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유물 감상, 쌀빵 먹고 수다 떨기…‘청라언덕 박물관빵’ 시대 열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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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08   |  발행일 2019-03-08 제34면   |  수정 2019-03-08
[人生劇場 소설기법의 인물스토리] 멀티 사업가 전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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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박물관 경영이 열악해지자 관장인 처외삼촌과 손을 잡고 ‘청라언덕 박물관빵’을 론칭한 전상욱 사장(왼쪽)과 이동렬 지구촌박물관장이 돌사자상 존 중간에서 시대와 소통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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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경영하다 어려워진 쌀빵 브랜드 ‘라팡’을 인수한 뒤 위기에 몰린 지구촌박물관 1층에 쌀빵 뷔페를 차린 전상욱 사장이 점원처럼 빨간 모자를 쓰고 대표 식빵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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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관장이 지구촌박물관을 만들 수 있게 한 박물관 랜드마크 돌사자상의 늠름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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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와 모던이 교차하고 퇴락미가 가득한 박물관 1층 부속 정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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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와 모던이 교차하고 퇴락미가 가득한 박물관 1층 부속 정원 전경.

아버지는 현재 하이원스키장이 있던 강원 영월군 사북 탄광(2004년 폐광)의 탄부였다. 탄광촌으로 이사를 갔다. 6년 정도 검은 산천을 보며 살았다. 어머니는 시외버스정류장 근처에서 잡화 파는 가게를 차렸다. 나는 거기서 버스표를 팔았다. 하지만 엄마는 위암에 걸려 고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매일 까만 바람만 몰아쳤다. 더 이상 탄광촌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한다. 서울역 뒤 용산구 후암동에 전을 깔았다. 내 희망은 점점 장돌뱅이처럼 변해갔다. 하지만 나는 선천성 미래파. 기본학력조차 없으면 죽음이다 싶어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신문배달부도 자청했다.

낮에는 중앙일보, 새벽에는 한겨레신문을 돌렸다. 덕분에 무려 16종의 국내 일간지를 다 훑어볼 수 있었다. 제목만으로도 각 신문의 정치적 성향과 논조까지 알게 됐다. 걸인, 비행청소년 등 난 그때 서울역 밑바닥 문화를 통해 한국 ‘슈퍼을’의 속마음을 훔쳐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꿈은 교도관으로 영글어갔다. 공무원시험을 봤지만 생각과 달리 낙방했다.


탄부 부친, 6년간 탄광촌 검은 산천 삶
부산진시장서 시작 커튼사업에 승부
업계 최초 홈피 구축 해외판매망 넓혀
대구로 와 신개념 우드블라인드 첫선
시트커버 틈새시장도 공략 성공가도
도메인 공급 관심 ‘대구시.com’소유

삼촌 박물관과 조카사위 빵의 만남
농경사회 유물·청나라 단두용 작두…
천년 넘은 대형돌사자 등 130점 소장
박물관으로 들여온 힐링 쌀빵 ‘라팡’
분신 같은 돌사자에 빵 스토리 첨가
30여가지 쌀빵, 10여가지는 뷔페식
자연친화 돌과 웰빙빵 ‘건강지킴이’


◆부산진시장 커튼직원

1996년 아버지의 광부시절도 끝난다. 모아놓은 돈도 없는 상태에서 고모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 현재 문화마을로 유명해진 사하구 감천동으로 이사간다. 방 1개, 다락방 1개뿐인 달동네 집. 정이 가지 않았다. 군 선배 주선으로 다시 상경, 다단계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여긴 나이가 많다고 사업을 더 잘하는 게 아니었다. 기존 사회에서의 레벨은 중요하지 않았다. 믿었던 사람이 불신의 존재로 돌변하고 불신의 존재가 믿음의 존재로 다가서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다. 술수보다 진실 곁에 사람이 더 모여든다는 걸 알았다.

집에선 난리가 났다. 장남인 내가 무슨 신흥교주의 꼬임에 빠진 줄로만 안다. 아버지에게 내 일을 설명해줬는데 덜컥 서울로 올라와선 대뜸 다단계를 하시겠다고 했다. 나는 말렸다.

