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등산문화 거점 ‘등산 카페’, 신개념 ‘캐시미어 등산복’ 시대 개척 동분서주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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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9   |  발행일 2019-08-09 제34면   |  수정 2019-08-09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등산카페 ‘에이스’ 김창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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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사업 실패를 딛고 2017년 대구 앞산 공룡공원 공영주차장 옆에 차린 등산카페 ‘에이스’를 지키고 있는 김창길 대표. 그는 레포츠사업가로서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지만, 그걸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으로 환치시키면서 대구 레포츠의 산증인으로 살다갈 것을 다짐한다.


지상에서의 운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수중 운동으로 건너갔다. 생애 처음으로 바다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그때만 해도 전문 장비를 장착한 가운데 수중 풍경을 본다는 건 일반인에겐 아득한 일이었다. BC 325년 동방정벌의 영웅 알렉산드 대왕이 밧줄에 매단 유리통에 들어가 바다 구경을 했다고 한다. 그게 인류 최초의 잠수랄까. 하지만 19세기 말까지도 잠수의 기본 원리는 2천년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물 밖에서 튜브로 공기를 공급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이르러 공기 튜브 대신에 우리가 산소통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공기통을 착용하는 ‘폐쇄 회로식 호흡 장비’가 도입된다. 이 대목에서 해양탐험의 영웅인 쿠스토가 등장한다.

보통 잠수(다이빙)라고 하면 ‘스킨 스쿠버(Skin Scuba)’를 떠올린다. 공기통 없이 잠수하는 걸 ‘스킨 다이빙’, 공기통을 사용해 잠수하는 걸 ‘스쿠버 다이빙’이라 한다. 1943년 쿠스토는 가스 기술자인 에밀 가냥과 공동으로 일을 저지른다. ‘아쿠아 렁(Aqua lung)’을 제작해 특허를 얻는다. 쿠스토는 즉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실패였다. 수평으로 수영할 때는 괜찮았지만 몸을 세우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배기구와 흡입기의 위치를 바꿔 이 문제를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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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구 봉덕동 앞산 공룡공원 공영주차장 옆 등산카페 ‘에이스’ 실내 전경.


대구스포츠센터 처음 들어선 다이빙풀
해군 UDT 출신 사부덕 각종 스킬 연마
값비싼 장비에 전문직 종사자가 주류

스쿠버 기본 보급 김종학


대구에도 쿠스토 같은 사내가 있었다. 대구에 처음으로 스킨스쿠버의 기본을 보급한 해군특전단 UDT 출신인 김종학이다. 그가 내 스킨스쿠버 사부다. 70년대 후반 대구에도 제대로 된 전문 수영장인 대구스포츠센터가 수성구 파동에 들어선다. 국내에 대구스포츠센터 다이빙풀만 한 데가 없었다. 그래서 대구의 스쿠버가 강할 수 있었다.

나는 1979년 난생 처음으로 수영장에서 벗어나 바다를 잠영한다. 포항북부해수욕장(현 영일대해수욕장)에서 해양 스쿠버 실습을 받았다. 공기 중 산소는 21% 정도밖에 없다. 나머지는 질소다. 스쿠버는 질소와의 싸움이다. 여기서 지면 고산병 앓듯 잠수병을 앓게 된다. 내려가는 것보다 올라올 때 더 조심해야 된다. 10m마다 멈춘 뒤 1분 정도 쉬어줘야 한다. 수경 착용부터 만만치 않다. 공기 새는 공간을 없애야 한다. 착용했을 때 머리카락 한 올도 들어가지 않게 단속해야 한다. 머리카락을 따라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팔자 주름 등 얼굴 근육이 움직일 때도 물이 들어간다. 제일 처음 배우는 스쿠버 스킬이 마스크 물 빼기다.

입수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비치 다이빙과 보트 다이빙. 보트 다이빙은 장비를 다 착용하고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비치 다이빙은 걸어서 입수한다. 몸이 뜨면 양성부력이고 가라앉으면 음성부력이다. 둘 다 아니다. 다이버들은 중성부력을 유지해야 한다. 처음에는 중성부력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능숙한 다이버들은 호흡만으로도 중성부력을 맞춘다.

