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상주 .4]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 장군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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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08   |  발행일 2019-07-08 제14면   |  수정 2019-07-08
60전60승 불패신화…화공법으로 왜군에 빼앗긴 상주성 되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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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장군의 묘소. 충의사에서 8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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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유물전시관에서는 보물 제669호로 지정된 교서, 교지, 옥대를 비롯해 동산문화재로 등록된 교지 19점, 매헌실기(梅軒實記) 판목 58판 등을 볼 수 있다.

호국의 성지 상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정기룡 장군이다. 정기룡은 조선시대 무인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전과를 올린 명장이다. 특히 상주 화북면 용화동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해 백성을 구했고, 적에게 함락된 상주성을 화공법(火攻法)으로 탈환해 존경을 받았다. 60전 60승 불패의 신화를 쓴 장군은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있다’고 회자될 만큼 명성이 높았다.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고 상주시 사벌면의 충의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군의 묘소도 충의사 지척에 자리해 있다. ‘호국의 성지 상주’ 4편은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 장군과 상주성 탈환 이야기를 다룬다.

#1. 상주에 자리잡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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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에 있는 정기룡 장군 영정.

1562년(명종17) 4월24일, 경남 하동의 평범한 양반집에 아들이 태어났다. 갓난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체구와 목청이 남다른 것이 그 기세가 사뭇 주변을 압도할 정도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장차 천하를 호령할 기상이로세” 하고 감탄했다. 아버지 정정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무성할 무(茂)와 나무 수(樹), 무수(茂樹)를 아들의 이름으로 정했다.

정무수는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질을 드러냈다. 스무살 무렵 상주로 이사한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에 들어갔고 곧 월등한 실력을 갖춘 무인으로 성장했다. 1580년(선조13)에 고성 무과 향시(鄕試)에 합격한 데 이어 1586년(선조19)에 임금 앞에서 무과를 치렀다. 이때 선조는 4등으로 급제한 정무수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에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이름을 내렸다. 일어날 기(起)에 용 룡(龍), 바로 기룡이었다.

북방으로 부임한 정기룡은 3년간의 임기를 마친 뒤 1590년(선조23) 경상우도로 옮겼다. 그곳에서 종8품의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직을 명받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경상도를 방어할 중앙군 사령관으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의 전군을 총괄할 최고사령관으로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을 임명한다.”

아울러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 죽령 방면을,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추풍령 방면을,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璣)를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각각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을 지키게 했다. 이때 정기룡이 조경을 찾아가 함께 가기를 청하며 고했다.


무과 급제하자 선조임금이 새이름 내려
거창서 왜군 500여명과 싸워 첫 승전보
화려한 승마기술로 적군 들판 유인 작전
용화동전투 혁혁한 승리 이끌어 큰 명성
상주성 탈환 공 세워 정3품 상주목사 승진
1597년 정유재란땐 고령에서 적장 생포


“왜적은 이 전쟁을 준비해온 시간이 길뿐더러 병력과 무기도 뛰어납니다. 반면 우리 관군은 그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하니 기병을 맨 앞에 배치해야 합니다. 기병이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틈을 타 보병이 기세를 올려 공격하면 반드시 이기게 될 것입니다.”

조경은 인정했다. 그리고 정기룡을 돌격장으로 삼았다. 정기룡은 바로 그 기병을 이끌고 적병이 들어왔다는 우도로 향했고 4월23일, 거창에서 왜군 선봉군 500여명과 맞닥뜨렸다. 닷새간 치러진 이 전투에서 정기룡은 첫 승리를 거머쥐었다. 조선 육군의 첫 승전보였다.

하지만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까지 들려왔다. 자신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상주가 왜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상주는 경상도 북부 28개 고을의 도읍으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에 상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순변사 이일이 지휘하는 중앙군과 권길, 김준신, 김종무 등이 포함된 의병 800여명이 물밀 듯이 몰려오는 1만7천여명의 왜군을 상대로 죽을힘을 다했다. 하지만 왜군의 화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빼앗기고야 말았다.

#2. 백성의 안위도 함께, 상주 용화동 전투

전투는 계속됐다. 같은 해 10월에 치러진 진주성대첩에서 정기룡은 유격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왜적은 정기룡의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떨었고 눈앞에서 마주하면 몸을 떨었다. 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그의 눈빛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경상우도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정기룡에게 관직의 단계를 뛰어 넘어 상주가판관(假判官)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1월, 상주 탈환을 명했다.

정기룡은 밤낮을 달려 상주에 이르렀다. 듣던 대로 성과 인근이 모두 적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왜군이 용화동(龍華洞, 지금의 상주 화북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용화동은 상주에서 서쪽 70리 거리에 자리한 속리산과 백악산 사이의 골짜기로 수많은 백성들이 왜적을 피해 숨어살고 있었다. 정기룡은 관군과 의병을 갑장산 영수암으로 소집한 후 명을 내렸다.

“무턱대고 공격했다가는 적이 도망가면서 우리 백성들을 해칠 것이다. 밖으로 유인해내야 한다.”

