 분위기도 다른데 왜 연주는 닮은꼴일까. 난 콩쿠르에서 낙방했다. 다행이었다. 내 삶을 통해 가장 만족스러운 실패였다고 믿는다.

국민성냥 만든 부잣집 아들
늘 서울대 음대 외치던 부친에 반항
리듬·박자 먼 연주…록·팝송에 미쳐
10대시절 가출과 귀가 반복
요정밴드 멤버·나이트 클럽 연주
20대 후반까지 돈도 제법 벌어
닥치는 대로 새로운 음반 구입
트로트·재즈·클래식 장르 넘나들어

KBS 관현악단 연주자 삶 이어져
날 부정하던 부모님도 품기 시작
내 잔치판 벌이고자 4년만에 나와

2005년 11월 ‘피아노와 이빨’
1천회 이상 공연·월드 투어…
갑보다 을을 위한 나눔공연 여정
가장 낮은 곳서 진솔함 두드리다



◆ 나만의 길을 찾아라

난 교본대로의 삶에서 벗어났다. 교본과 다르게 걷기 시작한다. 선생은 항상 작곡가의 의도를 중시했다. 하지만 난 그걸 의심했다. 이후 내 피아노는 ‘독행(獨行)’이었다. 박자와 리듬, 멜로디까지 무시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게 진정한 음악이라고 믿었다.

낮에는 레슨, 밤에는 록과 팝송에 미쳐갔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같았다. LP음반 수집에 매몰된다. 그 음반은 하나의 우주였다. 난 정말 많은 우주를 가슴에 파종할 수 있었다. 나의 13세 어름의 일들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난 결국 가출을 하고 말았다. 난 딴 세상이 그리웠다. 더 넓은 세상, 그것은 집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달동네에 있는 친구 집에 머물렀다. 처음으로 판잣집을 보게 된다. 화장실이 없는 집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새벽마다 신문을 돌렸다. 1주일 만에 붙잡혀 집으로 끌려왔다. 다시 가출했다. 진해와 거제에선 한 달을 숨어 살았다. 이후 난 가출과 귀가를 반복하면서 별 의미 없는 학창시절을 인내했다. 반항아의 피가 부모를 절망케 했다. 난 그 절망을 딛고 희망의 길로 걸어갔다. 자식은 정말 부모를 극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의 가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탈의 반복이었다.

음악적 재능은 내 방황을 지속하게 만든 에너지였다. 10년간 클래식 연마. 3천 장 이상의 음반 독파. 이게 내 심우주 탐험의 최대 추동력이었다. 뒤돌아보면 끔찍하게 부끄러운 그림이 또 하나 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난 농땡이를 치고도 학생 대표로 큰 상을 받았다. 아버지의 기부금 덕분이었다. 한 친구가 비꼬듯 말했다. “넌 좋겠다. 집이 잘 살아서.” 그게 날 철들게 했다.

◆ KBS관현악단에 들어가다

3만8천원을 들고 상경했다. 소장하던 음반을 팔아 마련한 돈이었다. 이태원에 있는 한 여관으로 갔다. 며칠만 있으면 밤무대 건반주자로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낙원상가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오지 않았다. 몇 푼 되지 않은 돈은 금세 바닥났다. 난 잠시 길을 잃었다.

당시 일당 연주자들은 매일 낙원상가로 와야만 한다. 나도 거기로 출근했다. 맨 처음 요정 밴드 멤버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연주비는 3만원. 난 어려서 5천원만 받았다. 돈이 떨어지면 영등포역 근처 공원에서 두 달 정도 노숙했다. 이어 경기도 부평의 한 카바레에 머문다. 밤마다 트로트를 연주했다. 서울대 교수한테 레슨받던 내가 카바레에서 연주하다니. 세상은 그런 것이다.

실력을 인정받아 인천의 한 나이트클럽으로 건너간다. 마침내 대중연주자로서는 인정을 받는 이태원 크라운호텔 나이트클럽 건반 주자가 된다. 20대 후반까지 10여년 밤일을 했다. 그땐 종일 음악만 품었다. 잠도 3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대졸 초임 월급이 30만원이 안 되던 시절인데 난 세 곳을 돌며 월 180만원을 벌었다. 주머니가 두둑했다. 닥치는 대로 새로운 음반을 샀다. 그때 존 레넌, 밥 딜런, 폴 매카트니, 핑크 플로이드, 칙 코리아, 밥 제임스 등 당대 최고 뮤지션 앨범의 파트별 악기 연주를 분석했다. 무려 3천여 곡이나 됐다. 무조건 많이 듣고 직접 채보하다 보니 건반 주자인 내가 다른 기타 주자의 멜로디 파트까지 다 외우게 됐다. 실력이 팍팍 축적된 시절이었고 이게 편곡 실력으로 이어졌다.

서른 살 즈음에 밤무대와 결별한다. 통장 잔고만 불리는 일이 더 이상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유로운 삶을 살 필요가 느껴졌다. 그래서 음반 기획·제작자로 변신하게 된다. 난 이미자, 패티김, 남진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를 전담하던 박춘석 악단 건반주자로 들어간다. 독학으로 배운 아코디언은 내 음악 인생에 엄청 도움이 됐다.

