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상주 양진당과 오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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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30   |  발행일 2018-11-30 제36면   |  수정 2018-11-30
열지어 높이선 기둥, 호방하고 장엄한 멋
이마위로 주름진 서까래, 여음처럼 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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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소실되었고 안채와 행랑채가 연결되어 전체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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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 툇마루 서까래가 여음처럼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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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양진당. 검간 조정이 1626년에 지은 집으로 보물 제1568호다. 오른쪽은 2008년 복원한 사당.

상주의 낙동면(洛東面)은 고을의 동남쪽 끝이다. 낙동강이 크게 흘러 동쪽으로는 의성을 스치고 남쪽으로는 구미를 관통한다. 서쪽에는 상주의 안산(案山)인 갑장산(甲長山)이 동쪽 자락을 펼쳤고 면의 한가운데는 장천(長川)이 북으로 흘러 낙동강과 하나 된다. 갑장산과 장천 사이 구릉진 땅이 승곡리(升谷里)다. 옛날 승장사(勝長寺)란 절이 있어 생긴 이름이라 한다. 그 마을에 ‘양진당’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1626년 ‘양진당(養眞堂)’이라는 민가가 건립되면서 마을과 집은 저절로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양진당은 ‘진리를 기르는 집’이다.

양진당
私財로 상주 최초 의병 일으킨 검간
후손들 학문연구·독서공간 위해 건립
앞면 9칸, 왼쪽 옆면 4칸·오른쪽 6칸
안채와 행랑채 연결 ‘ㅁ’자형 구조
비많고 눈많은 기후대비 다락 형태

오작당
‘지난날의 잘못은 두번하지 않는다’
가풍일으키기 위해‘구당’이라 불러
후손들 기거…소박한 4칸짜리 사랑채

◆양진당

마을은 원래 장천면 요포(繞浦)라 하였다. 긴 천으로 둘러싸인 포구였던 모양이다. 낮아서인지 좁아서인지 천은 쉬이 보이지 않지만 근 4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형세가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멀리서부터 보인다, 양진당의 길고 반듯한 지붕. 유려함보다는 기계적인 민감함이 느껴진다. 맞배지붕이 올라간 아홉 칸 행랑채 가운데에 대문이 열려 있다. 집 앞에는 붉은 잎 떨어진 단풍나무 한 그루와 중건비가 서 있고, 길가에는 날아갈 듯한 ‘양진당’ 표석이 있다. 표석의 받침돌에 집 지은 이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양진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1626년에 지은 집이다. 그는 1555년에 태어나 18세에 향시에 합격한 이후 주로 지역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선친의 묘소 아래에 검계(黔溪)라는 작은 개울이 있어 호세 검간이라 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었으며 학봉은 그의 처삼촌이기도 했다. 그가 3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검간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킨다. 상주지역 최초의 의병이었다 한다. 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을 곽재우 휘하에 보내기도 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6년 여간 전쟁의 상황과 지역 의병들의 움직임, 관리와 백성들의 동향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조선 임진란 기록’은 보물 제100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조금 놀란다. 누각처럼 긴 기둥 위에 집이 올라 있다. 게다가 사랑채가 아니라 안채다. 앞면 9칸이 왼쪽 옆면 4칸, 오른쪽 옆면 6칸과 ‘ㄷ’자로 이어지는데 행랑채와 연결되어 전체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양진당은 검간이 말년에 안동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에 있던 처가 문중의 99칸 가옥을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사랑채는 1966년 대홍수 때 쓰러졌고 1981년에 전면 복원한 것이 현재의 갸웃한 모습이다. 복원의 정석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이 집은 보물 제15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리를 기르는 집

양진당은 호방한 사랑채의 분위기를 풍긴다. 장엄하기까지 하다. 열 지어 높이 선 기둥 때문일 것이다. 기둥의 아래는 사각, 위는 둥글게 치목한 것도 특이하다. 이런 다락집 형태는 여름의 지열과 습기, 그리고 강물의 범람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건물 아래에 빼곡한 돌들은 온돌장치인 방고래다. 방은 겹으로 구성된 ‘田’자 형이다. 상주의 여름은 덥다. 비도 많고 강도 범람한다. 상주의 겨울은 눈이 많고 엄청 춥다. 양진당의 다락형 겹구조의 온돌집은 이러한 기후에 맞춘 것이다.

