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오지의 ‘맹개마을’ 만난 후 지독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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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2   |  발행일 2018-10-12 제34면   |  수정 2018-10-12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소목화당 박성호
20181012
자신의 당호 아래 고인 햇살을 받으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박성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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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처음 마주친 토담집 전경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위). 그리고 현재 전경.
20181012
물이 많으면 박성호씨는 뱃사공으로 변해 방문객을 실어나른다.

4남매 중 셋째로 울진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탄광도시 강원도 도계로 옮겨간다. 탄가루가 길들여질 무렵 상경한다.

난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아버지는 카메라광. 직접 암실에서 인화할 정도다. 나도 사진기를 품는다. 이런저런 무전여행을 했다. 바다와 강은 내 스승이었다. 여행벽도 진화했다. 독일 유학 시절 지중해 연안순례를 떠난다. 풍경 사이를 수놓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를 만났다. 그들 대다수는 드리머였다. 그들에게 여행은 일종의 분풀이였다. 내 여행의 루트는 여러 잡지에 연재됐다. 난 베를린에서 정보공학을 전공했다. 맘은 문학적, 몸은 과학적이었다. 그게 날 더 탐구적이고 진취적으로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안동은 이미 내 생명의 일부
여행중 만난 바다·강은 나의 스승
獨 유학 후 IT사업, 일의 노예로
다시 여행하며 일탈모색
퇴계 선비순례길 언저리에 빠져

맹개마을 만들기
벌판에 허물어져가는 집 두어채
전기·나룻배…문명의 이기도 흡수
이웃 도움 덕 유기농 고구마 재배
사과와인·밀·메밀 전통주
모든 술에 새겨지는 ‘맹개’ 상표
SNS 마케팅 ‘농가음악회’
모두 안올거라 했지만 150명 강건너
1년전 도시생활 청산 아내도 곁으로

◆열정과 컴퓨터 사이

독일에서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나를 증명해보기 위해 사업이란 걸 시작했다. 인터넷이 막 국내에 소개되던 1996년 말이었다. ‘미래는 인터넷 시대’라고 외치던 20대 후반의 내게 ‘얼마 정도면 그 꿈을 시작할 수 있냐’고 한 엔젤 투자자가 물었다. 난 ‘1억원’이라 했다. 그가 선뜻 그 돈을 투자했다. 그때 난 국내 최초의 인터넷 티켓 예약시스템과 인터넷 방송시스템의 상용서비스를 개발하는 선두주자였다. 이제 신문사에선 없어서 안될 프로그램인 CTS시스템까지 손댔다. 중국에서 마윈이란 사내가 항저우를 기반으로 중국 첫 전자상거래 인프라를 구축할 시점이었다. 조베스는 미국에서 아마존왕국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풍처럼 불던 IT 투자열기는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성공해서 남은 기업은 소수였다. 나 역시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사업의 쓴맛을 일찍 알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의 노예가 돼 있었다. 직원의 월급 마련에 전전긍긍. 점차 스트레스와 술에 찌들고 있었다. 사업의 절정에서 내 한계를 알게 됐달까. 월든 호숫가로 떠난 헨리 데이비스 소로우처럼 난 새로운 삶을 동경하게 된다. 사업가로선 치명적인 순간이었다.

◆ 지독한 열병

다시 여행을 통해 일탈 모색에 돌입한다. 그러던 중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나온 안동 오지의 한 임야 경매 물건을 보게 됐다. 2005년이다. 도산서원에서 10여분 거리에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와 싼 가격.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묘가 산재해 있고 전기조차 없는 험지(險地)라 가족들은 싫어했다. 그 언저리는 바로 퇴계가 봉화 청량산을 오가며 걷던 선비순례길의 한 구간이다. 그렇게 안동은 이미 내 생명의 일부가 된다.

