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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의 철학편지] “보수이거나 덜 보수인 차이일 뿐, 싸울 것이 아니라 대화의 정치로 해결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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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미디어부기자
  • 201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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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 보수주의에 빠질까. 난 그것의 심리적 이유가 늘 궁금했단다. 보수의 사전적 정의는 ‘새로운 것을 적극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고 하는 것’. 대체로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그러나 무언가를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이유는 무얼까. 직관적으로 대답하자면, 아마 얼마 안 되는 것마저 잃지 않으려는, 잃어서는 안 된다는 심리적 방어 기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그래서 그 모든 보수의 스펙트럼을 나열할 수는 없을 터이지만 오늘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보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해. 그러기 위해 아담 스미스(1723~1790)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사실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도덕 철학자였어. 그의 관심은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적대적이며, 비인격적인 사회관계들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고 도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였지. 결론만 얘기한다면, 그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규칙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인간의 이기심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봉사로 전환될 것이라는 낙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경제학자 던컨 폴리는 이를 ‘아담의 오류’라고 명명해.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다면 우리는 모두 풍요롭고 행복하고 이타적으로 살 수 있다는 아담 스미스의 말은 오류라는 것이지. 기술의 진보-자본과 상품의 축적-경제 발전-소득 분배-공공의 행복 순으로 이행된다는 주장은 과학적 주장에 도덕적 주장을 부당하게 결합시킨 것일 뿐이라는 것이야. 사실 우리는 현실에서 그 사실을 명석하게 알고 있지.

그러나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이 아담의 오류를 자본주의의 근본제도들, 사적 소유, 그리고 시장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거나 용인하는 합리화 장치로 사용해. 막스 베버(1864~1920)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변천은 아담 스미스의 논의에 대한 이론적 해명이 아닌가 싶어.

세속에서의 의무 수행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이므로 세속적인 직업에 충실히 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부름에 기초한 우리의 사명’이라는 사고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고유한 윤리 개념이었고 이것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동력이라는 것이지. 문제는 프로테스탄트의 이러한 금욕적 종교관이 세속화하면서 부의 축적만이 진리이자 자신의 존재 증명이 되어버린다는 것에 있지. 아담의 오류가 표현하는 것과 정반대의 길, 즉 도덕적 윤리적 주장이 과학적 사실의 주장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지. 물론 결과는 똑같이 많이 소유하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겠지만.

앨버트 허시만이라는 경제학자가 쓴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책이 있어. 제목만 들으면 꽤 진보나 좌파 쪽인 듯한 사람이 쓴 책으로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장하준 교수의 책에서 ‘발전주의자’ 항목에서 그의 이름을 본 기억이 나더구나. 어쨌든 허시만은 보수주의자의 몇 가지 레토릭(수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뭘 해도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역효과의 명제. 개혁을 해 봐야 서민들만 더 힘들어질 것이고, 증세를 해 봐야 기업들만 죽을 것이고, 4대강 보를 열어봐야 농민들이 더 힘들어질 것이고,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빈곤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게 할 것이다 등등. 모든 것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현실적으로 열성적 보수주의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다.

둘째는 ‘그래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용 명제. 한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는 사회를 움직이게 하기는 하지만 그 방향은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갈 수 있다는 것. 촛불을 들어봤자 독재정권이 들어섰다는 것이 가장 최근의 뜨거운 예일 거야. 이 명제는 보다 세련되어 있어서 일반 대중 마음 깊숙한 곳의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한다.

셋째는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위험 명제. 지나친 민주주의는 자유를 위협할 것이고 지나친 복지 국가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라는 레토릭. 민주주의 체제가 정립되기 시작한 이후 주장된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도 가끔씩 고개를 내밀고 있다.

태형아, 내가 오늘 이렇게 보수주의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보수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진보주의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진보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고, 지금 좌파라고 부당하게 지칭되는 집단 또한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의미의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더 보수이거나 덜 보수인 차이일 뿐이지. 서로 욕하며 싸울 것이 아니라 도저히 상종 못할 무리만 빼고 서로 잘 대화하면서 정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슬며시 해 본다.

그래야 보수와 다른, 또 다른 자리가 생길 것이 아니겠니.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빠지고, 소수자들이 빠지고, 빈곤 계층이 빠진 그들만의 정치 말고 너무 망가져 스스로 자신을 보수(保守)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정치도 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메이 데이’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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