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상주 .5] 의료 호국의 상징 존애원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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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22   |  발행일 2019-07-22 제12면   |  수정 2019-07-22
“醫로써 義를 이루자” 임란에 지치고 병든 민초 인술로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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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병약해진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설립된 상주 존애원. 당시 향촌사회를 영도했던 10여개 가문이 힘을 모아 건립했다. 1993년에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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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은 의료기관으로만 국한되지 않았다. 학생들의 글 공부를 도와주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잔치도 열었다. 교육과 강학의 장소는 물론 경로효친과 예절교화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다.


상주의 호국정신이 후세에까지 칭송을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단순히 나라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민초들의 고단한 삶까지 보듬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설의료시설인 ‘존애원’이다. 긴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이가 질병에 시달리자 지역 사족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기구를 설립하고 의료 구휼에 힘썼다. 특히 존애원은 의술을 펼치는 것은 물론 교육과 강학의 장소로, 때로는 경로효친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호국의 성지 상주’ 5편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호국·박애정신을 실천한 상주 사족과 존애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1599년 사족 24명이 모여 낙사계 조직
사설 의료기관 존애원 설립 백성 구제
상주지역 16개 가문 참여 활발한 후원
교육·강학·경로효친 구심점 역할도
2005년 이후 아홉차례 시술 재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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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 내부에 걸린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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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의 현판. 존애(存愛)는 ‘본심을 지켜 기르고 남을 사랑함’이라는 뜻을 지닌 중국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勿)’에서 따왔다.


#1. 영남 제일의 웅부, 상주의 부활을 위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자신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상주를 이렇게 기록했다. ‘상주의 다른 명칭은 낙양(洛陽)이며,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서 충청도, 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에 임하여 김해, 동래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을 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 드는데, 이는 무역하기에 편리한 까닭이다.’

이처럼 상주는 행정, 경제, 교통의 요충지로서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경상감영의 소재지이기도 했다. 그런 상주가 임진왜란에 초토화되었다. 임란 사상 첫 대규모 전투였던 상주북천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인적·물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정에서 복호(復戶·부역과 조세의 일부를 면제해주는 조치)라는 특혜를 내렸지만,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 집이 도로 세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남기고 간 폐허 앞에서 눈물겨운 복구가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 의병 활동을 주도했던 사족이 섰다.

당시 상주의 사족은 이미 16세기 중엽부터 유계(儒契)를 결성해 향촌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1566년의 병인계(丙寅契), 1578년의 무인계(戊寅契), 1590년의 경인계(庚寅契) 등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흩어지기는 했어도 그 힘은 여전히 생동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전쟁이 끝나자 잠시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다시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 의(醫)로써 의(義)를, 낙사계의 존애원 설립

1599년 여름, 스물네 명의 인물이 더위를 뚫고 한 자리에 모였다. 기존의 병인계, 무인계, 경인계에 참여했던 계원 가운데 전쟁을 뚫고 살아남은 이들과 새로이 영입된 얼굴들이었다. 이들은 입을 모아 지역을 울리는 비탄의 목소리를 나누었다.

“지금이 농사철이거늘, 사방 들판에 농구를 가진 백성이라고는 없으니 올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음은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예로부터 상란(喪亂)이 없는 때가 없었으나 사람과 가축이 이 정도로 없어짐이 어찌 오늘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슬프고 슬픈 일입니다.”

“폐농이 되다시피 한 마당에 어찌 스스로 살아남으라 하겠습니까. 조정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기대함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우리 사족들이 힘을 써야 합니다.”

이에 당시 경상도관찰사의 직을 그만두고 상주 외가로 돌아와 있던 정경세(鄭經世)를 중심으로 낙사계(洛社)가 조직되었다. 풍비박산된 지역의 피해를 복구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위험 수위에 다다른 백성들의 건강이었다. 전쟁 때문에 농사가 초토화되었으니 먹을 것이 없었고, 먹을 것이 없으니 몸이 상하는 건 필수(?)였다. 거기다 피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으니 병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의료시설도 없었을뿐더러 약재도 구할 수 없었다. 낙사계 계원들은 여기에 주목했다.

“전쟁 때 의병을 일으켜 무(武)로써 의(義)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의료원을 세워 의(醫)로써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뜻이 모인 데 이어 자금이 모였다. 이를 기반으로 약재창고와 숙박시설이 포함된 의국(醫局)을 검암(黔岩)에 설립했다. 바로 존애원(存愛院)이었다. ‘존애(存愛)’는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勿·본심을 지켜 기르고 남을 사랑함)’에서 취한 이름이었다. 여기에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과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더했다. 굶주리고 아픈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곧 선비의 도리이자 책무라고 믿은 것이다.