생명유지 때문에 관련 장비도 참 많다. 공기통, 레귤레이터(공기조절기), 부력조절기, 잠수복, 오리발, 수경, 수중카메라 등 풀세트를 구입하려면 적잖은 금액이 들어간다. 30년전만 해도 아무나 덤벼들 수 없었다. 사업가, 자영업자, 의사 등 주머니 사정이 좋은 전문직 종사자가 주류를 이뤘다. 당시 대구에서 스쿠버 마니아는 채 50명도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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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카페 ‘에이스’ 내에 숍인숍 스타일로 깃든 커피숍 ‘예티’의 커피. 바리스타 겸 요리연구가 강나윤씨가 직접 꾸민 미니어처 같은 모둠 야생화잔이 앙증맞게 매칭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 스쿠버 포인트 순례
직원만 80명, 교육용 풀까지 특수 누려
바다낚시·스키 밀려 수중문화 뒷걸음

스쿠버 취미가 사업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았다. 제주도 섶섬과 문섬, 울릉도, 동해와 남해 등 전국의 유명 스쿠버 포인트를 순례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 어촌계가 활성화되어 있지 못했다. 팀을 이뤄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 주민들은 우리가 뭘 하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훈련을 하는 군인, 아니면 해녀 정도로 착각했다. 그때만 해도 동해안 해수가 깨끗해 갯바위가 하얗게 백화되지 않았다. 해삼, 멍게, 성게, 조개 등 별별 어패류를 잡아 즉석 해물파티를 즐겼다. 하지만 이제는 정해진 구역이 아니면 다이빙을 못한다. 당시 스쿠버를 배우려면 한국잠수협회, 한국수중협회, 이외 스쿠버 전문점을 통해야만 했다.

처음 차린 ‘대구잠수’는 2년 정도 지속됐다. 이어 수성못 남쪽 호반휴게실 근처로 이전, ‘에이스 토탈레저’를 차린다. 이때부터 에이스는 나의 닉네임이 된다. 새로운 사업체가 생길 때마다 에이스란 명칭을 사용했다. 스쿠버에서 시작된 나의 레포츠 호기심은 수상스키, 제트스키, 스키, 윈드서핑, 요트 등으로 뻗어나갔다. 여름철엔 사람을 데리고 포항북부, 칠포, 월포, 경주감포 등지로 출정을 나갔다. 스쿠버에서 시작된 나의 수상레포츠 욕망은 더욱 특화돼 나갔다. 검게 탄 구릿빛 피부는 해병대 훈련 조교를 능가할 정도였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등과 맞물려 레포츠 특수가 용틀임을 쳤다. 나도 그 시장을 선점하고 싶었다. 89년 수성구 두산동 아리아나호텔 옆으로 이전해 ‘에이스 레저’를 차렸다. 꽤 규모가 컸다. 직원만 80명, 교관은 10명이 포진됐다. 당시 TK레포츠, 효성수중 등이 지역 레포츠업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나는 스쿠버 전문 매장시대를 열었다. 숍 안에 가로 5m, 세로 10m, 깊이 4.5m짜리 교육용 다이빙풀을 직접 팠다. 지역 첫 스쿠버 교육용 풀이었다.

백화점 문화교실 같은 레포츠 강좌도 마련했다. 스키, 스킨스쿠버, 윈드서핑, 수상스키, 모터보트, 제트스키, 골프 등을 설강했다. 스키는 무주·용평·용인 스키장을 사용했다. 윈드서핑, 모터보트 등은 수성못·경산문천지·불로동 단산지 등을 이용했다. TBC대구방송 개국방송을 위해 내 장비를 동원해 수성못에서 레포츠페스티벌을 시연해 지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하지만 스쿠버 문화는 희한하게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전국 바다가 어촌계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곳곳이 종패장이었다. 환경단체의 간섭도 심해졌다. 바다낚시로 넘어가는 레포츠족도 많았다. 시장은 점점 하강커버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새 종목으로 국면타개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환으로 89년부터 11년간 대구 스키문화 활성화에 앞장선다. 2005년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에이스 스키학교’를 연다. 매년 11월말부터 3개월 남짓 모객해 용평과 무주 스키장으로 갔다. 모두 5개의 스키숍을 운영했다. 덕분에 나도 이 때 적잖은 돈을 벌었다.

가성비 좋은 건강지키기 몰리며 등산붐
부도후 차린 아웃도어 사업도 큰화재
잿더미속 건진 안나푸르나 원정 사진

IMF로 수상레포츠 치명상…등산용품으로


IMF 외환위기는 수상레포츠업계에 치명상을 입혔다. 사람들은 가성비 높은 뭔가에 매달렸다. 소시민은 돈은 없어도 건강만은 지키자면서 너도나도 산으로 몰려갔다. 단군 이래 최고의 등산붐이 일어난다. 1973년쯤 출발해 노스페이스를 론칭한 ‘영원무역’, 서울 중구 종로5가 ‘동진산악’에서 시작한 블랙야크, 코오롱스포츠 등 국내외 아웃도어가 돈방석에 앉게 된다.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는 10년 만에 30개 이상으로 급증한다.

