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글루미 선데이’ (롤프 슈벨 감독·헝가리·독일 1999·2016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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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05   |  발행일 2018-10-05 제42면   |  수정 2018-10-05
행복은 숨어서 우리를 기다린다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글루미 선데이’ (롤프 슈벨 감독·헝가리·독일 1999·2016 재개봉)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글루미 선데이’ (롤프 슈벨 감독·헝가리·독일 1999·2016 재개봉)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다. 이럴 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글루미 선데이’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아니 매혹적인 영화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지만, 낭만적이고 우수 어린 부다페스트의 감성이 듬뿍 담겨있다. 유대인인 자보는 부다페스트에서 레스토랑 ‘자보’를 경영하고 있다. 다정다감한 그는 아름다운 직원 일로나와 사랑하는 사이다. 자보와 일로나 사이에 예민한 감수성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나타난다. 일로나는 갈등하지만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한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사이, 나치는 세력을 점점 확장해나간다. 이 때 일로나를 사모하던 독일인 한스가 대령이 되어 나타난다. 나치 치하가 된 그곳은 그들만의 세상을 자유로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한스의 배신으로 자보는 수용소로 끌려가고, 안드라스도 모멸감으로 이미 죽은 후였다. 이 모든 비극 속에서 일로나는 기어이 살아남아 꿈꾸던 바를 이룬다.

영화의 가장 독특한 점은 안드라스가 작곡한 ‘글루미 선데이’가 끊임없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곡은 영화의 우수 어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실제로는 1935년 레조 세레스가 작곡한 곡으로, 이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래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되었다는 설이 맞는 것 같다(적어도 내게는 달콤하고 낭만적으로 들렸을 뿐이니).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만큼 어두웠고, 노래도 그만큼 널리 유행했기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작가 닉 바르코프는 ‘자살곡’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이 노래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 ‘슬픈 일요일의 노래’라는 제목이었다. 소설은 독일 출신의 감독 롤프 슈벨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고,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세 차례나 개봉되었고, 이제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영화가 되었다.

한때 헝가리는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가진 나라였다. 그 후 그 불명예는 우리나라 것이 되었고, 현재는 OECD 국가 중 2위가 되었다고 하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문득 영화 ‘고령화가족’의 첫 장면이 생각난다. 실패한 영화감독 인모(박해일)가 죽으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린다. 닭죽을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전화였다. 망설이던 인모는 엄마 집으로 가서 김치를 곁들여 닭죽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작인 소설 ‘고령화가족’의 첫 장을 펼치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언제나 텅 비어있는 컴컴한 부엌에서 우리의 모든 끼니를 마련해준 엄마에게’라고. 작가 천명관은 그 소설을 그렇게 엄마에게 바쳤다. 영화감독을 꿈꾸었다는 그도 어쩌면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그런 생각은 해봤을 것이다. 한 그릇의 음식이 우리를 살고 싶게 한다면, 노래 하나가 죽고 싶게 만드는 것도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다. 그토록 연약한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헝가리 출신의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노벨문학상(2002)을 받은 소설 ‘운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14세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체험을 소설로 녹여낸 그의 고백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장 비참했던 수용소에서도 일상의 행복 같은 것이 잠시나마 존재하더라는 것이다. 행복을 덫으로 표현한 것이 무척이나 독특하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행복이 문득 나를 낚아챈다니, 참으로 가슴 설레지 않는가.

영화 속 일로나는 사랑하는 두 남자를 다 잃고, 자신도 무참히 짓밟히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글루미 선데이’의 우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덫처럼 숨어있던 행복’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노래는 자살곡이라 불린 ‘글루미 선데이’였지만, 결코 우울하거나 슬픈 곡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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