안동에 내려오는 시간이 잦아졌다. 한달에 한번, 2주에 한번, 결국 주말마다 온다. 거래는 툭하면 불발됐다. 지주의 욕심 탓이다. 답답하면 직접 샘을 파야 한다. 맞다. 내게 맞는 땅을 찾아 현지답사에 나선다. 구글의 위성지도를 보며 중개인 도움없이 안동 산하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2007년 어느 겨울날.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드디어 내가 찾던 땅을 발견한다. 현재 2의 고향인 ‘맹개마을’. 직감적으로 ‘이 땅이 내 땅’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토박이들도 너무 불편해 강 바깥으로 이사 가게 했을 정도로 척박한 곳이었다.

아내에게 대뜸 ‘갑자기 맘에 드는 땅이 있으니 당장 안동으로 가자’고 했다. 황당해하고 두려워하는 아내의 표정.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내는 일단 현장을 확인해보자고 했다. 유아에 불과한 두 아이를 앞세우고 한 시간이 넘는 산길을 넘어 현장에 도착했다. 아내는 시종 묵묵부답, 그리고 암담한 표정.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맹개마을을 만난 이후 나는 지독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첫사랑에 대한 ‘상사병’ 같달까. 보고싶고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를 금방 정리할 수도 없었다. 일주일에 3일은 맹개마을, 4일은 서울에 있었다. 목요일 안동행 때의 부푼 기분.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회의 때문에 오전 3시쯤 맹개마을을 떠나야 했다.

◆맹개마을

마른 수건 짤아 물을 내듯 없는 돈을 탈탈 털어 땅을 샀다. 처음엔 뭘 할 지 엄두가 안 났다. 황량한 벌판에는 허물어져가는 집 두어채뿐이었다. 전기와 마실 물조차 없었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았다. 덩달아 회사일도 먹통이 될 수밖에. 모든 문명과의 단절. 그걸 인정하는 순간 평화가 찾아왔다. 무인도 탈출기를 다룬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톰 행크스. 그가 바로 나였다. 난 영화와 달리 고립을 자처했다.

1945년에 지은 기울어진 초가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생활했다. 강물을 길어와 밥을 해먹었다. 필요한 물품 목록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촛불에 의존하던 나는 축적된 인류문명을 빠르게 흡수했다. 발전기를 돌려 휴대폰과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드디어 천장에 전구가 달린다. 박성호 만세~~. 나는 오호쾌재를 외쳤다.

다음 난제는 강 건너는 법 찾기. 처음엔 배가 없어 무식하게 산길을 넘어 다녔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배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두꺼운 압축 스티로폼과 두꺼운 합판 몇장, 노 등을 샀다. 그렇게 해서 초현대식 나룻배가 운항된다. 그 배에 네댓 명, 시멘트 5~6포대를 태울 수 있다.

2007년 8월, 제대로 된 집을 짓는다. 이번엔 아버지가 나섰다. 아예 땅속에 집을 지어보라 했다. 농산물 혹은 자재를 임시로 보관할 다목적 ‘땅굴집’. 아버지가 직접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주셨다. 3개월만에 볼품없지만 토굴스타일의 첫 집이 탄생한다. 그 공간은 연중 15℃가 유지된다. 이 토굴에서 난 원시적으로 살았다. 귀농한 부모의 농산물을 인터넷으로 팔아보긴 했어도 농사경험은 전혀 없었다. 나는 인근 주민과 부모 도움으로 농사에 첫발을 디딘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신자인 아내 도움으로 가톨릭농민회에도 가입했다.

◆밀과 메밀농사

유기농으로 고구마를 재배했다.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종종 출연하는 멧돼지. 정말이지 농사는 개인의 몫이 아니다. 숱한 손길이 보태져야만 한다. 몇가지 원칙을 정했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작물 위주로 농사를 짓자. 친환경·경관농업을 특화하자. 고심끝에 우리밀부터 심었다. 그것도 어엿한 ‘애국’이라 믿었다.

하나 더 첨가된 작물은 ‘메밀’이다. 소설가 이효석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 탓도 있겠지만 메밀만큼 한국인에게 추억을 짙게 안겨주는 작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겨울에 싹을 내서 늦봄에 수확하는 밀농사는 자연스럽게 가을에 완성되는 메밀농사와 타이밍상 잘 맞물려 돌아갔다. 8개월을 키우는 참밀과 3개월이면 수확되는 메밀. 둘 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내 선택은 성공적이었지만 크게 돈은 되지 않았다. 체험, 휴식, 공연, 워크숍, 강좌…. 농업을 ‘문화’로 변주해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 엄청난 시행착오도 겪어야만 했다. 다행히 내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같은 농민회 활동을 하는 이 지역 선배들이었다. 기술부터 농기계까지 아낌없이 주었다.