그때 만난 강남 오렌지족은 누구보다 미래를 잘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모 등골 파먹고 사는 패륜아가 아니었다. 다단계를 가장 잘 이용해 목돈을 벌었고 그걸 자본으로 해서 빌딩, 주유소, 골프연습장, 도심 레포츠빌딩 등에 투자했다.

서울은 내게 오히려 ‘덫’이었다.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벼룩시장 정보지를 탐독했다. 부산진시장 내 한 커튼가게 직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진시장 안팎에는 이런저런 커튼 관련 가게가 몰려 있었다. 원단은 서문시장, 판매망은 부산이 주도했다. 나는 갓 분양된 아파트촌으로 달려갔다. 입주자에게 샘플북을 내밀며 무작위로 영업했다. 2일차, 당시로선 파격적이고 디자인 감각이 출중한 한 샘플북을 보게 됐다. 커튼에 승부를 걸자고 다짐한다. 나는 ‘윈텍스’란 상호를 정했다.

◆도메인보급 운동가

나는 다른 업자가 감히 상상도 못하는 영업전략을 수립한다. 커튼업계로선 최초로 홈페이지를 구축한다. 우연찮게 당시 붐을 일으킨 PC방에서 홈페이지 제작북을 보게 된다. 그 책을 정독해 내 나름대로의 홈페이지를 구축한다. 어느 날 내 홈페이지를 본 한 중국 바이어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온라인시대를 절감한다. 다들 커튼을 온라인으로 판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2000년 대구로 올라와 북구 유통단지 섬유제품관에 입주한다. 거기서 신개념 커튼인 ‘우드 블라인드’를 대구에서 처음 판매하게 된다. 섬유커튼이 대세였는데 나는 새로운 오브제로 승부수를 날렸다. 2003년 즈음에 옥션, G마켓 등 전자상거래시대가 본격화된다. 나는 온라인을 통해 우드 블라인드를 정말 많이 팔았다. 1년간은 좋았는데 실력파 업자들이 내 제품을 벤치마킹해 시장에 낮은 가격으로 유통시켰다. 단골들은 일제히 거래선을 바꾸었다. 그때 인터넷 시장에선 영원한 단골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커튼을 넘어 시트커버에 승부를 걸었다. 병원, 피부관리실, 물리치료실, 한의원 등도 경쟁이 치열해 더 쾌적한 시트가 항상 필요했다. 나는 그 틈새시장을 공략해 성공했다.

나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인터넷 주소인 ‘도메인(Domain)’ 보급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초창기는 숫자 도메인이 주종이었다. 1천개 이상을 만들었다. 2012년 한글도메인시대가 열린다. 나는 서둘러 대구시는 물론 경북대, 영남대 등 주요 대학 도메인까지 만든다. 이어 김광석, 박정희, 세종대왕 등 주요 인물에 대한 도메인도 추가로 설정했다. 김광석길을 위해 ‘방천시장.com’도 만들었다.

‘대구시.com’도 내가 갖고 있다. 현재 여러 관청의 사이트는 수없이 많지만 연계관리 부재로 국내 최고 슈퍼 포털검색사이트인 네이버가 떼돈을 벌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자영업자부터 자기 도메인 갖기 운동을 벌이면 포털의존도가 줄어들고 그럼 정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완화될 것이다.

나의 엉뚱한 상상력은 ‘자살방지카페’를 만들게 했고 최근에는 나를 돕는 외삼촌이 지키고 있는 이불가게 근처 서문시장 건어물가게 앞에 3병 1천원짜리 ‘무인생수판매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골동품 수집가와 쌀빵

박물관과 빵의 만남도 내 삶의 멋진 터닝포인트다. 이 박물관에는 우리의 지난 농경사회의 흔적이 유물로 앉아 있다. 가장 흥미로운 소장품은 돌사자다. 처외삼촌의 표정도 언뜻 사자 같다. 관장도 결국 자기 소장품을 닮는 모양이다. 전 세계적으로 돌사자 박물관은 일본에 3개, 대만에 1개가 있었는데 대만이 문을 닫아버렸다. 지구촌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30점의 돌사자는 그 수는 물론 오욕칠정을 모두 품고 있는 듯한 다양한 표정 때문에 제4의 돌사자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4층의 대형 돌사자는 족히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직 학술적 규명이 안돼 더욱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특히 청년 백수들에게 수호천사가 될 것 같다.

