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결함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제2의 BMW사태 막을까

  • 손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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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0 07:49  |  수정 2018-11-10 07:52  |  발행일 2018-11-10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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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회사 말단 직원이 어느날 서류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의료 기록에 의문을 품는다. 의료 기록들이 부동산 서류에 함께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그는 기업의 비리라고 판단해 끈질기게 추적한 끝에 지역에서 전력사업을 하는 대기업 공장에서 크롬 성분이 섞인 오염물질을 지하수에 대량 방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료 기록은 공장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수질오염 등으로 질병을 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그는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 소송을 벌인다. 4년 뒤 해당 법원은 수질오염의 원인을 제공한 대기업에 미국 법정 사상 최고 배상액인 3억3천300만달러(약 3천700억원)를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2000년)의 내용이다. 실제 손해보다 훨씬 큰 징벌적 배상금이다. 거액의 배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 특유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정부와 국회는 자동차 결함으로 인한 사고 등 피해의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피해액의 최고 5배로 정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 ‘車관리법 개정안’ 발의
현행법에선 결함 은폐와 관련
배상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아
“기업 불법 저질러도 번만큼만
물어주면 되니 정신 안 차려”
美, 해당 기업 도산시키기도
과잉처벌로 ‘기업위축 우려’



◆잇단 BMW 화재로 자동차 분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박순자 의원(자유한국당)은 자동차 분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 등을 담은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지난 1일 대표 발의한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의원입법이지만 사실상 국토부와 함께 마련해 정부가 발표한 ‘자동차 리콜 혁신 방안’ 주요 내용이 포함됐다.

개정안에는 ‘자동차 제작사 등이 자동차 안전상의 결함을 알면서도 즉시 시정하지 아니해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입은 경우 그 손해의 최대 5배까지 배상책임을 지도록 하고, 손해를 입은 피해자에 대한 입증책임을 완화’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정부가 빈번한 화재 발생 등 국민 안전에 위협이 있는 사안을 조사할 경우 제작사가 결함 여부를 입증하는 자료를 제출하도록 의무화하고, 제출하지 않은 경우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번 법안 발의는 최근 잇따라 발생한 BMW 화재 사건 때문이다. 올해 40대가 넘는 BMW가 도로 위에서 불탔고, 사람들은 BMW 엠블럼만 봐도 불안해 했다. 특정 브랜드의 동일한 차종에서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불이 난 사례는 이례적이다.

하지만 BMW사는 사태 수습에서 미온적인 모습을 보였고, 사람들의 불안감은 점점 분노로 바뀌었다. 정부는 뒤늦게 지난 9월6일 ‘자동차리콜 대응체계 혁신방안’을 발표하게 됐다. 혁신방안은 제작사의 법적책임성 강화, 선제적 결함조사 체계 강화, 소비자 보호 및 공공안전 확보, 결함조사 관련 조직 정비 및 기반확충 등 크게 4가지로 나뉘었다.

이 중 가장 눈여겨볼 사항은 소비자 보호 부분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이다. 현행법에서 자동차관리법상 결함 은폐와 관련된 손해배상 규정이 명문화돼 있지만 구체적인 배상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제조물책임법의 경우 손해의 3배를 보상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이는 생명 또는 신체에 대한 손해에 대해서만 적용이 된다.

◆끊이지 않는 자동차 급발진·에어백 미전개 논란

국내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이 눈에 띄는 이유는 선진국들은 진작 도입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자동차 제작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형식승인제도를 폐지하고 제작사 스스로가 안전기준을 인증하는 자기인증제도를 시행하는 등 기업의 경제활동에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은 부여받은 자율성만큼 자동차 제작 및 판매에 있어 무거운 책임감을 갖지 않았다.

대표적인 문제가 에어백 미전개와 급발진이었다.

지난달 25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김영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자동차리콜센터에 신고된 차량 급발진 건수는 모두 449건이다. 무사고 38건을 제외한 급발진 신고 411건 가운데 에어백 미전개 건수가 244건(59.4%)에 달했다. 특히 현대자동차의 에어백 미전개 건수가 114건으로 가장 많았고, 기아자동차 31건, 르노삼성 30건, 쌍용자동차 20건, 한국GM 18건의 순이었다.

