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7] 문무를 겸비한 충신 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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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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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잃고, 임금 그리워하고…초연했지만 고통스러운 ‘낙향’

동계정 마당에 있는 ‘동계조선생유허비(東溪趙先生遺墟碑)’. 조형도는 청송 덕성리 보현천변에 동계정을 짓고 창석 이준, 풍애 권익, 하음 신집, 그리고 동생인 방호 조준도 등과 자주 교류했다. 현재 동계정은 보수 중이다.
조형도의 아버지 조지가 지은 망운정. 안덕 명당리에 입향한 조지는 마을 한가운데에 집을 짓고 그 남쪽에 망운정을 지었다. ‘망운’은 ‘타향에서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망운정 옆에는 조지의 삼남이면서 조형도의 동생인 조순도가 지은 남포정이 자리한다. 부모님를 봉양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1950년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65년 중수했다.
동계정 옆에 있는 조형도의 다섯째 아들 조함세(趙咸世)의 집 오의헌(五宜軒).
보현산의 북쪽 보현천변에 청송군 안덕면 덕성리(德城里)가 있다. 대단한 풍광도 대단한 풍요도 없으나 천에 면한 마을이 종종 그러하듯, 먹먹하게 쏟아지는 햇살의 특혜를 받으며 하늘로 열려 있는 마을이다. 태양과 대면한 이 낮고 순결한 땅에 조형도(趙亨道)는 동계정(東溪亭)을 지었다. 마을의 동쪽에 천이 흐르니 동계라 했을까. 그리고 그는 정자에 사친헌(思親軒), 연군헌(戀君軒)이라는 편액을 더했다. ‘부모를 생각하고 임금을 그리워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의 시절이었고, 초연하나 절실하고 고통스러우나 소진되지 않은 낙향이었다.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던 조형도
한강 정구 사사…3년간 향시 연이어 장원
임란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전장에 나가
곽재우 장군과 화왕산 전투서 크게 활약

광해군 왕위 오른후 거짓 고발로 수감
불행 연이어 덮쳐 이듬해 생모 잃고
영창대군 유배되자 벼슬 버리고 낙향
청송 덕성리 보현천변에 ‘동계정’ 세워



#1.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조형도

조형도는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5세손으로 1567년 청송 안덕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달(景達), 호는 동계(東溪)다. 아버지는 망운정공(望雲亭公) 조지(趙址),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恢)의 딸이었다. 경상우도 함안에 살던 조지는 1562년(명종17) 결혼하면서 보현천변 옛 안덕현의 명당리(지금의 안덕면 명당리)에 터를 잡고 청송의 함안조씨 입향조가 됐다. 이후 그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다. 수도(守道), 형도(亨道), 순도(純道), 준도(遵道), 동도(東道) 등 아들 다섯과 딸 셋이었다. 세 딸은 신지제(申之悌) 장후완(藏後琬) 이종가(李從可)에게 출가했다. 조지는 명당리 마을 한가운데에 집을 짓고 그 남쪽에 정자를 지어 ‘망운(望雲)’이라 편액했다. ‘망운’은 당나라 적인걸의 고사 망운지정에서 따온 것으로 ‘타향에서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망운정 옆에는 조지의 삼남 조순도가 지은 남포정이 자리한다. 부모님을 봉양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1950년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65년 중수했다.

차남 조형도는 어릴 때 큰아버지인 만호(萬戶) 조우(趙)의 양아들이 되어 함안 검암리에서 살았다. 총명하고 영특했던 그는 겨우 글자를 배울 만할 때 이미 문장을 지었고, 10세가 되던 겨울 양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른처럼 상례를 지켰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함안과 청송을 오가며 지낸 것으로 보인다. 15세 때 할아버지 조정언(趙庭彦)이 세상을 떠나자 조형도는 청송에서 상을 마친 후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21세가 되던 해 함안으로 돌아가 당시 함안 군수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사사한 뒤 3년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청송 의병장으로 막냇동생 동도(東道)와 함께 전장에 나아갔다. 팔공산에서 경상도 각처의 의병장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맹세했던 그는 곽재우 장군 등과 함께 화왕산 전투에 참가해 크게 활약했다. 전쟁은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는 ‘남아(男兒) 사업은 반드시 문묵(文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며 붓을 내려놓고 1594년 무과에 급제했다. 선전관(宣傳官)으로 비국랑(備局郞)을 겸하게 된 그는 영의정(領議政)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의 부름을 받아 문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문체를 보는 사람마다 칭송했다 전한다. 누차 승진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존경받았다.

조형도는 1595년 7월 청하(淸河, 포항)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그해 겨울 경산 현령이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생부인 조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성(固城)현령을 지내고, 창원(昌原)에서 의병 및 병사를 모으는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1609년(광해군 1) 조형도는 김명윤(金明胤)과 강첨(姜籤) 등의 거짓된 고발로 진주 옥에 수감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곧 풀려났지만 불행은 연이어 덮쳐 이듬해 1610년 생모를 잃었고, 이어 1611년에는 양모인 허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 조정에서는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주장이 거셌고, 1613년에는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고 만다. 조형도는 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왕에게 충언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큰 부끄러움이었다.

