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결이 다른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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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27 08:02  |  수정 2019-05-27 08:02  |  발행일 2019-05-27 제15면
[행복한 교육] 결이 다른 책읽기

“학교 오는 것, 좋아하니?” “아뇨! 그래도 별 문제 없이 학교에 잘 다니고 있어요.” “책 읽는 건 좋아하는구나?” “별로예요, 읽으라니깐 읽어요. 나중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려구요.”

도서실 1인용 독서대 구석자리에는 책벌레 몇 명이 점령한다. 그 자리에 앉으면 쉽게 동굴에 들어가 자기만의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점심시간 급식순서가 끝인 1학년 남학생은 도서실에서 몇 자리 되지 않는 원형 책상에 바글거린다. 낄낄대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1분 이내에 몰입한다. 들여다보면 인터넷소설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여 출간된 판타지 소설, 만화가 단연 강세다. 환생하고, 빙의하고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멋진 남자)과의 황홀한 연애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뒤틀린 이야기 속엔 그저 그런 일상을 견디게 해 주는 폭발적인 긴장과 재미가 있다. 무협지, 추리탐정소설을 읽으며 성장한 중년남자의 청소년 시절의 책읽기처럼.

“무협지를 펼치는 순간, 눈앞의 고난은 사라지고 무림의 고수가 되어 악당을 응징했죠.” ‘뉴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하고 여행, 영어 관련 책을 6권이나 쓴 김민식 PD는 고등학교 때 반에서 제일 못생긴 아이로 뽑히고, 집요하게 놀리던 친구들을 피해서 도서관으로 숨어들었다. 집에서도 성적 때문에 구박 받던 그 시절, 떳떳이 피신할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었다. 죽도록 괴로웠던 현실에서 가슴이 뻥 뚫렸던 건, 바로 무협지의 주인공이 되던 순간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무협지를 즐겨 읽었는데 어느 날 ‘소설 속 주인공의 내공이 몇 배 상승해도 소설을 읽는 내가 그만큼 강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현실의 나를 단련할 방법은 없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인생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책에서 배웠다는 식의 독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보지 못한 세계,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 상상조차 못했던 사건과 뿌리 깊은 운명의 얽힘, 전혀 다른 시선으로 나의 알량한 지식을 여지없이 깨놓는 작가의 관점, 나른한 햇살 좋은 오후, 나뭇가지가 그려내는 짙은 그늘, 이국적인 꽃병과 정원의 분위기, 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욕망과 악, 개인이 벗어나고자 할수록 억압하는 사회 부조리, 그리고 운명적 사랑과 한 인간의 의지적이고 주체적인 삶, 투명하게 인과가 맞닿지 않는 혼란과 건조함, 특정분야에 몰입해 얻어낸 일가견, 위대한 궤적, 고양된 정서를 느낌 있게 그려낸 고독한 언어…. 그게 책에 담겼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으며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그냥 여기 던져진 나와 자신이 선택한 시공간을 살아가는 인물을 만나 하나가 된다. 그러면서 아픈 현실을 살아낼 가치를 발견하고 힘을 얻는다.

만화를 폄훼하던 시절에도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사 주었던 ‘먼 나라 이웃나라’ ‘그리스 로마 신화’ 류의 학습만화, 요즘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물은 작가의 개성적 표현과 만화적 연출을 통해 ‘만화 특유의 흡입력’을 자랑한다. 삼국지 60권 만화가 ‘삼국지연의’를 읽게 하고, 해리 포터 영화가 영문판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게 한다. 영상과 이미지로 쉽게 정보를 받아들이는 요즘 세대, 포노 사피엔스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더욱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이야기를 창작한다. 그리고 그 창작의 가지는 엄청나게 뻗는다. 종이든 e-book이든 디지털교과서이든 웹 소설이든 웹진이든 웹툰이든, 상관이 없다. 특히 요즘의 그림책은 글을 보완하는 차원이 아니라 글 언어, 그림 언어, 디자인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다각적인 해석을 담는다.

그래서인지 요즘 학생들은 깊이가 어떠하든 정말 많이 보고, 읽고, 그림 그리고 만든다. 창작자와 독자가 따로 없다. 또 청소년들이 빠져 읽는 서브컬처 로맨스 추리물을 읽는다고 나무라면 그들을 경멸한 게 된다. 너무 살아있는 친구와 너무 죽어있는 자신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김희숙 (대구 새론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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