그리고 말을 타고 적 앞에 나섰다. 정기룡이 등장하자 왜군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정기룡은 곧 기이한 승마기술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 위에서 섰다가 눕고 숨었다가 나타나고, 그야말로 혼을 뺄 지경이었다. 왜군이 정기룡을 사로잡기 위해 쫓아왔다. 정기룡은 바로 달아났다. 그러다 왜군이 적당하게 쫓아왔다 싶으면 멈췄다. 몸이 달아 쫓아오는 왜군을 뒤에 두고 정기룡은 그렇게 달아나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왜군을 용화동 밖 들판까지 유인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 작전대로 매복하고 있던 병력들이 몰려나와 왜군을 섬멸했다. 한나절만 늦게 도착했더라도 상주에 사람의 씨가 말랐을 거라며 백성들이 정기룡을 진심으로 우러렀다.

#3. 상주성을 탈환하라

하지만 상주성 안에는 무려 3천500명이나 되는 왜군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정기룡은 성 밖 산속에 진을 치고 화공(火攻)을 계획한 후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밤마다 북을 울리는 등 곧이라도 출격할 것처럼 계속해서 분위기를 띄웠다. 긴장해서 방비에 힘쓰던 왜적은 곧 소리만 요란할 뿐이라는 생각에 느슨해지고야 말았다.

드디어 11월23일,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정기룡은 사람마다 관솔 횃불 10자루와 장나무 4~5개를 가져오게 하여 일렬로 늘어세웠다. 아울러 상주성 남쪽 향교 뒤쪽 봉우리에 마른 섶나무를 수북하게 쌓아두고, 서남북 삼문(三門)에 화공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해두었다. 동문을 제외한 것은 도망치는 적병을 그쪽으로 몰기 위해서였다. 모든 준비가 갖춰졌음을 확인한 정기룡이 신호를 내리자 모든 횃불에 불이 올랐다. 불꽃연기가 하늘까지 치솟고 불길이 사방을 잡아먹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동시에 관군이 지르는 고함소리가 산을 진동시켰다. 당황한 왜적이 넋을 놓고 허둥거리다가 예상대로 동문을 통해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때 기다리고 있던 복병이 남김없이 도륙했다. 대승이었다. 정기룡은 더 나아갔다. 12월에 의병과 연합해 당교(唐橋)에서 왜적을 섬멸한 데 이어 상주성 밖 여러 곳에 나누어 진을 치고 있던 왜군까지 남김없이 평정했다. 이로써 상주는 완전히 수복됐다.

이 소식이 전해지고 전해지면서 다른 지방에서 공포로 떨던 백성들이 거리가 멀고 가깝고를 가리지 않고 상주로 몰려와 생명을 보전했다. 아울러 정기룡은 그 공을 인정받아 정3품의 상주목사로 승진했다.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있다”는 명성이 천지에 자자했다. 그의 나이 불과 31세였다.

이후로도 정기룡은 한 마리의 커다란 용으로 전장을 휘저었다. 60전 60승의 불패신화를 이어갔다. 특히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에서 적장을 생포했고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을 탈환했다. 이로써 종2품의 경상우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오른 정기룡은 경주와 울산까지 수복함으로써 책임을 다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정기룡의 활약은 계속됐다. 경상도방어사(防禦使), 김해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중도방어사에 올랐고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됐다가 상호군(上護軍)에 승진한 뒤 정2품인 삼도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거쳐 1618년(광해10)에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차됐다.

혼례가 있던 날에도 홀연히 사라졌다가 왜적의 목을 베어들고 나타났을 정도로 나라의 안위에 목숨을 걸었던 정기룡은 1622년(광해14) 2월28일 61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그의 유골은 생전에 어머니와 약조했던 대로 상주 땅에 묻혔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홍양호의 저서 ‘해동명장전’, 김덕현의 논문 ‘정기룡 장군의 활약상과 주요 전적지’
공동기획지원 : 상주시


■ 정기룡 장군 위패 모신 충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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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장군의 신도비.

충의사(忠毅祠)는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있는 사당으로, 호국의 상징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정기룡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망국의 문턱에서 살려낸 구국의 장군으로, 충의(忠毅)는 그의 시호이기도 하다.

충의사는 처음에 약16㎡ 규모의 작은 사당으로 설립됐다. 1978년 호국선현유적지 정화사업을 통해 총1만3천209㎡의 부지로 확장, 정비했다. 사당을 비롯해 전시관, 내외삼문, 기념비, 관리사무소 등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전시관에서는 보물 제669호로 지정된 교서, 교지, 신패, 옥대를 비롯해 동산문화재로 등록된 교지 19점, 매헌실기(梅軒實記) 판목 58판 등을 볼 수 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정기룡 장군의 호국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산실이기도 하다. 이밖에 장군의 묘소와 신도비는 충의사로부터 동쪽 약 800m 지점의 낮은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충의사는 1974년에 신도비, 묘소와 함께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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