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11] 존경받는 목민관이자 고려에 절의를 지킨 장안세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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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04   |  발행일 2018-10-04 제14면   |  수정 2018-10-04
하천 범람하던 함흥에 만세교 세운 날, 백성들은 감사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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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세를 배향하고 있는 구미 인의동 옥계서원. 1774년 구미 인동에 옥계사로 창건되었다가 1871년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것을 1989년에 지금의 인의동에 옥계서원으로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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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서원에는 사당인 경절묘가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구미 인동 출신인 장안세는 목민관으로서 명성을 떨친 인재다. 고려 후기 함흥부사로 부임해 치수(治水)사업에 큰 업적을 쌓았다. 당시 함흥에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해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에 장안세는 다양한 대책을 세워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특히 70간(間)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만세교를 건립해 재해로부터 고을을 지켰다. 장안세는 또 고려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구미 인동에 은둔했다. 친분이 있던 태조 이성계가 친필로 수차례 출사를 청했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김집(金集)이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으로 남겼는데, 장안세는 그 가운데 16번째로 기록이 됐다. 구미 인의동에 있는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됐다.

#1. 물을 다스린 목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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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서원에 자리한 장안세의 유허비. 장안세는 백성의 고통을 덜어준 목민관이자 고려에 절의를 지킨 충신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이었다. 어느 날, 장안세에게 어명이 전해졌다. “장안세를 함흥부사에 임명한다.”

송은(松隱) 장안세(張安世)는 구미 인동 출신의 명민한 선비였다. 집안 또한 할아버지는 밀직사부사 장순(張純), 아버지는 문과에 등제한 장균(張均)으로 고향에서 신망이 아주 두터운 편이기도 했다. 장안세 또한 다르지 않아서 학덕이 높음을 늘 칭찬받던 터였다. 그런 그를 조정이 부른 것이다.

왕의 당부가 뒤를 이었다. “과인은 장안세를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함경남도 함흥은 재해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함경산맥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갈한천(乫罕川)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이 갈한천이 늘 말썽이 된 까닭이었다. 이유인즉슨 해마다 범람하여 재산은 물론이고 인명까지 앗아간 것이다. 이에 조정에선 큰 골칫거리로 여기고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웠지만, 좀처럼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성과 또한 있을 리 없어서 신하들 또한 함흥으로 부임하기를 꺼려하는 지경이었다. 한데 바로 그 함흥으로 가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장안세는 두말없이 함흥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장을 세세히 살피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다양한 각도에서 치수와 관련된 대책을 세웠다. 이후 거의 10여 년간에 걸쳐 맞춤한 대책이 하나하나 시행되었는데, 그 중의 핵심이 바로 만세교(萬歲橋) 건립이었다. 악명 높은 갈한천에 목판으로 길이가 70간(間)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다리를 놓은 것이다.

다리가 완공되던 날, 장안세는 낙민루(樂民樓)로 향하기 위해 관을 나섰다. 낙민루에 오르면 만세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갈한천 가에 다다르자 고을 백성들이 빼곡하게 둘러서 있었다. 장안세를 본 무리가 한데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부사 영감이시네.”

“부사 어른 덕에 한시름 덜었으니 이 은혜를 어이 갚을꼬.”

“덜다마다. 누구도 못한 일 아닌가 그려.”

“그러게 말이네. 부사님 공을 도성에서도 알아줘야 할 것인데.”

고을 백성들의 입에서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고개를 조아리거나 허리를 깊숙이 굽히거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진심을 표현했다. 더는 홍수로 인한 재해가 없을 거라는 안도감이 그들로 하여금 인사를 하고 또 하게 만든 것이다.


고려말 함흥 갈한천 범람으로 골치
부사로 부임 장안세 10년 치수 매진
낙민루에 업적 기록한 현판·거사비

함흥 고향이던 이성계 존경의 마음
조선 들어서고 여러차례 중용 의사
장안세, 불사이군 충심에 거듭 거절
고향 구미 인동 내려간 후 은둔생활

순조 34년 충정이라는 시호 내려져
장안세 배향된 옥계사 1871년 훼철
1989년 와서야 옥계서원으로 재건



백성들을 뒤로 하고 낙민루에 오른 장안세는 가슴이 뭉클했다. 마음 속에 드는 감정과 생각이 한둘이 아니었다. 치수(治水)는 함흥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의 흥망과 관련된 절체절명의 문제였다. ‘통치(統治)’의 ‘치’가 왜 하필 ‘치(治)’인지 절감했다. 이에 거의 10년 가까이 치수에만 매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것을 포기했다. 고향엔 발도 들여놓지 못했고, 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이 와도 풍류는커녕 술 한 잔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오늘에야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되었다. 자부심이 차올랐다.