여기와서 소믈리에 꿈도 성취했다. IT사업 시절, 난 서울의 삼성동에서 문화사업을 한다며 ‘디너시어터’란 독특한 외식업에 손댄 적이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식사와 술을 마시는 아이템. 그럴듯한 사업이었지만 경험미숙 등으로 말아먹고 말았다. 사업을 정리하며 남았던 그 와인과 양주는 지금 내 토굴에 앉아 있다. 난 빚같은 와인을 ‘빛’으로 둔갑시키고 싶었다. 이 지역 시인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이육사의 명시 ‘청포도’란 이미지를 와인과 접목하고 싶어 서울을 오가며 공부했다. 그래서 소믈리에가 된다. 술은 농업분야의 꽃이자 최고봉이란 생각은 여전하다. 술도 직접 만들었다. 1년전 사과와인이 생산된다. 이번 연말엔 밀과 메밀로 만든 전통방식의 소주가 면허주 형식으로 나올 예정이다. 모든 술에는 ‘맹개’란 상표를 불인다. 이들 와인이 맹개마을 전도사가 될 것이다.

◆4만원짜리 농가음악회

4만원짜리 ‘농가음악회’를 구상했다. 주변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티켓을 무료로 줘도 안 올거라 했다. 딱 100장만 팔고 싶었다. SNS마케팅을 했다. 이틀만에 전석매진. 150명이 강을 건너 맹개마을로 왔다. 하지만 적자였다. 맹개의 밑밭과 메밀밭이 많이 알려진 것에 만족했다. 이젠 봄·가을 한달씩 ‘만원의 행복’이란 일일 체험 프로그램도 판다. 너무 욕심내는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들렸다. 나는 돈이 아니라 우리농업 때문에 이런다고 외쳤다. 우리 농산물에 대한 사랑이었다. 도시의 가치에 질린 그들에게 농촌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게 도시인을 위한 치유 아니겠는가. 농사 짓고 술 만들고 음식을 만들어보게 했다. 이젠 여행가에서부터 작가까지 별별 사람이 다 찾아온다. 두세 번 오면 금세 친구·선배·후배로 엮여진다. 손님이 아니라 가족이다. 처음 아내와 약속한 게 하나 있다. 오지에 집을 짓지만 주거환경은 도시와 같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방 안에 화장실을 넣고 원할 때 난방이 되도록 했다.

청결과 안전은 양보할 수 없는 원칙. 이용한 침구나 체험장비들을 세척, 그리고 쓰레기 정리까지. 어쩜 농사보다 더 고역이다. 당연히 주인만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방문객에게 도움을 청했다. ‘쓰레기 되가져가기 캠페인’을 펼쳤다. 성공이었다. 서로 더 많이 가져가려고 했다. 모두의 자연이기에 누가 독점해선 안된다.

◆맹개댁이 된 아내

맹개로 오기 위해 무척 오래 아내를 설득했다. 심지어 울며 매달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낯선 곳에서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아내가 늘 내게 내미는 촌철살인 어록 하나가 있다. ‘당신은 미래를 위해 살고 나는 현재를 위해 살겠다’. 3년만 기다리면 학원을 그만두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내가 번 돈은 내 손에 넘어오는 즉시 감쪽같이 사라졌다. 과연 이 길의 끝은 어딜까? 나의 무지막지한 ‘농촌필승론’은 과연 대망의 결승테이프를 끊을 것인가.

아내가 1년 전부터 확 달라졌다. 학원을 정리하고 맹개로 들어온 것이다. 소목화당스럽게 살려고 최근 경북농민사관학교에도 입교했다. 맹개로 들어온 내 결단 이상의 강단이었다. 아직 서울물이 덜 빠졌지만 여전히 내겐 금쪽같은 맹개댁! 아무튼, 맹개 파이팅!!!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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