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5] 청송 성천댁과 이촌리 오층석탑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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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3   |  발행일 2019-08-13 제14면   |  수정 2020-03-18
‘ㅁ’자형 뜰집 구조…아담하면서 다부진 짜임새로 배치
[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5] 청송 성천댁과 이촌리 오층석탑
청송 청운마을에 위치한 성천댁은 작은 뜰을 가운데 두고 안채, 사랑채, 부속채가 ‘ㅁ’자 형으로 구성된 뜰집이다. 넓은 안마당을 구성하기 위해 규모가 큰 다른 뜰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담한 느낌을 준다. 특히 대청마루와 나무 디딤판, 뜰의 조화로운 모습이 인상깊다.

돌과 나무와 흙으로 빚은 집은 스스로 자연이다. 그래서 이 빠진 돌담이나 찌그러진 울담만 남긴 채 폭삭 주저앉은 집터를 보면 ‘아, 돌아갔구나’하며 좋은 마음으로 그의 이전 생애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잘 늙은 옛집을 만나면 그 소박하고 부드러운 위엄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볼을 쓰다듬고 어깨를 기대고 그 늙은 등에 덥석 업히고 싶어지는 것이다. 오래된 거리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오래된 돌탑은 어떠한가. 탑은 절집의 안마당으로 들어가기 전,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세워졌다. 사람들에게는 영속하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는 가만히 선 채로 거리를 활보하는 가장 가까운 신이었다. 잘 늙은 옛집과 오래된 돌탑에는 날 선 모서리 하나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 있다. 그것은 영원의 인상이다.

[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5] 청송 성천댁과 이촌리 오층석탑
성천댁 대문에 들어서면 행랑마당 너머 사랑채와 중문간, 마구간이 보인다.
[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5] 청송 성천댁과 이촌리 오층석탑
청송 진보면 이촌리 오층석탑. 약 500년 전 원성이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자손번창을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성천댁
부채꼴 모양 서쪽 최고 경사지에 자리
대문 들어서면 사랑채·중문간·마구간
안뜰 채운 햇빛은 시간따라 각 방 밝혀
건축연대 알 수 없지만 대략 300년 추정


◆오층석탑
원래 이촌리 서북쪽 고개에 9층탑 조성
이건 과정 5층 건립…민속박물관 앞뜰로
탑신 몸돌 1층 높고 2층부터 급격 축소
원성이씨 갑부의 부귀·몰락 전설 간직

#1. 국가민속문화재 제172호 청송 성천댁

청송읍에서 용전천(龍纏川)을 거슬러 주왕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천변에 청운(靑雲)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마을은 서쪽으로 올라간 부채꼴 모양의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집들은 대부분 천을 내려다보며 동쪽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비탈진 골목길을 올라 서쪽의 높은 자리에 다다르면 초가지붕을 올린 대문간이 남쪽을 향해 있는 집을 만난다. 청송 성천댁(星川宅)이다.

대문간은 3칸으로 왼쪽에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구성된 행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대문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 너머 사랑채와 중문간, 마구간이 정면으로 보인다.

중문간을 통과하면 안뜰이다. 멍석 한 장 깔 수 있을 만한 작디작은 뜰이다. 뜰을 가운데 두고 안채, 사랑채, 부속채가‘ㅁ’자 형으로 사방을 막고 있다. 이런 집을 ‘뜰집’이라 부른다. 대체로 뜰집은 안마당을 구성하기 위해 규모가 큰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성천댁은 건물 규모도 작고 상대적으로 안마당도 작다. 대신 아담한 느낌과 다부지면서 짜임새 있는 느낌이 든다.

안뜰 왼쪽에 대청마루가 동쪽을 향해 열려 있고,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사랑채와 오른쪽에 안채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안방과 윗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방 옆으로 부엌과 고방이 이어진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윗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윗방은 서쪽으로 한 칸 돌출해 있는 형태다. 사랑방의 중문간 쪽 반 칸은 원래 쌀뒤주였다고 한다. 중문간에서 사랑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내지 않았다. 사랑방은 행랑마당과 대청을 통해 드나든다.

대청 아래에 나무 디딤판이 놓여 있다. 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뒷벽에는 외여닫이 널문이 나있다. 사랑방 벽기둥과 안방의 모서리 기둥위에 마루천장을 가로지르는 큰 부재를 놓았다. 그 위에 보를 걸쳐 마당 쪽으로 돌출시키고 처마도리를 놓아 지붕을 올렸다. 처마가 드리워져 하늘은 작은 안뜰보다 더 작다. 처마 아래 뜰의 한가운데를 얕게 파고 비교적 방형을 가진 자연석으로 가장자리를 둘러놓았는데, 바닥에 자갈을 깔고 석물(石物)을 두었다. 화단이라고도 할 수 없고 석조라 하기에도 갸웃한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처마선에 갇힌 하늘과 그것은 서로를 바라본다. 안뜰이 빛과 바람, 눈과 비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하늘 그 자체의 형상화로 느껴진다.

