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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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6   |  발행일 2018-11-06 제30면   |  수정 2018-11-06
격변의 한국 근대 100년은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아야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 팽배
代를 이어 그 비극은 반복돼
아버지 삶, 폐기된 서류처럼…
20181106
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

한국의 근대 100년의 역사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로 표현될 수 있다.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먹고살 수 있는 격변기 사회였다. 임진왜란 이후 극명한 부계사회였으니,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부모의 권위가 파괴되었거나 의미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대구지방의 자료를 보면 희한한 게 있다. 1690년 숙종 16년에 양반은 대구에서 9.2% 정도다. 보통 조선시대 지배계층을 3% 정도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 ‘페이퍼양반’이 대구에 상당히 몰려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점 더 늘어나 1783년 정조 7년에는 양반이 37.5%, 1858년 철종 9년에는 무려 양반이 60.3%(상민 28.2%, 천민 1.5%)로 늘게 된다. 거짓말 같다. 군대 갔다 온 남성의 입장에서 비유하면, 부대 TO(정원)가 110명 정도인데 지휘자급인 병장만 70% 이상이라는 말이다. 지배계급의 인구가 항아리구조로 늘어나면 노비는 품귀현상이 일어나며 오히려 값이 상승한다. 한 도시에 양반이 70%가 넘었다는 것은, 그 도시는 ‘양반도시’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양반들이 통상 평민들이 해야 할 일을 해야 도시가 돌아간다는 말이다. 군번이 꼬여 말년 병장이 70%인 부대를 제대했던 남성들은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할 것이다. 양반이 ‘삽질’을 해야 도시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이 도시에서 양반들은 바로 장사를 했다. 대구의 양반들은 경상도에서 몰려온 쇠락한 양반들이었고 아버지의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양반들이었다. 아버지처럼 살면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한 자식들이 탈출한 도시가 대구였다. 그만큼 조선은 격변기의 사회였다.

1669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우의 도읍을 대구가 통합하면서 큰 시장이 열리게 된다. 게다가 1677년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조선 전기 66개에 불과하던 향시(鄕市)가 250여개로 늘어나게 된다. 1700년대 후반에 연암 박지원의 한문 단편 소설에 나오는 ‘허생’은 바로 대구의 양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경상도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를 관리하며 고향에 붙박으며 살아온 향토 세대들이었다. 아버지는 ‘유학’과 ‘고향’을 이야기했으나 자식들은 ‘돈’과 ‘시장’을 추구했다는 말이다.

대구부사에 따르면 19세기 말엽 대구 인구는 7만5천명이라 했다. 그 중 양반과 준양반이 총인구의 20~25%, 서민층이 60%, 노비가 8%였다고 하며 서민층 60% 가운데 보부상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당시의 서민층이라고 하면 쇠락한 양반을 의미하는 것이며 대구사람 절반이상이 보부상이었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롤모델이 아니고 ‘허생’이 롤모델이 되었던 도시라는 말이다.

하지만 비극은 반복된다. 정규옥, 한윤화, 정재학, 서상돈, 이일우, 박기돈 등 땅을 떠나온 양반들이 비즈니스에 몰입하고 있을 때 그들의 자녀 세대들은 아이러니하게 비즈니스맨이 되지 않는다. 유학을 떠나게 되고 사회주의 지식인이 되어 되돌아오게 된다. 그들은 1920년대 대구를 동방의 모스크바로 만든다. 부모의 재력에 바탕을 둔 유학파 지식인들은 1945년 해방정국의 대구를 만들게 된다. 좌우 대립의 상황속에서 10월 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대구경북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월북하였고 가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전쟁기 죽임을 당하거나 그간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

내가 최근 만나고 있는 세대들은 바로 그들의 자식세대다. 최근 대구 10월사건에 연루된 한 공산주의자 아들의 고백영상이 보수성향의 유튜브 채널에서 엄청난 조회수를 보였다. 난 그의 강연에서 무엇이 옳고 그런지 판단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라고 온 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근대 100년 우리 아버지들의 삶은 어떤 폐기된 서류 속에, 혹은 해석되지 않는 자폐적인 시간 속에, 아니면 현금출납기라고 희화화되면서 살아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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