그밖에 눈여겨볼 전시품이 있다. 청나라 때 사용하던 단두용 작두, 30여종의 나무화석, 이북에서 사용하던 목단단지,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340㎝짜리 매머드 가래, 한지로 만든 침상, 청나라 때 곤룡포, 표정이 더없이 해학적이고 생동적인 돌 나한상, 통나무로 만든 6폭 가리개용 자개병풍 등이다. 그시절 구두닦이통, 아이스케키통 등은 관람객의 볼에 웃음이 머물게 만든다.

내가 커튼집 사장에서 빵집 사장이 된 이유는 2011년 지역에서 처음 쌀빵시대를 연 ‘라팡’ 1대 사장인 최모씨 때문이다. 그는 파리바게뜨에 맞서기 위해 라팡을 선택했다. 몸에 그다지 좋지 않은 밀가루빵에서 벗어나 힐링 쌀빵시대를 열고 싶었다. 냉동 생지 유통망을 구축해 무려 400여개의 빵을 여러 매장에서 직접 구워 팔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반응이 좋아 15호점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그는 빵만 알았지 사업은 잘 몰랐다. 나는 절벽으로 내몰린 라팡의 희망이 되기로 했다. 현재 라팡의 본점은 박물관이다. 판매는 거의 온라인을 통해 이뤄진다.

단품으로 팔면 다양한 걸 못 먹기 때문에 박물관점에서는 뷔페식으로 깔았다. 흑미, 해바라기, 완두앙금, 고구마, 슈크림, 바나나, 모닝빵, 흑미호두식빵, 피자빵, 시금치치아바타, 팥카스테라, 밤롤케이크 등 30여가지를 내는데 이 중 10가지는 뷔페식으로 먹게 한다.

처외삼촌의 박물관 건립자금은 40년전에 차린 대형 정육점에서 비롯된다. 그는 칠곡군 약목면에 70여두의 소를 키울 수 있는 농장도 마련했다. 그래서 30세에 1억원 매출을 올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월은 그를 한 번 더 시험에 들게 한다. 1984년 소파동이 일어난다. 농장에 위기가 닥친다. 사업다각화를 위해 곰탕집도 병행했다. 다시 기반이 탄탄해졌다. 1992년 남구 봉덕네거리 근처에 큰 빌딩도 구입했지만 IMF 외환위기 때 또 먹구름이 그의 삶을 가려버린다. 빌딩도 처분해야만 했다. 좌절과 희망의 연속. 의욕도 자꾸 꺾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공황장애까지 앓게 된다. 무거운 맘을 비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월의 모든 투정을 다 받아주며 고고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수석)이 그의 쉼터였다. 유명 강변을 돌며 탐석여행을 했다.

어쩜 돌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돌을 만지면서 자연과 삶의 이치를 알게 된다. 삶의 성공보다 실패가 급소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맘이 평화로워지기 시작했다. 점차 그의 경제적 욕망이 문화적 욕망으로 진화하게 된다.

1988년부터 처외삼촌은 골동품 수집가로 변신한다. 수집품을 여러 곳에 분산 소장하면서 그렇게 30년을 흘러왔다. 박물관 개관은 형극의 길이다. 공화국 하나 개국하는 것만큼 힘들었다. 박물관은 개인이 지킬 수 없다. 지자체, 정부 등이 도와줘야 꾸려갈 수 있는 대상이었다. 처외삼촌은 나름 박물관으로 문화독립운동을 한 셈이다. 맘고생도 많이 했다. 나도 뒤늦게 그걸 알았기에 빵을 들고 달려왔다.

박물관과 빵. 그 사이에 돌사자가 척추처럼 앉아 있다. 지구촌박물관에는 우리의 잃어버린 문화가 있다. 그 박물관이 품은 쌀빵은 먹방·쿡방 때문에 갈수록 황량해지고 있는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다. 두 사람을 붙들고 있는 박물관쌀빵은 그분과 나를 이어주는 또 다른 ‘인생등대’가 될 것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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