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최고 음악감상실 ‘DJ’ 풍상의 세월 딛고 백발로 돌아와 다시 돌리는 ‘LP’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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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24   |  발행일 2019-05-24 제41면   |  수정 2019-05-24
[이춘호기자의 LP로드] ‘지지톱 (ZZTop)’ DJ 김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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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구 최고의 음악감상실로 불렸던 동성로 행복의섬 DJ 김지호. 대구DJ협회장까지 지냈던 그는 백전백패의 사업 시련을 딛고 최근 LP카페 지지톱으로 권토중래를 했다. 밤과 낮의 경계에서 그만의 노래를 틀고 그걸 듣고 삶의 행복을 찾는 단골 때문에 그는 자기 인생을 한번 더 챙길 수 있다.


그 LP카페를 만나기 전 선글라스와 긴 수염으로 유명한 텍사스 출신의 서던 록 트리오 ‘지지톱(ZZTop)’ 스토리부터 깔아보고 싶었다. 지지톱은 1969년 데뷔해 아직까지 건재한 할아버지 밴드다. ‘서던 록’이란 장르가 좀 낯설다. 자료를 뒤적여봤다. 아세아경제를 통해 ‘장석원의 시와 음악의 황홀 속으로’란 연재물을 론칭한 장 시인이 서던 록(Southern rock)을 잘 설명해준다. “서던록은 미국 남부 출신이라는 요소를 공유한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카우보이, 청바지, 수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들이 남성적이다 못해 심지어 마초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느껴도 또한 틀리지 않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백인 남자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흔하고, 트리플 기타에 오르간이나 바이올린 심지어 하모니카까지 편제되기도 한다.”

대구 수성구 두산동 화성파크드림 아파트 초입, 예전 상동소막창(지금은 수성못 먹거리타운으로 이전)이 있던 곳은 얼마 전 말끔하게 신축됐다. 거기 1층에 LP카페 지지톱이 입점해 있다. 지지톱 밴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가게 이름까지 그 밴드 이름으로 내건 DJ 김지호. 그가 매일 밤 ‘홀인원’ 같은 곡을 턴테이블 위에 올린다. 내민 곡이 별 반응을 얻지 못하면 DJ는 힘이 빠진다. 적중이 잘 되면 DJ는 업된다. 듣기 힘들고 그날 분위기에 맞는 원음. 그런 질감의 빈티지 사운드를 우주선에 싣고 그는 단골의 심금 속으로 유영한다. 곡에 대한 그의 승부안이 좋다.

선곡에 여러 변수가 있다. 홀의 분위기, 시국상황, 단골의 숫자, 그날만의 일기 등을 모두 고려해 딱맞는 곡을 찾아낸다. 그 곡이 진정제처럼 단골의 굳어진 심신을 아주 깊숙하게 힐링해줄 때 그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 자기의 곡에 사람들이 반응한다는 것, 일반 뮤지션의 공연에 팬이 광분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전장에 나가려면 무기가 중요하다. 그는 음원이 스피커를 통해 최적의 상태로 흘러나올 수 있게 시스템을 조절한다. 한 시절을 풍미한 빈티지 오디오의 종합기능을 다각도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정교하게 움직여 사운드의 초점을 맞춘다. 곡을 듣는 순간 중·고·저음 중 어떤 음역대에 맞춰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게 만든 LP의 음원을 비효율적으로 방치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는 ‘스트리밍뮤직(카페 등에서 파일업된 음악을 순서대로 틀어주는 분위기 조성용 뮤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걸 ‘음악’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장식용 뮤직. 그것에 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LP마니아들. 다들 여기로 와서 김 DJ가 진검 같이 들려주는 절묘한 음악을 약처럼 복용한다.

텍사스 서던 록 트리오‘지지톱’열성팬
가게 이름으로 내걸고 턴테이블 플레이
홀 분위기·시국상황·단골 고려한 선곡
LP의 고장 대구 만천하 알리고픈 바람
중후한 사운드 가득찬 ‘알텍 7 스피커’

동성로‘행복의 섬’잘나가던 DJ 호시절
대구 DJ협회장때 인기차트 만들어 소개
연이은 사업실패 후 찾은 LP카페 꿈
보드카 앱솔루트·수제 안주 메뉴 인기
음악으로 행복 느끼는 단골 보며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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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톱은 극장에 들어온 듯 암과 명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백발의 DJ…비로소 내 자리로 돌아온 듯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그리고 연두색 티셔츠 차림. 목소리는 만고풍상을 다 겪어 야물대로 야물어져 있다. 목소리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탄력감 있고 쇳소리 가득한 그의 음성과 웃음은 쿠바와 멕시코 음악의 사이를 거닐고 있다.

