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 - ‘봉평메밀밭’ 전상우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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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2   |  발행일 2018-10-12 제41면   |  수정 2018-10-12
가성비 ‘굿’…코스식 같은 메밀요리 한상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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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채, 메밀만두, 메밀전병, 곤드레나물밥, 석쇠돼지불고기 등 메밀 관련 파생음식이 가성비 좋은 남도 한정식스타일로 차려져 나오는 게 이 집만의 특징이다.

가끔 뭘 배우지 않았는데도 쉽게 어떤 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셰프들이 있다. 타고난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얼떨결에 음식 외길을 걷고 있는 오너셰프에겐 다른 조리사가 갖고 있지 않은 ‘괴력’ 같은 걸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고정관념에 쉽게 매몰되지 않는다. 시키는대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를 잘 간파하고 기존 흐름을 조합해 그걸 제시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 파동IC 고가도로가 올려다 보이는 파동의 한 도로변. ‘봉평메밀밭’이란 간판이 보인다.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사람이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문구가 상호 아래에 적혀 있다. 전상우 오너셰프(56). 검정 베레모에 ‘메밀밭’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붉은색 상의 유니폼이 보이스카우트 단원복 같다. 양 미간과 오른 팔뚝에 상처가 선연하다. 종일 주방을 지킨다는 것. DMZ 경계병 이상으로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한눈팔면 대형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 상당히 터프하면서도 강건한 말투다. 간간이 흘려보내는 미소는 그만의 필살기다. 전 셰프가 만든 돼지콩나물불고기와 한방제육냉채는 대구시 주요 음식경연대회에서 인정받는다. 혈기방장한 그가 메밀요리 전도사가 되기까지 여러 사업에 손댔지만 모두 사라진다. 여러 사업은 결국 그를 오너셰프로 만들기 위한 시행착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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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과 고구마전분을 4대 6 비율로 섞어 수제로 반죽해 빼낸 막국수의 면발은 질긴 대구식과 달리 부드러운 봉평식으로 감미로운 과일육수가 맛의 한 축을 잡아준다.

日 여행중 본 트렁크 팬티 벤치마킹
사업 잘나가다 경험미숙 수억 잃어
25년전 한옥가게 만난후 덜컥 계약
요리는 몰랐지만 식당 하자고 다짐
돌솥비빔밥·돼지왕갈비집 두루 경험

힐링푸드 바람 메밀요리 전문점 변신
메밀·전분 4대 6, 부드러운 면발 조절
단품 메뉴 개발, 메밀 상차림과 연결
과일육수 낸 막국수·메밀들깨칼제비

◆트렁크 팬티 개발자였다

그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기자가 입고 있는 팬티가 어떤 건가를 확인한다.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색깔있는 풍덩한 트렁크 팬티는 바로 40년 전 제가 개발한 겁니다. 그것 때문에 돈도 많이 벌었지만 욕심에 사로잡힌 귀중한 사업 파트너와 결별했다”고 고백했다.

청도에서 태어난 그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중 이 길이 아니다 싶어 장사의 길로 들어선다. 남구 대명11동에서 당시 잘 나가던 데코라인 가구점을 운영한다. 생애 첫 사업은 파리만 날렸다. 이를 딱하게 본 건물주가 그에게 도움을 준다. 건물주의 친척이 보세의류 사업가라서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물건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그는 달서구 송현동 근처 한 아파트촌에 차를 세우고 스포츠의류를 팔았다. 첫날부터 대박이 났다. 가구 사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의류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는 잘 나가는 옷을 기술자한테 맡겨 대량생산하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걸 알았다. 평리동에 공장 같은 사무실을 차렸다. 서문시장 5지구, 아진상가, 동산상가 등 5곳에 옷을 납품했다.

