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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11] 한계 이승희의 독립운동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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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관기자
  •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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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세때 경상도 유림 최초 망명…독립운동 기지 건설 위해 집단이주 앞장

이승희는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인 흥개호(興凱湖·러시아 한카호) 동편 밀산부 봉밀산 아래 황무지를 개척해 ‘한흥동’으로 이름지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280㎞ 떨어진 곳으로 지금은 중국 헤이룽장성 밀산시 쾌산별리(당벽진) 백포자향 임호촌이다. 당시엔 ‘고려영’으로도 불렸다.
1910년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이승희가 처음 도착해 살던 곳이다.
한계 이승희 존영.
◆성주 한개마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중략) 내가 이번에 고국을 떠나 돌아갈 기약이 쉽지 않구나. 내 어금니 하나가 입속에 단단하게 있더니 갑자기 빠졌다. 이제 깎은 손톱과 빠진 머리카락을 동봉한다. 백골로 고향에 묻히기 어려울 듯하니 조상의 무덤 곁에 묻어다오(하략).”

한계(韓溪) 이승희 선생이 1908년 5월19일 성주 한개마을을 떠나 20일 만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도착한 뒤 아들 기원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개척리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 집거구다.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시 북쪽 하바로프스카야가(街) 20번지 주변으로 남쪽은 신한촌이다.

이승희는 대구경북지역 유림 가운데 가장 먼저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했다. 그 이전 유인석(1896)의 서간도 망명과 함경도 출신 김약연, 윤하현, 문병규(1899) 등의 북간도 망명이 있었지만, 경상도지역 유림으로선 그가 처음이다. 이승희는 62세 때 조국을 떠난 이후 한 번도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이역 땅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안창호, 신채호, 이동휘 등이 설립한 신민회(1907년 창립)의 주도에 따라 진행됐다. 이승희의 북간도 망명 이후 1910년 이회영, 이시영, 이석영 형제와 이동녕, 김창환 등이 서간도로 떠났다. 비슷한 시기 안동의 이상룡 일가, 유인식, 김대락, 김동삼 일가, 울진의 주진수, 영양의 조만기 일가, 영해의 박경종 일가, 평해의 황만영 일가, 구미 왕산 허위의 일가인 허겸(허로, 허혁), 허형, 허필 등이 서간도로 망명했다.


성주한개마을 한주학파 이승희 선생
유생 수백명 을사늑약 상소 운동 주도
국채보상운동 실패 연해주 이주 준비
왜관·부산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도달

장지연·유인석 등 유력인사들과 교류
이상설과는 거의 매일 만나 시사 논해
안중근이 스승으로 모셨다는 기록도

두 아들, 운동자금 모금하려 국내 복귀
대한인국민회 의연금 모아 토지 매입
한국 부흥시키는 동네 ‘한흥동’ 명명
조국에 돌아오지 않고 이역서 생 마쳐



이들은 국내에 기반을 둔 독립단체와 교류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이들이 망명을 결행한 것은 국권상실로 인한 국내에서의 의병투쟁, 즉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의 국내 의병투쟁에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13도 총 의병대장 왕산 허위의 순국(1908), 안중근 의사의 거사(1909) 등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함으로써 본격적인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국외로 간 이들은 학맥과 혼맥으로 연결됐다.

서간도로 간 구미 임은 허씨 일가는 성재학파(허전)에 속했다. 성재학파는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허전의 수제자는 왕산의 백형인 허훈이다.

안동인들의 남만주 망명은 고성이씨 석주 이상룡과 의성김씨 내앞마을 김동삼, 전주류씨 류인식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주로 정재학파(류치명)를 잇는 인물들이다.

이승희는 한주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주 이진상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그를 비롯해 8명의 제자를 주문팔현(면우 곽종석, 회당 장석영, 면와 이덕후, 홍와 이두훈 등)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이덕후와 문인 정인하, 제자인 이수인 등과 함께 북간도로 갔다. 이들은 성주에서 왜관을 거쳐 부산에서 기선을 타고 원산, 청진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했다. 이듬해 이승희의 장남 기원과 차남 기인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왔고, 기인은 1910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이수인과 국내로 돌아갔다.

남만주 일대, 즉 서간도는 안동, 구미인들이 중심이 됐고 북만주(북간도)로 간 이들은 이승희를 중심으로 한 성주 사람들이다. 성주유림과 안동·구미유림의 공통점은 동학사상을 배척하고 동학을 탄압한 점이다. 차이점은 성주유림이 위정척사와 존왕양이를 바탕으로 한 군주제를 지향한 데 비해 안동유림은 보다 진보적인 공화정을 지향했다.

◆연해주에 정착한 이승희

이승희가 연해주 망명을 결심한 계기는 을사늑약 이후 반대상소 운동에 앞장서다 1906년 1월 일경에 피체돼 3개월 여간 대구경무소에 구속된 사건 때문이다. 그는 당시 수백 명의 유생을 이끌고 서울로 가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 붙잡혔다.

그는 심문과정에서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며 일제에 저항했다. 또 을사오적신과 일진회 반역자 무리를 참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천하강상의 적’이라고 하며 조약파기를 주장했다.

