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섬유도시 대구의 현주소 .1] 부흥과 쇠퇴의 역사

  • 손선우 서민지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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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04   |  발행일 2019-04-04 제17면   |  수정 2019-04-04
한국 수출 일등공신의 추락…6800억 투입해도 ‘약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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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구를 먹여살렸던 섬유산업의 추락이 심상찮다. 1990년대 초반부터 내리막길에 들어선 대구섬유는 밀라노프로젝트를 필두로 한 다양한 지원사업에도 불구하고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구 섬유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구섬유박물관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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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11시 대구 동구 봉무동 대구텍스타일콤플렉스(DTC) 내 섬유박물관. 3층 섬유기업실에 아이들이 우르르 떼지어 몰려왔다. 동아리 활동으로 이곳을 찾은 강동중학교 4개반 학생들이다. 80여명의 눈은 마이크를 든 문화해설사에게로 향했다. “조선방직과 경성방직 두 개 기업이 있어요. 조선방직은 일본인 자본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건 빼고….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최초의 방직 회사입니다. 뒤에 보시면 경방이란 회사로 경영이 이어지고 있어요.” 문화해설사는 경성방직 전시관을 마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시관에는 박목월 시인(1915~78)이 작사하고 작곡가 나운영 선생(1922∼93)이 지은 경성방직 사가(社歌)가 소개되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성기때 대구 30만∼40만명
섬유관련 산업으로 먹고살아
밀라노프로젝트 마무리된 해
대구 수출중 직물 22%로 감소
국비 확보해도 연구개발 소홀
50년대 英서 개발 폴리에스터
아직 주력 수출품목으로 의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을 둘러본 학생들은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취재진이 강동중 3학년 이유민군(16)에게 “경성방직의 창업자가 친일인사인 걸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군은 “몰랐다”고 대답했다. “친일인사인 걸 알고 나니까 어떻냐”는 질문에 그는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성수는 대표적인 반민족친일행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중일전쟁을 미화하고, 학병·징병 독려에 이어 국방헌금을 냈다. 그 대가로 경제적·비경제적 혜택과 특권을 누렸다. 김성수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의 활동 영역이 공적인 탓에 반일의 자리에 설 수 없었고, 국내 지사들처럼 일제의 요구를 완전히 외면하기도 힘든 처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성방직의 이면은 감춰져 있다. 전시관에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일등공신’으로 경성방직을 소개해놨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가혹행위가 불거진 바 있다. 현재는 활동을 종료하고 해산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조사 결과, 경성방직은 조선운송(현 CJ대한통운), 경성전기(현 한국전력), 조선중공업(현 한진중공업) 등과 함께 ‘강제동원 국내 현존 기업’으로 확인됐다. 경방이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민족자본으로 세운 최초의 근대기업으로 선전한 것과는 동떨어진 결과다.

국내 섬유산업의 시작은 이러한 경성방직과 일본 자본으로 설립된 조선방직이다. 근대적인 공장제 생산의 출발점이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국내 섬유공장들은 일본의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공장으로 전락했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내 섬유산업은 빠르게 기반을 갖췄다. 적은 자본과 낮은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원자재 공급이 원활하고 저렴한 노동력 덕분에 가능했다. 거기다 미국의 원조와 정부의 섬유산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다.

대구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이자 ‘3대 도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주력 업종인 섬유산업은 1970~80년대에 최대 호황을 누렸다. 한국을 수출 주도형 경제로 견인차 구실을 한 일등공신이 섬유산업이었다. 1990년까지만 해도 섬유산업은 한 해에 148억달러를 수출했다. 한국 수출(650억달러)의 23%에 달한 것이다. ‘섬유산업의 메카’로 통하던 대구의 섬유산업은 1987년에 절정에 달했다. 지역 제조업체에서 차지하는 섬유의 비중이 절반에 가깝고, 섬유산업으로 먹고 사는 인구가 30만∼40만명에 달했다. 초·중·고 교과서에 대구를 섬유도시로 소개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 초반부터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값싼 중국산에 밀려 수출량이 줄고 내수시장마저 중국에 추월당하며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죽어가는 대구 섬유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6천800억원을 들인 ‘밀라노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이 사업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대표적 예산낭비사업’으로 지적받았고, 감사원에서는 ‘돈만 쓰고 실효성은 없는 실패한 프로젝트’로 꼽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산업연구원은 대구지역 내 봉제업체가 극히 적어 해외 기업 유치는커녕 국내 비(非)대구지역 기업 유치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큰돈을 들인 정부 차원 프로젝트는 죽어가는 지역 섬유산업을 살려내는 데 실패했다.