우연찮게 일본 여행 중 외출복으로도 손색이 없는 트렁크 팬티를 처음 목격한다. 사업적 감각이 발동됐다. 당시만 해도 국내는 ‘사리마다 빤쓰 시대’였다. 그걸 벤치마킹해 팔면 히트칠 것 같았다. 문제는 팬티를 몸에 밀착시켜주는 고무밴드를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일본 바이어를 통해 한 대 1억원 정도 하는 직기를 수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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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컬러풀 트렁크 팬티를 처음 개발, 불티나게 팔아 재벌회장이 되려고 했던 전상우 셰프. 그는 여러 사업을 전전한 끝에 천직인 메밀요리 전문가로 돌아섰다. 메밀 반죽을 들고 있을 때가 자신이 가장 자기다울 때라고 말한다.

그는 트렁크 팬티 사업가로 승승장구했다. ‘그린통상’이란 회사를 차렸다. 숙녀복에는‘SIS’, 스포츠웨어에는 ‘INTERMOBBYS’란 상표를 부착했다. 대구백화점, 동아백화점, 울산 두리원백화점, 광주 화니백화점, 서울 동대문 남대문 등지로 팬티가 팔려나갔다. 하지만 동업관계였던 밴드 업자가 일본으로부터 기계를 몰래 들여와 전국에 밴드를 대량으로 깔아버렸다. 경쟁업체가 우후죽순 등장한다.

재차 7부 잠옷도 돌풍을 일으킨다. 하지만 경험미숙으로 고의 부도낸 업체 때문에 무려 7억원을 잃게 된다. 1990년대 초엔 상당한 액수였다. 그 무렵 그는 너무 잘나가 곧 재벌회장이 될 줄 알았단다. 고무성분이 있는 발포나염기법을 사용해 색다른 티셔츠 염직시대를 연다. 하지만 쥐가 갉아먹은 플라스틱 수도관이 파열되는 바람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자재를 모두 버리게 된다. 또 망연자실.

◆운명처럼 만난 식당가게

쌍방울 대구지점과 인연으로 쌍방울이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던 Lee, 인터메조 등의 매장을 관리하던 어느 날이었다. 진석타워 옆을 지나던 중 기와가 올려진 한옥스타일의 임대 가게를 목격하게 된다. 구이집을 하던 공간인데 헐값에 나와 있었다. 요리의 ‘요’ 자도 모르면서도 가진 돈을 다 모아 그날 계약해버린다. 25년 전이었다.

뭘 할까? 식당을 하자고 다짐한다. 상호는 ‘팔도별미’. 주메뉴를 고민하다가 그냥 주변에 직장인들이 많아서 간단하게 비빔밥 전문점으로 정했다. 일단 전주비빔밥 스타일로 가기 위해 전주로 잠입했다. 한 비빔밥 명가 찬모에게 돈을 주고 비법을 전해받고 그걸 빼곡하게 메모해서 대구로 왔다. 그런데 메모대로 요리를 해보니 이상한 비빔밥이 되고 말았다. 기죽지 않고 다시 대구에서 가장 믿음직한 비빔밥 전문점이던 개정에 노크했다. 거기서 식사를 하다가 ‘돌솥비빔밥’이란 아이디어를 얻는다. 저녁에는 닭갈비를 팔았다.

일단 일반 업소보다 두 배 정도 더 크고 넓은 전골냄비 같은 돌솥을 구했다. 나물은 6총사(고사리, 무, 시금치, 당근, 도라지, 콩나물). 고명은 소고기고추장볶음. 테이블은 고작 12개. 그런데 문 연날 바로 대박이 나버렸다. 정식대로 하려니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고 겨를도 없었다. 일단 30분 전에 돌솥을 달궈놓기 시작한다. 10분 전에 밥과 고명을 올려준다. 그렇게 하니 밑이 눌러붙지 않고 그냥 누룽지 같은 구수한 밥맛을 얻게 된다. 이 팁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손님이 나가면 다시 기름칠을 해놓아야 한다.

◆돼지왕갈비에서 메밀집으로 터닝

형제애가 좋은 그였다. 공수부대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형을 위해 그 가게를 양보했다. 다시 새로운 식당을 찾아 대구 곳곳을 다녔다. 고기 뜯는 걸 좋아하는 식도락가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갈비집에 도전했다. 하루 20만원 정도 매출을 올리던 한 갈비집을 인수했다. 달서구 상인동~수성구 범물동 터널 공사가 시작되면서 그 식당은 잠시 작업장 인부가 사용하는 밥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상호는 ‘지산골 왕갈비’로 정했다. 고기를 보면서 일어났고 고기를 보면서 잠을 잤다. 고기와 동고동락하다 보니 고기 손질에는 이골이 난다. 안 끊어지게 다이아몬드 그물망처럼 갈비살을 길게 져며낼 줄도 알았다.