해마다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차량 사고가 발생한다. 그에 따라 에어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제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 때문에 “사고가 나도 충돌각이 맞아야 터진다”는 속설이 나올 정도로 현대, 기아차에 대한 불신이 높았다. 그러나 제조사 또는 차량 결함이 원인으로 밝혀진 사례는 아직 없다. 대부분 운전자 실수나 부주의로 결론이 내려진다. 그만큼 급발진의 원인 규명이 어렵다는 얘기다. 제대로 원인을 규명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법적·제도적 보완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져 왔다.

지난해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자동차 결함 피해자 제보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와 유가족들의 안타까운 증언들이 쏟아졌다.

박용진 의원은 “급발진 의심 사고 차량에 대한 조사 결과는 대부분 ‘차량 결함 발견 못함’과 ‘운전자 과실’로 나온다. 현재 정부의 검증 인력과 장비, 기술력도 부족하지만 해결 의지도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병일 자동차 명장도 “한국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없기 때문에 제조사가 제도적 허점을 알고 사후 대처에 소홀한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필요하다는 사람들은 “기업이 불법을 저질러도 벌어들인 만큼만 물어주면 되니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 기업에 보복적인 손해를 물려야 기업이 소비자를 우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체계 하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금의 부당 이득성, 손해배상액의 자의적 산정 등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자체가 이질적이며, 과잉처벌로 인한 기업의 경제활동 위축과 소비자 소송남발 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도 도입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미국에선 자동차 징벌배상제로 기업이 파산하기도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에서는 자동차 부품의 결함을 밝혀내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기업들이 있다.

세계 2위 에어백 업체인 일본 다카타는 ‘죽음의 에어백’ 논란 끝에 지난해 결국 파산을 신청했다. 부채 총액은 1조엔(약 10조2천억원)을 넘는다. 일본 제조업체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파산이다.

1933년 창립된 다카타는 세계 20개국에 56개 공장을 운영하며, 에어백과 안전벨트 등 자동차 안전용품에서 세계 시장의 20%를 점유했다. 2016년 매출이 6천600억엔(약 6조7천억원)에 종업원이 4만6천명에 이른다.

에어백 결함이 처음 발견된 것은 2004년에 들어서다. 이후 다카타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문제를 키웠다. 문제가 된 다카타의 에어백은 에어백을 부풀게 하는 인플레이터라는 장치에서 발생한 금속 파편이 운전자에게 날아가는 결함이 발견됐다. 다카타는 2000년경부터 제품의 결함을 알았지만 사고 후에도 “원인이 확실하지 않다”며 계속 제품을 판매했다. 2014년 혼다가 “원인은 제쳐놓고 일단 문제를 수습하자”며 미국에서 전면 리콜을 선언한 것과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원인 규명이 먼저”라며 거부해 큰 비판을 받았다.

결국 지난해 1월 미국 법무부는 다카타가 에어백 결함을 알고도 은폐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유죄를 인정했다고 밝혔다. 다카타는 형사상 책임을 인정하고 10억 달러(약 1조1천400억원)의 벌금을 내기로 합의했다. 다카타는 안전을 위한 에어백을 만들면서도 에어백이 치명적인 위험을 안길 수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기려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카타 에어백 결함으로 숨진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17명에 이른다. 잘못된 초기 대응으로 리콜 대상이 된 자동차 수는 약 1억대로 늘었다. 지난해 3월 말 기준으로 부채는 3천800억엔(약 3조9천억원)이지만 리콜 비용을 포함하면 1조엔을 훌쩍 넘었다.

앞서 2015년 폴크스바겐 디젤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도 처벌은 강력했다. 폴크스바겐은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때문에 미국에서 17조2천억원(153억3천300만달러)을 배상했다. 당시 미국에서 폴크스바겐의 차량을 소유한 이들은 차량 환불이나 수리 여부와 관계없이 1인당 약 590만∼1천10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국내 소비자는 100만원짜리 쿠폰에 만족해야 했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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