그는 “LP에 한번 빠지만 LP세상을 도망치는 도피로는 없다고 느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미 사라졌을 산업폐기물 같은 이 치직거리는 음반이 요즘은 되레 위안으로 다가선다. 음원으로만 존재하는 폰뮤직의 폐해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그가 “대구가 바로 LP의 고장임을 만천하에 고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한다.

취재를 위해 실내로 들어갔다. 밖과 확연히 구별되는 어두컴컴함. 두 곳에 집중했다. 정면 벽 전면을 다 채운 주문제작된 LP 보관대 3시 방향에 설치해놓은 빨강 아크릴판에 흰색 고딕 영문자로 된 지지톱 간판. 그리고 지름 1m가 넘는 원형 사인몰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방금 영화관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1만장 이상의 LP가 그만의 분류기준에 의해 가지런하게 꽂혀 있는 정면 벽쪽은 유난히 조도를 밝게 돋워놓았다. 오른쪽 벽면은 음악감상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동영상 대신 명화 같은 정지된 이미지를 수시로 벽에 비춰주고 있다.

음향시스템을 살펴봤다.

정면 좌우측 천장 부근에 ‘알텍 7 스피커’가 상당히 정교하고 중후한 사운드를 홀 전체에 스프링클러 물처럼 뿌려준다. 메인앰프는 ‘웨스턴 일렉트릭’, 서브 앰프는 매캔토시 7200, JBL 4312, 4314, 지금도 클럽 등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구성과 음질을 자랑하는 벨기에 믹서 ‘로덱(Rodec)’, 턴테이블은 ‘테크닉스’, 이퀄라이저는 ‘클라크 테크닉 DN 360’이 포진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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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톱에서 가장 사랑 받는 술 앱솔루트.


◆다운타운 DJ 세월 두루 섭렵

고등학교 2학년 때 서구 비산동 오스카극장 앞에 있었던 제일다방 뮤직박스 안에서 판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때 그 라인에선 대영학원 근처 덕형다방도 알아줬다. 동성로 런던제과 근처로 진출했다. 윤하림 음악실장이 포진해 있는 미진음악실에 들어갔다. 근처에 크로바음악감상실도 있었다. DJ는 3명 정도 있었는데 월급은 1만원이었다.

다음으로 겨냥한 곳은 당시 한강 이남 최고의 음악감상실로 불렸던 코리아. 코리아백화점의 4층은 감상실, 지하 1층은 다방이 있었다. 감상실은 조상수, 다방은 김용철이 음악실장이었다. 5층은 파도클럽이 있었다. 당시 코리아에는 홍성근, 한강민, 김용철 등이 DJ로 활동을 했다. 그는 평소에는 다방에 있다가 야간타임에는 4층으로 올라갔다. 코리아에서 한때 대구에서 가장 시설이 앞섰던 음악감상실 ‘행복의섬’으로 간다. 거기에 최헌 선배가 야간 음악실장으로 있었다. 행복의섬이 태동할 때 뮤직레스토랑의 선두주자인 무아도 경쟁구도를 유지한다. 행복의섬에는 국내에선 가장 큰 높이 1m, 폭 2m가 넘는 매머드 전문가용 믹서기가 있었다. 일반 감상실에선 엄두도 못낼 장비였는데 행복의섬은 최고의 음질을 위해 그걸 도입한다.

그에겐 행복의섬 시절이 가장 존재감이 있었다. 당시에는 가요는 설 자리가 없었다. 가요는 2곡 이상 틀 수가 없었다. 그것도 최소한 신중현, 김민기, 한대수 정도는 되어야 판을 내밀 수가 있었다. 그는 84년 동아쇼핑 무궁화홀에서 열린 들국화 공연도 지켜볼 수 있었다.

85년 행복의섬에 대구에선 처음으로 레이저디스크가 장착된다. 사장이 일본 여행 중 레이저디스크를 발견, 올리비아 뉴튼존의 피지컬을 사갖고 온다. 영상과 음악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었다. 거기엔 개인 의자별 인터폰으로 즉석에서 곡을 신청할 수 있었다. 워낙 많은 채널을 가진 믹서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화데이트도 가능했다.