툇마루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 실내화 몇 켤레가 마련되어 있다. 가만가만 오른다. 삐걱대는 소리 없다. 이마위로 차곡차곡 주름진 서까래가 여음처럼 은근하다. 양진당 편액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쓴 것이다. 그는 ‘윤봉길 열사 기의비’ ‘백범 김구 선생 묘비’ ‘4·19혁명 기념탑’ 등을 쓴 분이다. 툇마루 끝에 종이 달려 있다. 양진당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을 위한 학교로 열렸다가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고 한다. 6·25전쟁 후에는 전쟁으로 소실된 낙동보통학교(현 낙동초등학교)의 분교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검간 조정이 처음 양진당을 세운 이유는 후손들의 학문 연구와 독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돌과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이 수백 년 이어질 수 있는 것은 튼튼한 뿌리와 건강하게 자라나는 가지들 때문일 것이다.

◆어제를 깨닫는 집, 오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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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당 표석. 받침대에 구당 조목수의 차운시가 새겨져 있다.

양진당 자리에는 원래 오작당(悟昨堂)이 있었다. 1601년에 검간 조정이 지은 것이다. 오작이란 ‘어제를 깨닫는다’는 것, 즉 지난 날의 잘못은 두 번 다시 행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다. 현재 오작당은 양진당에서 약 500m쯤 떨어진 통사동(通仕洞)에 위치한다. 양진당의 선비들과 잘 통한다는 뜻이다. 오작당은 양진당을 짓기 한해 전인 1661년에 검간의 증손자인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이 이건했다. 조선후기 뛰어난 유학자였던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는 가풍을 일으키기 위해 오작당을 구당이라 부르고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작은 대문 앞은 아예 화원이다. 지금 조그마한 연못에 연은 허리를 꺾었고 능소화는 바짝 마른 몸으로 담장에 기대있지만 꽃 시절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허나 놀랍게도 자목련 봉오리는 몽실몽실 금세라도 꽃을 피울 듯하다. 개가 짖는다. 눈이 마주치자 멈춘다. 오작당에는 현재 검간의 후손이 살고 있다.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대문을 들어서면 소박한 4칸의 사랑채다. 행랑채가 딸린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나타난다. 마치 2층집 같다. 안채는 양진당과 같은 겹집이며 좌우 익사는 없어졌다. 오작당은 양진당보다 앞선 건물로 양진당 건축의 원형이다. 안채 뒤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검간 조정의 위패를 모신 불천위 사당이다.

검간의 임진 기록 중 잊지 못할 내용이 있다. ‘장천의 종들인 사돌, 숙례, 춘옥 등 10여 명이 갈 곳이 없어서 이곳(안동) 처가로 왔다. 양식이 떨어진 지 오래되어 장차 구렁에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들의 몰골이 흙과 같아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방 안으로 들어와 울면서 대화를 청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그들을 도울 길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함께 울 뿐이었다.’ 오작당과 양진당의 굴뚝은 모두 매우 낮다. 종들과 함께 울었던 검간은 이후 집을 지으며 굴뚝을 낮게 세웠다. 가난한 이웃에 연기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대전방향으로 가다 김천분기점에서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방향으로 간다. 선산IC로 나가 상주방향 916번 지방도(선상서로)를 타고 계속 북향하면 된다. 먼저 오작당이 나오고 승곡리 마을회관 지나 우회전해 양진당길로 조금 가면 양진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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