등산특수를 멀리서 보는 와중에 난 IMF 때 큰 부도를 맞는다. 그때 묶인 돈이 자그마치 10억원이 넘었다. 렌털용 스키를 2천여대 수입해 놓은 상태였다. 그동안 번 돈을 다 날렸다. 빚잔치 직후 참담한 맘을 달래기 위해 전국 유명 산을 돌았다. 이때 아웃도어 시장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몇 년 만에 아웃도어 대리점이 1만여개로 늘어난다. 가히 ‘아웃도어 공화국’ 같았다.

나는 2001년 이탈리아 몬추라, 스위스 마무트, 미국 OR, 일본 몽벨, 미국 오클리 안경 등 7개 수입 해외브랜드를 취급하는 ‘에이스 등산’을 오픈한다. 스쿠버 김창길에서 아웃도어 김창길로 변신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2011년 4월5일 청천벽력 같은 일을 또 당한다. 점심 때 화재를 당한 것이다. 20분 만에 모든 게 날아가버렸다. 또 수십억원어치 손실을 입는다. 이때 잿더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액자가 있었다. 94년 지봉산악회 안나푸르나 1봉 원정대가 세르파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그건 이 사업을 포기말라는 ‘계시’ 같았다. 나는 그 액자를 늘 부적처럼 매장에 걸어둔다. 월간 ‘산’에서 나의 재기스토리를 취재해 가기도 했다.


레포츠 문화속에서 파고든 4번째 도전
韓 감각적 디자인 입힌 네팔 캐시미어
등산박물관·자연보호학교 부지물색도

지금은 캐시미어와 밀애중


나의 좌절은 자연과 관련된 일이라 ‘절망’일 수 없었다. 난 레포츠를 물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건 하나의 ‘문화’다. 나는 세월호-메르스-사스-사드-촛불집회 등의 파고 속에서 국내 아웃도어시장이 어떻게 무너지는 걸 확인했다. 나는 좀 더 숙성된 생각을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산악 문화관’ 같은 등산카페를 앞산 고산골 공룡공원 주차장 옆에 차렸다. 내 인생의 4번째 도전이다.

최근 열흘 일정으로 네팔로 출장을 다녀왔다. 거기서 만난 백발성성한 히말라야는 언제나 봐도 지구의 마지막 ‘순정구역’인 것 같다. 거기 가면 삶의 새로운 화두가 된 프리미엄급 천을 만날 수 있다. 티베트, 라다크 등 5천m급 히말라야 고산에 사는 염소 털로 짠 ‘캐시미어(Cashmere)’. 현재 캐시미어 가공 공장은 인도와 네팔의 국경에 밀집해 있다. 나는 네팔 골리안그룹의 자회사인 트라이코트와 손을 잡고 라이선스 계약을 했다. 최고급 이탈리아 현지 캐시미어 의류 수입은 물론 네팔의 대중적 캐시미어까지 한국 디자인 감각을 입혀 론칭하고 싶다. ‘캐시미어 등산복시대’를 열고 싶은 거다.

고산골의 밤. 창을 열면 계곡바람이 건듯 불어온다. 열대야를 피해 온 지역의 몇몇 레포츠맨들이 모여 한국 산악운동의 핵심 도시인 대구 레포츠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나와 호흡이 맞는 산쟁이이자 요리연구가인 강나윤씨는 카페 한 쪽에 ‘예티(YETI)’란 숍인숍에서 수제 팥빙수와 커피류를 팔고 있다.

조만간 대형 스크린을 갖춰놓고 산악 영화를 상영해 주고 싶다. 등산박물관과 자연보호학교를 위해 팔공·비슬산 자락을 돌며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8년째 산림청 명예 환경감시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사람들이 상대를 생각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정한 레포츠가 뭔지도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면 허겁지겁이었던 과거의 레포츠시장도 달라져야 한다. 나는 그 시대를 선도하고 싶다.

워낙 많이 망해먹은지라 지인들은 늘 ‘괜찮냐’며 걱정해 준다. 그럼 나는 속으로 ‘맘은 늘 에이스’라 독백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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