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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단상] ‘전쟁과 평화’, 그리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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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0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영원한 고전이라 할 만한 ‘전쟁과 평화’에는 톨스토이 특유의 묘사법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구절들이다. ‘매우 매력적인 여성에게는 언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주정꾼 같은 결연한 몸짓’ ‘아직 충분히 어른이 되지는 않았지만 장차 훌륭하게 될 성싶은 예쁘장한 새끼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이런 묘사는 특정 상황이나 그 속에서 인물이 보이는 행위나 심정을,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보편적인 것인 듯 제시해 준다. 설명이나 해설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경우에도 그는 구태여 이러한 묘사를 구사한다. 그 결과 어떠한 인물이나 상황의 내밀한 데까지 엿본다는 느낌과 더불어 작품이 재미있어진다. 인간의 언행과 심리에 대한 톨스토이의 오랜 관찰과 탐구에서 얻어졌다는 뜻에서 이를 ‘통찰적 묘사’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통찰적 묘사는 두 가지에 의해 가능해졌다. 하나는 인간 이성의 힘, 곧 합리적인 해명 능력에 대한 그의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상류계급의 일상성이라는 상황이다. 그에게 있어 러시아 귀족들의 사교생활은 인간관계에서의 ‘영원불변한 것’을 보여준다(박형규 옮김, ‘전쟁과 평화’ 중권, 범우사, 1988, 428쪽). 러시아 귀족의 사교계란 지나간 시대의 것이지만 그 속에 있는 불변의 인간 삶에 대한 그의 통찰은 현재의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여전히 준다. 1869년에 나온 ‘전쟁과 평화’가 계속 읽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 톨스토이가 역사성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속단하면 안 된다. ‘전쟁과 평화’를 위대한 작품으로 올려놓는 또 한 가지가 바로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에 대한 통찰이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톨스토이는 역사가들의 해석을 작품 속에 소개하며 직접 비판할 만큼 열정적인데, 다소 놀랍게도 그의 주장은 전쟁이라는 역사는 ‘알 수 없다’는 것에 가깝다. 서로 부딪치는 나폴레옹의 야망과 러시아의 의지는 명확하다 해도, 그 과정을 규정할 수는 없다고 톨스토이는 누누이 주장한다. 이 위에서 “우리들이 검토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원인이라는 관념이 적용되지 않는다”(하권, 528쪽)라고 결론을 맺는다. 이런 생각은 역사적 결정론에 대한 거부로서 의미를 갖는다.

또한 톨스토이는 역사의 동력을 몇몇 영웅에게서가 아니라 민중에게서 찾는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그가 보기에, 영웅들이 역사의 변화를 낳는다는 생각은 ‘가장 약한 현상’을 ‘가장 강한 현상’의 원인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하권, 17쪽). 톨스토이에게서 역사의 동력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 “다만 눈앞의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있었던”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가장 무익한 존재’들에게서 찾아진다(하권, 175~176쪽). 해서 톨스토이는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의 총화만이 혁명과 나폴레옹을 낳았고 그들 때문에 괴로워했고 그리고 그들을 멸망시켰던 것이다”(하권, 17쪽)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전쟁과 평화’는 인간 삶의 두 가지 국면 각각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쟁과 같은 역사적인 격랑의 흐름은 한두 가지 요인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의 총화로만 해석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생활이 반복되다시피 하는 평화로운 일상은 보편성 차원에서 해석해 낼 수 있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어쩔 수 없는 듯이 패망하는 모습을 별다른 해석 없이 긴 호흡으로 그리는 한편, 전쟁기에서조차 이어지는 면면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통찰적 묘사로 제시하고 있다. 러시아에서의 전쟁과 평화를 통해 인간 사회의 격랑과 그 밑에서도 지속되는 일상사를 함께 보여 주는 것이다.

2018년 현재, ‘전쟁과 평화’는 실제적인 의미까지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냉전체제의 마지막 잔재로 남아 온 한반도의 미래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모습으로 진전되리라는 점을 알려주는 까닭이다.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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