또 다른 망명 이유는 국채보상운동 실패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출옥 후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를 설립하고 경남지방국채보상회의 회장에 추대돼 의연금 모금에 힘썼다. 실제 자신의 회갑연에 쓸 20원을 쾌척하는 등 국채를 갚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일진회 등 반민족부일배 세력이 국채보상운동에 개입하면서 실망해 탈퇴해버렸다. 여기에 더해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단이 참석하지 못한 결과에 낙담하고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즈음 국채보상운동 지도부에 “마음은 항상 동해 서산에 있다. 나는 곧 남쪽으로 갈 계획이니 밖에서 오래 머무를 것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는 등 연해주로 갈 채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연해주에 도착한 이승희는 1909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해조신문(1908년 2월 연해주에서 발간) 주필 위암 장지연, 이범진의 아들 간도관리사 이범윤의 조카 이위종, 의암 유인석, 보재 이상설, 안중근 등 쟁쟁한 당대의 인물과 만나 교류했다.

당시 연해주는 1860년대 이래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을사늑약 이후 민족 지도자들이 대거 망명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무대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는 유인석, 이상설과 자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짰다. 특히 이상설과는 4㎞ 정도 떨어져 살았지만, 거의 매일 만나 명리와 시사에 대해 논했다.

그는 한계유고에 ‘이상설은 나보다 23살 연하이지만 박식함과 애국심이 대단하다. 신학문을 배워 만국의 사정에 통달했고, 구학문인 성리학과 경학뿐만 아니라 의학, 산술, 복서에까지 통달해 감탄했다’고 썼다. 또 ‘보재를 한번 보고 마음으로 허교했으며, 보재 또한 나를 기쁜 마음으로 복종해 모든 대소사를 함께 의논했다’고 표현했다. 심지어 ‘내가 체증(滯症)이 있어 더운밥을 먹지 못하자 이상설이 손수 부채질을 해 음식을 올렸다’고 했다. 일설엔 나라 없는 사람이 더운밥을 먹을 수 없다고 해 이승희가 찬밥만 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승희의 문우인 회영 장석영(칠곡)은 저서 요좌기행에서 ‘이상설이 영어에 능통했고 러시아어도 두루 통했다’고 평가했다. 또 ‘이상설이 이승희의 문학과 행의를 사모해 스승의 예로 모셨고, 이승희도 이상설을 통해 신학문을 알게 되고 유익한 도움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렇듯 이상설은 이승희를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신 것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한계유고에 따르면 이승희가 안중근 의사와 교류한 기록도 보인다. 안 의사는 1909년 2월경 크라스키노 하리에서 동지 11명과 단지동의회를 결성하는 등 의병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당시 자신의 사격술을 시험 삼아 보여주었는데, 이승희는 ‘여인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두 손으로 잡고 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쏘니 탄환이 그 물동이를 관통했을 뿐만 아니라 물동이가 흔들리지도 않았다’고 감탄했다. 또 안 의사가 호방하게 “일본인을 만나면 갑자기 쏘아죽이고 저 원수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하자 “대사를 도모하는 사람은 반드시 행동이 말에 앞서야 하니 그런 다음에라야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충고했다. 이에 안중근이 이승희의 사려 깊은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복종하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북만주 독립운동기지 한흥동 개척

이승희는 1909년 이상설을 만나면서 서구사회를 알고 이해하게 됐다. 또 그를 통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전쟁과 만국평화회의의 허구성을 인식하게 됐다.

그는 만국대동의원사의(萬國大同議院私議)를 쓰고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대동사회 건설을 구상했다. 만국대동의원은 세계 각국의 대표를 인구비례로 선발해 함께 모여 만국공법을 제정하고 세계 각국의 문자를 만들어 윤리, 헌법, 군사, 기술, 통상 등을 통일해 인의를 실천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이러한 방편의 하나로 이승희는 1908년 8월 이상설과 상의해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 위한 한인집단 정착지를 물색하고 여러 차례 이 일대를 답사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인 흥개호(興凱湖·러시아 한카호) 동편 밀산부 봉밀산 아래 황무지를 선택했다.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280㎞ 떨어진 곳이다. 현재 헤이룽장성 밀산시 쾌산별리(당벽진) 백포자향 임호촌으로 당시엔 고려영으로도 불렸다.

그는 1909년 제자 이수인을 국내에 보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미국의 대한인국민회가 이상설에게 보낸 5천달러 등의 의연금을 모아 원동임야주식회사를 설립하고 45방(方)의 땅을 구입해 우선 100여 가구의 한인을 집단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한흥동(韓興洞), 즉 ‘한국을 부흥시키는 동네’라 지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 강재(剛齋)를 버리고 한계(韓溪)로 고친 다음 이름마저 대하(大夏)로 바꾸었다. 이듬해 그는 한흥동 이외 밀산부의 땅 2천340에이커를 매입해 십리와라는 곳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 한인을 이주시키려 했으나 김성무 등과의 불화로 실패했다. 당시 그와 함께한 사람은 김정묵(선산), 이우필(이덕후의 아들), 이수인(제자), 이종갑, 이민복 등이다.

글·사진=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진관기자
▨참고문헌 : 한계 이승희의 생애와 독립운동(권대웅 성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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