이는 경제 지표로 나타난다. 대구는 1992년 이후 2018년까지 27년째 16개 시·도(세종시 제외) 가운데 1인당 지역내총생산이 꼴찌다. 특정 산업에 큰돈이 들어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지역내총생산은 특정 지역에서 해당 기간에 생산한 부가가치를 합산한 지표다. 이를 인구수로 나눈 게 1인당 지역내총생산이다.

밀라노 프로젝트의 지원금은 이탈리아같이 고급 직물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다는 핵심과 달리 가시적 성과가 보이는 곳에만 몰렸다. 섬유기업의 홈페이지를 구축하고는 ‘정보화 사업 기반을 구축했다’는 식으로 보고되거나, 패션 정보지 발행을 ‘섬유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지원하는 서비스 사업 추진’으로 포장됐다.

지역 섬유업계에 전략산업 선정이 맡겨진 탓에 헛돈을 쓰는 일도 벌어졌다.

국비 245억원이 들어간 섬유개발연구원과 270억원이 들어간 염색기술연구소는 국비를 ‘목적보조사업’이라는 애매한 항목에 써버렸다. 비자금 조성이나 정부 보조금 횡령·유용 등 비리로 이어졌다. ‘밀라노 프로젝트 백서’를 펴낸 대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사업 자체의 타당성과 무관하게 제왕적 지방자치단체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린 사람들이 전략산업 선정을 주도했다”며 비판한 바 있다.

지원금의 상당 비율이 부동산에 몰리기도 했다. 전시장 가동률이 50%대에 불과한 전시컨벤션센터를 설립하고, 그 앞에 패션디자인개발지원센터를 지었다.

반면 섬유산업의 혁신을 이뤄낼 연구개발(R&D)은 저조했다. 대구·부산·광주·경남 등 4대 지역진흥사업 중 대구의 R&D 지원비(305억원)는 꼴찌인 반면, 인프라 구축비(1천523억원)는 1위로 나타났다. 그나마 305억원 중 205억원은 연구소 운영비로 쓰여 실제 연구개발에 투입된 금액은 전체 국비지원금 2천320억원 중 100억원(4.3%) 미만으로 추정된다.

결과는 참혹하다. 밀라노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00년 대구의 직물 수출은 14억달러로 대구 전체 수출(28억달러)의 49.3%에 달했다. 하지만 대구 직물 수출 비중은 매년 급격히 하락했다. 2004년에는 35.3%(11억달러)까지 떨어지더니, 밀라노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2008년에는 22.7%(10억달러)로 추락했다. 지난해에는 직물 수출 비중이 10.3%(8억달러)였다. 수출 비중이 20년도 안돼 79%나 감소했다. 수출액은 2배 가까이 줄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력 수출품목은 1950년대 영국에서 개발된 폴리에스터다. 2018년 대구지역 수출액은 사상 처음으로 80억달러를 달성했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패션산업 역시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은 브릭스(BRICs) 등 신흥국을 제외한 경제 규모 상위 15위권 국가 중 유일하게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가 없다. 경제를 성장시킨 산업이 섬유인 데다 유행에 민감해 소비자의 패션 수요가 많은 것을 감안하면 특이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 스페인의 자라와 스웨덴의 H&M, 일본의 유니클로 등 제조·직매형 의류(SPA) 산업이 국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대구의 기성 패션 디자이너들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신진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글·사진=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서민지 수습기자 mjs85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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