‘나의 충심은 산마루에 우뚝 선 소나무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으리.’

무엇보다도 당당한 건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사심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부귀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다만 왕이 덕행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을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생각의 끝에서 시제가 절로 떠올랐다.

천지의 기운이 갈라지는 아주 옛적부터/ 흥망의 물색(모습)이 실로 지엄하구나./ 고향에 돌아갈 일일랑 정령위의 천 년보다 멀리 두고/ 물을 다스린 공이 우왕 못지않게 여덟 해가 넘었도다./ 노란 국화 일렁이나 술을 뿌리치고/ 푸른 소나무는 위풍당당하게 산마루에 떠있으니/ 벼슬살이야 다만 왕의 덕행에 도움이 되고자 함일 뿐/ 시시하게 부귀를 구함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조정에서도 장안세의 공을 인정했다. 이후 장안세는 덕령부윤(德寧府尹)에 제수되어 함흥을 떠났지만, 그의 업적을 기록한 현판과 거사비(去思碑)는 지금도 낙민루에 남아있다.

#2. 나는 고려의 신하다

전령이 들고 온 왕의 친필서찰을 앞에 놓고 장안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소용없다 하였거늘 이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여기서 왕이란 태조 이성계였다. 장안세는 이성계와 친분이 있었다. 장안세가 거의 10여 년간이나 머물며 목민관으로 활동한 함흥이 바로 이성계의 고향인 까닭이었다. 당시에도 이성계는 장안세에게 존경을 표하곤 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치수를 그 오랜 시간에 걸쳐 해내는 것을 보면서 감탄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장안세가 욕심이 났다. 장안세야말로 막 개창한 조선에서 더없이 필요한 인재라는 판단이었다. 하여 장안세를 조정에 불러들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직접 써서 보내는 편지였다. 하지만 장안세는 번번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자신은 고려의 신하라는 충심 때문이었다.

장안세가 눈을 뜨고 종이를 펼쳤다. 그러곤 붓을 들었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가 나는 듯 지나갔다.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거늘 어찌 선비의 기개를 꺾으려 하시오?”

전령 편에 서신을 들려 보낸 후 장안세가 아들 장중양(張仲陽)을 불렀다.

“고려를 향한 아비의 충정을 알 것이다.”

“예, 아버님.”

“하여 낙향해 은거할 생각이다.”

“인동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오냐.”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짐을 꾸려 구미 인동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은둔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 장안세를 일컬어 사람들이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이라 일렀다.

‘두문동72현’이란 여말선초에 조선에 나아가지 않고 고려를 위해 은둔을 택한 선비를 이르는 총칭이었다. 두문동(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지역의 옛 이름)에 문을 둘러 세우고 그 안에 들어간 후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72명 모두가 그 안에서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선산 사람 농암(聾庵) 김주(金澍)는 중국의 절강(浙江)에서 살았고, 마찬가지로 선산 사람이었던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금오산(金烏山)에서 숨어 살았으니 말이다. 즉 실제로 몸을 어디에 두었는지가 아니라 마음을 어디에 두었는지에 집중한 명칭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 훗날 김집(金集)이 ‘두문동칠십이현록’으로 남겼는데, 장안세는 그 가운데 16번째로 기록이 되었다.

‘장안세는 인동 사람으로 덕령부윤이다. 본조에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살면서 뜻을 이루었다.’

장안세는 사후인 1774년(영조 50) 후손들이 세운 인동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유허비(遺墟碑)의 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던 1831년(순조 31), 예조에서 왕에게 아뢰었다.

“고려 충신 장안세가 공명을 마다하고 충의를 지켜 초야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훗날 당시의 두문동 현인들에게 은혜를 내리긴 하였으나, 장안세의 경우 뛰어난 절조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묻히고 있습니다. 청컨대 시호를 내려주소서.”

이에 1834년(순조 34) ‘충정(忠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장안세가 배향되어 있던 옥계사는 1871년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89년에 현재의 구미 인의동에 옥계서원(玉溪書院)으로 다시금 우뚝 섰다. 아울러 장안세에 대한 기록으로는 후손들이 편집한 2권 1책의 ‘송은선생실기(松隱先生實記)’가 전해지고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동장씨 태상경공파 중앙종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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