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華)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9-04-19   |  발행일 2019-04-19 제39면   |  수정 2019-04-19
진달래·복사꽃 분홍물 든 도성 내려다 보며 봄을 읊는 선비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華)
임득명 ‘등고상화’, 종이에 담채, 24.2x18.9㎝, 1786년,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華)

연분홍 진달래꽃이 다소곳하다. 산언저리 비탈진 곳마다 신방을 차렸다. 설레는 마음처럼 꽃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향기마저 분홍빛이다.

진달래를 보러 집 근처에 있는 천을산을 오른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피는 진달래를 보며, 겨울의 묵은 때를 씻는다. 연분홍의 잇몸으로 밝게 웃는 진달래가 마치 송월헌(松月軒) 임득명(林得明, 1767~?)의 작품 ‘등고상화(登高賞華)’를 마주하는 것만 같다. 날이 좋아서 산을 오른 문인들이 진달래를 감상하며 시회를 여는 장면이다. 봄바람만큼이나 상큼하다. 봄을 아낌없이 내어주기에 이 계절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조선시대 후기는 안정적인 직업에 경제력을 갖춘 이들이 양반사대부를 능가하는 문화를 누리며 신분상승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 중심에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이 있었다. 역관과 의원 같은 기술직 중인층과 하급관리인 아전 서리배를 포함하는 중서층이 그들이다. 이들은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서울과 수도권의 경화사족들을 중심으로 성행하던 시·서·화를 수용, 확산시키면서 자신들만의 예술세계를 형성한다. 18세기에는 서화고동(書畵古董)의 수집과 감상, 품평의 풍조가 폭풍 성장하여 19세기를 이끄는 문화 주역이 된다.

여항문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임득명은 시와 그림에 두각을 나타낸 화가다. 규장각 서리로 있으면서 신문물을 빨리 흡수하여 예술세계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는 여항문인들의 단체인 ‘옥계시사(玉溪詩社)’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당대의 문인, 화가들과 폭넓은 교우관계를 맺어 시와 그림의 폭이 깊고 넓었다. ‘옥계시사’는 서울의 중인계층들이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옥류동(玉流洞)의 송석원(松石園)에서 결성한 문학단체다. 임득명은 1786년에 제작된 옥계시사의 아회첩인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과 1791년 제작된 ‘옥계십경첩(玉溪十景帖)’에 그들의 모임장면을 그려 넣었다.

임득명은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을 배웠다고 전한다. 규장각에서 만난 김홍도(金弘道, 1745~?)와의 인연으로 그의 필선법을 차용하기도 했다. 김홍도의 작품 ‘남해관음’에 제(題)를 써주기도 할 만큼 교우관계가 돈독했다. 진경산수화와 남종문인화를 절충하여 개성 있는 작품세계를 다졌다. 저서로는 여항문인들과 문학적 교유를 상세하게 기록한 ‘송월만록(松月漫錄)’이 있다. 1793년 최대 규모의 여항문인들의 시사모임을 기록한 시축을 보고 사대부 문인 신택권(申宅權, 1722~1801)은 송월헌의 시를 “진정으로 초사의 뒤를 이었다(依佈焉楚騷遺聲)”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송월만록’에 수록된 시, “한묵(翰 )을 일삼는 사람들 사이에 시경(詩境)이 넓고 조용하니, 꽃잎을 붓으로 그려 향기로운 그늘에 이었구나(詩境寬閑翰 林, 筆畵書葉接芳陰)… 시를 짓느라 붓을 멈추기를 여러 차례고, 그림으로 옮겨 주목해 힘쓴다(爲賦停筆屢移畵往目努)”에서 임득명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여항인의 시에는 시정(市井)의 세속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선비들의 품성을 따라잡으려는 의식이 은연 중에 배어 있다.

‘등고상화’는 봄 풍경을 콕 찍어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화첩인 ‘옥계십이승첩’에 들어 있는 작품으로, 필운대(弼雲臺)에서의 시화 모임을 그려놓은 것이다. 봄바람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 선비들이 인왕산을 오른다. 걷다보니 어느 새 산등성이를 지나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필운대에 올랐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멀리 두고 진달래 가득 핀 자연에 마음을 맡긴다. 이때다 싶어 가슴 울리는 시 한수 읊으니 여기가 바로 낙원이다.

‘등고상화’는 사실적이지 않아서 더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이다. 수채화처럼 분홍 물이 주루룩 흘러 시상(詩想)에 젖게 한다. 도성이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계곡을 따라 진달래와 복사꽃이 인간세상과 천상세계를 이어준다. 7명의 시인들은 경치를 감상하며 둘러앉았다. 그 중 한 시인이 봄을 읊고 있다. 꽃과 바람, 나무와 하늘, 새와 물은 시 장단에 맞추어 합창을 한다. 그림 왼쪽 위에는 ‘등고상화(登高賞華, 높은 곳에 올라 꽃구경을 한다) 송월헌(松月軒)’이라 적었고, 낙관을 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만 또 자제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이다. 조선 중기를 이끈 여항문인들은 양반들이 부럽기는 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신분의 틀에 낙담하기보다 주어진 환경 속에 자신들만의 예술세계를 꽃 피웠다. 넘치는 것보다 결핍감이 더 도전의식을 부채질하며 전진하게 한다. 임득명은 여항인으로서 그만의 예술세계를 살찌우며 시류를 극복한 진달래 같은 화가였다.

산이 연둣빛과 분홍빛으로 몽실몽실 춤을 춘다. 물오른 새잎들이 반짝이고, 햇살이 영양제처럼 뿌려진다. 굳이 봄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봄은 이미 내 옆에 와 있다.

화가 2572kim@naver.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