나는 피아노를 칠 때 가급적 숨을 덜 쉬고 덜 내뱉는다. 그럼 에너지가 축적된다. 정확한 호흡을 연마하기 위해 존 레넌의 ‘이매진’을 5년간 연습했다. 음에 온몸을 싣기 위해서였다. 나의 연주법은 다른 연주자와 좀 다르다. 나는 트로트, 재즈, 클래식, 록뮤직 등을 불문했다. 장르를 넘나들었다. 물론 쉽지 않은 역량이었다. 자연스럽게 KBS관현악단 연주자의 삶으로 이어졌다. 정년이 보장되는 거기는 연주자에겐 꿈의 직장이었다. 내 엉뚱함이 맘에 들었던지 난 합격했다. 그토록 날 부정하던 부모도 그제야 날 품어주기 시작한다.

◆ 홍대 앞 은둔기

그 어름 난 홍대 앞에서 살았다. 보증금 없이 월세 20만원을 내는 6~7㎡ 면적의 사무실이었다. 주머니는 텅 빈 상태. 나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2천500원짜리 야채비빔밥 한 끼로 하루를 버텼다. 2002년 무렵, 일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KBS관현악단도 4년 만에 그만둔다. 그리고 프리랜서 연주자로 변신한다. 난 음반 세션, 공연 세션, 공연 프로듀싱, 편곡 등을 핸들링했다. 힙합에 아코디언까지 섞어 신선한 도발을 했다. 하지만 난 남의 잔치판에서 살고 있었다. 점차 내 잔치를 펴고 싶었다.

2002년 첫 음반 ‘기다림도 사랑이야기’가 탄생된다. 음반이 나왔으니 나만의 콘서트가 절실했다. 2002년 11월 서울 대학로에서 ‘윤호간 BAND & 31 Concert’를 펼쳤다. 난 이때 공연 제작자 겸 연주자였다. 제작까지 챙긴 이유가 있다. 국내 공연은 가수의 공연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가수가 존재해야 연주자가 무대에 설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런 관행을 바꾸고 싶었다. 연주자가 무대를 마련하고 가수를 초청하는 방식. 가수와 연주자가 같이 주인공이 되는 방식이다. 일종의 ‘공연혁명’이었다. 그리고 31일간 계속 공연을 해보고 싶었다. 31일간 모두 10명의 가수를 초대해 콘서트를 열었다. 임지훈, 이승훈, 이미배, 김신우 등이 그때 초청받는다.

동요는 내 음악인생에 중요한 소스였다. ‘풍금이 흐르는 교실’은 나의 첫 동요곡이다. 어른이 듣는 동요 클래식이었다. ‘오빠생각’ ‘따오기’ ‘섬집아기’ 등을 가족은 물론 외국인들도 좋아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1년간 동요 연주 앨범에 매달렸다. 록음악에서 동요로의 터닝이었다. 이 곡을 갖고 2005년 프랑스 칸 미뎀 음반박람회에 참가했다. 그 안에 수록된 ‘Tears’라는 아코디언과 해금이 들어간 곡은 2004년 방영된 SBS 특집 드라마 ‘홍소장의 가을’ 메인테마가 된다.

2005년 11월11일은 내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갤러리에서 만나는 아주 특별한 피아노’란 부제가 붙은 윤효간 피아노 콘서트. 일명 ‘피아노와 이빨’이란 공연이다. 장르도 대중음악 중심이었다. 내 공연이 좀 위험하다 싶었던지 대관을 잘 해주지 않았다. 서울 청담동 ‘유아트스페이스’와 인연이 됐다.

1천 회 이상 진행된 피아노와 이빨. 무려 500명 이상의 게스트가 초대됐다. 그리고 난 무대를 버렸다. 거리로 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피아노를 무대에서 내린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피아노가 간다’란 타이틀로 월드투어를 시작했다. 첫 나라는 캄보디아였고 2009년 4월부터 미국 11개 주 40개 도시를 순회했다. 트레일러를 사고 보험을 들고 피아노와 각종 장비를 챙겼다. ‘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합니다’란 브로마이드 포스터를 차량에 부착했다. 그건 나를 드러내는 공연이 아니라 남의 어려움을 가볍게 해주는 일종의 재능기부 성격이 강한 공연이었다. 2008년부터 나눔공연으로 포맷을 바꾸었다. 번듯한 곳보다 후미진 곳, 갑보다 을을 위한 공연이었다. 중국 최악의 지진터, 쓰촨성에서도 연주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진솔한 공연을 하고 싶었다. 부잣집 아들의 허세는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빨 팬도 하나둘 늘어났다.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개척하는 삶을 외쳤다. 남의 역사가 아니라 자기 고장의 역사를 일궈주고 싶었다. 순간 내가 ‘피아노 치는 혁명가’ 같았다.

나는 월드나눔 공연을 통해 역사와 정신문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감했다. 그래서 국내 각급 지자체의 역사를 역사포스터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게 우리의 주요 밥벌이다.

어느덧 나의 공연에서 ‘역사디자인’이란 뿌리가 파생됐다. 우리의 디자인그룹이 고학력지상주의에 매몰된 청년백수들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다.

◆루브르박물관에 서다

세종 즉위 600년 역사디자인 작업을 하던 중 반가운 일이 생겼다. 우리의 저력을 확신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측에서 5월25~27일 ‘한국 한지(부채) 특별전’을 제안한 것이다. 이건 고학력 위주로 돌아가는 국내 디자인업계로선 생각하기 힘든 충격적인 뉴스다. 그래, 비대학파들의 쾌거다. 우리는 타율욕망시대에서 벗어나 ‘자기욕망시대’의 시그널이 될 것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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