식당 마케팅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가성비, 그리고 푸짐함, 그러면서도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단 돼지갈비 크기부터 엄청 키웠다. 보통 한 쪽에 6~7㎝인데 그는 10㎝ 이상으로 했다. 불판에 올리면 한가득이었다. 식감은 더 먹음직스러울 수밖에. 그리고 2탄을 개발했다. 바로 ‘메밀갈비짬뽕’이다. 소갈비를 고아낸 뒤 그 물에 새우, 멸치, 바지락 등 해물을 넣고 밀가루 대신 메밀면을 가미했다. 완전 새로운 짬뽕이었다. 대구에서 가장 별난 짬뽕 리스트에 올라갔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손수 갈비짝을 먹기 좋게 장만하려면 몸이 골병이 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점차 힐링푸드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식당을 또 변신시켰다. 메밀요리 전문점이다. 일단 주변 정리에 들어간다. 푹 꺼져있는 땅을 조금 돋우기 위해 지반올리기 공사에 돌입한다. 덤프트럭 230대 분량의 흙을 쏟아붓고 느티나무, 산사과, 중국단풍 등을 심어나갔다. 식당에 어울리는 그림도 사 걸었다.

메밀하면 강원도 생각이 났다. 그래서 상호를 ‘봉평메밀밭’으로 했다. 지인의 친척이 거기서 메밀을 만지고 있었다. 일단 봉평으로 가서 요리의 기본기를 배웠다. 강원도권에서는 메밀과 전분 혼합비율이 7대 3 정도. 그런데 대구도 그렇게 하려고 하니 대구는 여전히 매우 질긴 ‘나이롱냉면’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는 메밀과 전분 비율을 4대 6으로 섞어 부드럽기를 조절했다.

예전 돌솥비빔밥과 연결하고 싶어 단품 메뉴를 몇 개 더 개발해 한상차림으로 꾸몄다. 코스식 메밀요리 같았다. 곤드레밥, 메밀전, 메밀만두, 메밀묵채밥, 메밀전병, 메밀묵, 거기에 맞는 돼지목살석쇠불고기, 샐러드 등을 묶어 아름상(1만3천원)과 참한상(1만6천원)을 만들었다. 집안 곳곳에 효소 담은 옹기가 있다. 10여가지 산야초를 섞어서 진액을 만들어 그걸 샐러드 등에 사용한다. 아직 지역에 이렇게 다양한 메밀요리를 내는 데는 없는 것 같다. 메밀로 치장한 남도한정식 같달까.

이 집 메밀막국수는 ‘봉평식’이다. 기본 사골육수에 오이, 사과, 배, 양파, 열무김치국물 등을 배합한 ‘과일육수’를 사용한다. 칼국수와 막국수를 절충한 메뉴가 있는데 바로 그게 ‘메밀들깨칼제비’다. 그는 평범한 걸 싫어한다. 연계메뉴가 서로 연동될 수 있게 메뉴를 개발한다. 그만의 감각이 있어 가능하다.

그는 지금 국내산과 중국산 메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좋기야 국내산이지만 가격이 2~3배 차이가 나니 영업차원에선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때 식당 주변에 메밀을 키웠고 통영 욕지도에 메밀밭용 밭도 확보했다. 그러나 보여주는 메밀밭은 가능해도 직접 키우고 제분해서 국수를 만드는 건 아직 먼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언젠가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해결하는 ‘메밀가’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의 음식은 북한음식처럼 참 심심하다. 그리고 오밀조밀 파생 메밀요리가 구색을 잘 맞춘다. 육수도 지극히 순박하고 자연스럽다. 과연 이 집이 그의 음식인생에 있어 종착역이 될까? 수성구 파동로 91길. (053)761-7511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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