이른 아침 태양빛은 마구간과 부엌을 가장 먼저 밝힌다. 그리고 아침의 들바람과 강바람이 문을 두드린다. 정오 즈음이 되면 빛은 안뜰을 가득 채운다. 안뜰로 내려앉는 태양빛은 시간에 따라 각 방을 밝히는 조명이 된다. 안뜰을 채운 빛이 사방을 고루 밝히는 동안 북쪽의 안채 윗방은 빛의 사각지대가 된다. 그래서 그 작은 방에는 봉창이 나 있다. 벽을 뚫어 창틀 없이 종이를 바른 창이다. 봉창으로 들어온 빛은 부드럽고 은은하게 망막을 적신다. 안뜰의 빛이 약해졌다고 느껴질 무렵이면 대청의 뒷문을 연다. 빛은 뒷문 밖에 와 있다. 뒷문을 열면 이제 맹렬함이 가라앉은 오후의 맑은 볕이 가볍게 마루위에 눕는다. 그리고 저녁 산바람이 그 위를 스친다.

이 집은 조선 고종 때 행장능참봉(行莊陵參奉)을 지낸 임춘섭(林春燮)이 매수하였다고 전해올 뿐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림잡아 300년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주인 내외가 살며 손님이 머물다 간다. 안채 윗방은 책 읽는 독서실, 사랑 윗방은 차 마시는 다실로 이용된다. 성천이란 ‘별의 내’, 깜깜한 밤이면 성천댁의 안뜰로 은하수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청송 성천댁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경북도문화재자료 제74호 이촌리 오층석탑

청운리에서 다시 주왕산을 향해 조금 가다보면 용전천 변에 자리한 청송민속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청송의 세시 풍속에 관련된 자료와 모형 등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박물관 앞뜰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5층 석탑이 있다. 원래는 진보면 이촌리(理村里)의 서북쪽 고개에 9층탑으로 서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42년에 마을 앞 도로변으로 옮기면서 5층으로 조성했고, 차량의 통행이 잦은 것을 우려해 2008년 3월에 현 위치인 청송민속박물관 앞마당으로 이건했다.

기단은 2층으로 아래층 기단은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현재는 위층 기단의 일부만 드러나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은 1층이 상당히 높다가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든다. 지붕돌은 상당히 두꺼우며 낙수면에 급한 경사가 흐르고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다. 현재 높이는 3.5m로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왜소해 보이는 탑이다. 이 탑의 건립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약 500년 전 이촌리 뒷산 아래에 원성이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윗대부터 자손이 귀해 이씨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이었다. 항상 불안하던 그는 시주하러온 노승에게 방도를 구했는데, 스님은 집 뒤에 탑을 세우고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리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는 스님의 말 대로 탑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렸다. 그 후 이씨는 사남매를 얻게 되었고 집안도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그는 성품이 후덕했고 집안에는 항상 식객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원인모를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던 날 하늘에서 내린 한 줄기 오색찬란한 빛이 탑 꼭대기에 서려 그의 영혼을 애도했다고 전한다.

아버지가 죽자 장남은 모든 유산을 혼자 차지하고 동생들을 내쫓았다. 그가 가산을 맡은 후에도 집안에는 식객이 끊이지 않았다. 욕심 많은 그는 식객들이 더 이상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스님에게 물었다. 그것이 소원이라면, 스님은 석탑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말했다. 석탑은 하루 만에 옮겨졌다. 그 후 식객은 끊어졌으나 이상하게도 곳간의 곡식도 차츰 줄어들었다. 집안의 가보가 사라졌고 자식들도 알 수 없는 병으로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몰락한 장남은 번개와 천둥이 천지를 뒤흔들며 울부짖던 어느 날 피를 토하고 얼굴이 검게 타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 누구도 그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청송군지에 기록되어 있는 이 전설에서 노승은 처음부터 5층 석탑을 세우라고 했다. 바라보면, 대지를 기단으로 삼은 듯한 현재의 모습에 위화감이나 부족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정체를 숨기고 거리를 활보하는 늙고 왜소한 모습의 신 같다. 이촌리 오층석탑은 1985년 8월5일 경북도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청송군 내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석탑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자문= 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청송군지.
공동기획지원: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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