여기에 후원한 상주의 사족은 한두 가문이 아니었다. 1886년에 존애원 도감(都監) 손영로(孫永老)가 집필한 존애원 중수기록 ‘존애원신수사적(存愛院新修事蹟)’에는 13개 가문만 나와 있지만, 1956년에 이종린(李鐘麟)이 집필한 ‘존애원수정안좌목(存愛院修正案座目)’에는 그보다 더 많은 16개 가문이 기록되어 있다.

회산김씨(檜山金氏)·여산송씨(礪山宋氏)·영산김씨(永山金氏)·진양정씨(晉陽鄭氏)·무송윤씨(茂松尹氏)·상산김씨(商山金氏)·전주이씨(全州李氏)·재령강씨(載寧康氏)·장수황씨(長水黃氏)·흥양이씨(興陽李氏)·신천강씨(信川康氏) 등 11개 가문이 먼저 이름을 올린 가운데, 같은 해 가을에 청주한씨(淸州韓氏)·예천권씨(醴泉權氏)·창녕성씨(昌寧成氏)·경주손씨(慶州孫氏)·단양우씨(丹陽禹氏) 등 5개 가문이 추가로 참여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장수황씨·신천강씨·예천권씨 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활동하지 않았고, 나머지 13개 가문은 19세기 말까지도 존애원의 운영 주체로 운명을 함께 했다.

#3. 백성을 구함으로 나라를 지키니 이 또한 호국이라

낙사계 계원 가운데 정경세와 이준, 이전 형제가 중심이 되어 운영을 이어갔다. 중요한 것은 약재와 의원의 확보였다. 먼저 약재로는 조선에서 나는 향약재(鄕藥材)와 명나라에서 들여와야 하는 당약재(唐藥材)를 고루 구비하기 위해 힘썼다. 향약재는 사람들을 동원해 채취하여 활용했고, 당약재는 무역을 통해 사들였다. 그리고 이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아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재료 구입이 계속해서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했다.

다음은 의원, 즉 의사였다. 정경세가 팔을 걷어붙인 끝에 맞춤한 인물을 찾아냈다. 임진왜란 이후에 처가를 따라 상주로 이주해 와있던 성람(成)이었다. 성람은 의학과 의술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이였다. 정경세가 “성공(成公)께서 환자의 진료와 투약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성람은 받아들였다.

존애원은 본격적으로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의료 대상은 계원,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원하기만 하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약재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존애원의 영향력은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3년 뒤인 1602년에는 ‘존애당’이라는 번듯한 건물을 지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던 1782년, 지역의 한 주민에 의해 무고(誣告)가 발생했다. 1797년에 누명을 완전히 벗을 때까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진료가 중단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사건의 내막을 전해들은 정조(正祖)가 “계의 뜻이 참으로 크다. 과인도 함께 하리라(大哉比 吾當入之)”며 칭송하고 계의 이름을 ‘대계(大)’로 새로 지어주었으나 의료사업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존애원은 다른 모양으로 살아남았다. 하나는 경로효친과 예절교화의 구심점이었다. 1607년부터 지역의 노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시작한 ‘백수회(白首會·경로잔치)’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70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세의(歲儀·새해에 올리는 음식)는 1940년까지도 지속됐다.

또한 존애원은 교육과 강학의 장소이기도 했다. 바로 서당(書堂)의 역할이었다. 1747년에 간행된 ‘상산지(商山誌)’에 존애원이 서당이라는 내용이 있고, 존애원신수사적(存愛院新修事蹟)에도 ‘이곳은 서당을 겸해 수행한 지가 이미 오래이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존애원은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의 중수를 거쳐 1950년에 단소(壇所·제단)를 설치할 즈음까지도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낙사계의 창립목적과 존애원의 설립 정신을 계승하고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6·25전쟁 등 계속되는 혼란한 정세 속에서 아무래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지역의 사족들이 백성을 구하고 나아가 나라를 지키려했던 정신은 스러지지 않았다. 이로써 1956년, 13개 문중의 후손들이 뜻을 합하여 존애원의 역사를 기록한 ‘낙사휘찬(洛史彙纂)’을 발간했다. 그리고 2005년부터 2017년까지 13년 동안 의료시술과 민간구휼의 현장을 재현하는 ‘존애원 의료시술 재현행사’를 9회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존애원은 1993년 2월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존애원의 숭고한 뜻은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形氣元來根低發(형기원래근저발) 도리(道理)의 기운은 태초부터 피어올랐으니

吾身只敬敬親枝(오신지경경친지) 우리는 오직 예(禮)로써 경(敬)을 실천하는 가지들일세.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논문 ‘상주 낙사계의 존애원 설립과 운영’, 김도완.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의 설립과 의료 기능, 대구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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