24시간 시절이었다. 아침 두 시간 빼고 논스톱이었다. 오픈은 오전 10시, 오후 2시까지는 보조DJ가 진행한다. 밤 9~10시가 골든타임이다. 그는 야간 첫타임을 맡았다. 그는 가요는 절대 틀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에는 포크라이브가 진행됐다. 최백호, 조동진, 그리고 김지훈, 한울타리 등의 타임을 선보인다. 그는 82년 말부터 90년까지 거기에 있었다. 행복의섬 영향으로 근처에 포그니, 아미, 아람하우스, 올림푸스 등 감상실을 겸한 뮤직레스토랑이 호황을 누린다.

하지만 91년 동성로에 500원짜리 동전노래방 1호가 들어선다. 그게 훗날 DJ를 실업자로 만드는 구실을 하게 될 줄 처음엔 몰랐다. 이미 81년 대구에 믹싱 DJ를 앞세운 디스코텍 1호가 오픈된다. 대구는 그만큼 부산 못지않게 유흥문화가 빨랐고 강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동성로에 탈 DJ바람이 이뤄지고 있었다. 음악다방의 뮤직박스도 허물어졌다.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FM DJ시대가 개막된다. 워커맨이 등장해 혼자서 원하는 노래를 걸어가면서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그는 행복의섬을 나와 ‘쉘부르음악실’로 건너간다. 그도 70년대 발족한 대구DJ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초대회장 김종철을 비롯, 대구 DJ 1세대 김진규, 부산 DJ계 좌장격인 도병찬 등이 회장을 맡았다. 현재 그는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대구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100여명의 DJ가 소속된 대구DJ협회를 통해 나름대로 인기차트도 만들어 서울과 지방 방송국 음악 담당 PD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쉘부르는 6개월 만에 망하고 만다. 진절머리가 났다. 더 이상 DJ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일단 쉘부르 건물 지하에서 수입오디오, 빔프로젝터 등을 파는 ‘이미지전자’란 가게를 차렸다. 그리고 거기에 ‘이미지레스토랑’도 1년간 병행한다. 다시 대백프라자 뒤편에서 ‘드라이 210’이란 뮤직레스토랑을 오픈한다. 모두 여의치 않았다. 3년 뒤 문을 연 PC방도 문을 닫는다. 포항으로 가서 육거리 근처 금강호텔 지하에서 나이트클럽을 오픈하지만 1년 만에 주저앉는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게 된다. 사업과 DJ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한다. ‘사업실패’란 징크스를 없애기 위해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다.


◆다시 DJ로 돌아오다

태국으로 갔다. 2000년까지 음악을 잊었다. 거기 한인상가에서 ‘하마’란 노래방을 열었는데 9·11 뉴욕테러 여파로 또 문을 닫아야만 했다. 2002년 대구로 왔다가 2005년 태국으로 다시 건너간다. 툭하면 대구와 태국을 오갔다. 빌어먹을 세월은 더 이상 DJ를 원하지 않는 형국이었다. 2015년 종로호텔 근처에서 ‘쇼디치’라는 뮤직바를 열었다. 그때 거기서는 김현석 DJ가 판을 잡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3개월을 못 넘겼다. 손대면 사업은 어김없이 망했다. 웃음만 나왔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예전 행복의섬 시절 함께 일했던 후배 DJ 최영락씨가 LP카페의 꿈을 그에게 전했다. 최씨는 도산한 중앙유선방송의 LP를 전량 확보해 보관하고 있었다. 엄청난 자산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섬광이 그의 뇌리를 지나갔다. 순간 지지톱이란 상호가 떠올랐다. 팝송 8천장, 클래식 3천장, 가요 2천장을 미친듯이 분류를 해서 7단 보관대에 차곡차곡 꽂아넣었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LP였다. 모든 걸 수제로 이어간다. 안주도 수제다. 문어튀김이 인기가 있다. 인제에서 갖고 온 황태포, 울릉도 오징어 등도 직접 갈무리한다.

그의 스타일답게 여기선 스웨덴의 대표 보드카 앱솔루트가 인기다. 신청곡을 찾기 위해 LP의 바다를 항해하는 그의 옆 모습도 이 집 음악의 절묘한 장식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업가 김지호보다 DJ 김지호가 몇 배 빛나 보인다. 오후 6시 오픈, 다음 날 오전 2시 마감. 수성로 용학로 28길 6-11. (053)783-7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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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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