#2. 청송으로 낙향…동계에서 진세로

낙향 후 조형도는 청송 덕성리 보현천변에 동계정을 세웠다. 그리고 창석(蒼石) 이준(李埈), 풍애(風厓) 권익(權翊), 하음(河陰) 신집(申緝), 그리고 동생인 방호(方壺) 조준도(趙遵道) 등과 자주 교류했다고 한다. 특히 동계정 북쪽 신성계곡의 방대(方臺)에서 노닐며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다. 방대는 동생 조준도의 방호정(方壺亭)이 있는 곳이며 그의 어머니의 묘를 바라보는 곳이다. 그들은 방대 일대의 골짜기를 오선동(五仙洞)이라고 부르며 각자 신선의 호를 지었는데 조형도는 스스로를 청계도사(淸溪道士)라 했다. 그것은 단순한 선유의 취향이 아니라 평화와 정의의 모범인 선계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나 싶다.

동계정은 비바람에 낡고 6·25전쟁으로 크게 훼손된 것을 1952년에 중건했고 1976년에는 덕성리 사부실(沙夫谷) 마을 안쪽으로 이건했다. 사부실은 본래 하천으로 큰 홍수로 인해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땅이라 한다. 현재 동계정은 보수 중이다. 처마 아래까지 천막으로 덮여 보이지는 않지만 원래 대청의 오른쪽에는 사친헌(思親軒), 왼쪽에는 연군헌(戀君軒) 편액이 걸려 있다. ‘부모를 생각하고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당시 이미 양친을 모두 잃은 조형도는 부모를 봉양하는 신집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고 한다. 낮은 물처럼 고요한 덕성리 마을 한길 가에 서면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가 가졌던 내밀한 부끄러움도 동감할 수 있는 회한도, 어쩌면 저 초연한 천처럼 태양과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낙향한 지 4년 뒤인 1617년 나라에 도적이 들끓고 반란이 잦아지자 조형도는 다시 중앙으로 나갔다. 그는 토포장(討捕將)이 되어 반란군 탈옥수를 소탕했다. 1622년에는 직급의 단계를 넘어 종2품의 가선대부에 올랐고 청나라의 침입으로 순변사(巡邊使) 유비(柳斐)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곧이어 경덕궁 위장(衛將)이 되었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조형도는 인조를 호위했다. 특명으로 보성군수에 오른 그는 세금을 감면해 백성의 칭송을 받았고 자신의 봉록으로 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1624년에는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다시금 인조를 호위했고 이듬해 토호들의 부정한 청탁을 거절하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호위별장에 올랐다. 1627년 봄, 조형도의 부인 고창오씨(高敞吳氏)가 세상을 떠났다. 6월에 진주영장(晉州營將), 상주(尙州)영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7월에 괴산(槐山)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겨울에 사직했다. 이후 조형도는 1629년 경주영장이 되어 3년간 재직한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70세였다. 급히 군장을 꾸려 적진으로 달려간 그는 선봉에 서기를 청하였지만 노령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다. 이듬해 삼전도의 굴욕을 전해 들은 조형도는 ‘울분이 폭발, 등창이 터져 분사(憤死)’했다고 전한다. 1637년 2월8일, 향년 71세였다. 그는 임종 시 ‘장목후중어(張目喉中語)’ 했다는 기록이 있다. 눈을 부릅뜨고 입 속으로 무언가를 외치면서 죽었음을 뜻한다.

#3. 동계정 옆 아들의 집 오의헌

아버지의 정자(동계정) 옆에 아들의 집이 있다. 조형도의 다섯째 아들 조함세(趙咸世)의 집 오의헌(五宜軒)이다.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그의 나이는 11세였다. 그는 수족이 마비된 어머니의 곁을 밤낮으로 지키며 옷 입히고 세수시키고 머리 빗기는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았다.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로 어머니를 회생시켰다고 전한다. 아버지 조형도가 등창에 걸렸을 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자신의 입으로 농혈을 빨아내었으나 끝내 돌아가시자 그는 피눈물로 아버지의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오의헌은 동계정을 바라보면서도 그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는 듯 서있다. 오의(五宜)란 ‘봄에 부는 바람, 여름의 서늘함, 가을날의 달, 겨울의 따스함, 그리고 그 가운데 주인이 마땅함(宜)’을 뜻한다. 소박하나 질서가 높고, 낡았으나 기품이 있는 정자다. 조형도의 아들 조함세는 수십 년을 궁벽하게 살았으나 의(義)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형도는 팔공산 자락에 묻혔다. 그의 장자 호촌(湖村) 조함영(趙咸英)은 동촌에 터를 내려 함안조씨 동촌 입향조가 되었다. 동계 조형도의 두 곳 집은 그의 아들들이 지켰고, 그들의 후손들이 지켜가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누정록. 동계집. 세계유교문화재단 홈페이지. 최은주, 동계 조형도의 문학교류와 인맥네트워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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