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17] 너무도 겸손한 작가의 길 찾기

  • 최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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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5   |  발행일 2019-08-15 제20면   |  수정 2019-08-15
열아홉 여고생의 죽음이 남긴 ‘문학적 공존’
20190815
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사람살이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다. 인생의 목적이라는 행복에도 스케일이 큰 행복이 있고 작고 소소한 행복이 있다. 삶의 의미에도 큰 의미와 작은 의미가 있다. 이야기도 그렇다. 크고 거창한 이야기와 작고 세밀한 이야기가 있다.

크고 거창한 이야기란 세상을 대상으로 한다. 사회의 전체 모습이나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하는 이야기, 곧 ‘사회구성체’에 대한 사회과학의 논의나 여러 종류의 역사 연구들이 그것이다. 이를 ‘거대담론’이라 한다. 작고 세밀한 이야기란 일상의 삶이나 개인의 감정,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 가득 차 있는 여러 이야기들, 라디오 프로그램의 청취자 사연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채우는 각종 연예인 이야기와 드라마의 이야기, SNS를 장식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여기 해당된다.

살해된 여고생의 주변인 다룬 소설 ‘레몬’
각자의 절절한 상처·심리에 집중하면서도
계층분화·비정규직 등 사회 부조리도 반영
소소한 이야기와 거대담론의 공존 돋보여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거대담론이 힘을 잃었다. 세계 상황이 어떠했으며 (그래서) 지금은 어떻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종되다시피 되었다. 괄호 속을 채울 인과관계에 대해 우리가 알 수는 없다는 불가지론적인 생각이 만연해졌다. 1990년 전후의 세계사적 변화와 근래의 과학기술 발달이 이러한 사태의 원인이다. 정보통신기술(ICT)의 급속한 발달로 4차 산업혁명이 운위될 만큼 세상이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어서, 한 세대는 물론이고 불과 10년 뒤도 예측이 불가하다고들 한다. 인터넷의 상용화와 스마트폰의 발명, 소셜 미디어의 출현 각각의 전후를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맞기는 맞는 말인데, 따지고 보면 기술로 인한 생활의 변화 측면에서 일차로 맞는 말일 뿐이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보면 1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의 구조와 기능 면에서도, 양상에 변화는 있어도 본질은 여전한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우리는 작은 이야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큰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는 문제는 정부가 다 알아서 잘하리라 철석같이 믿듯이, 우리의 일상은 작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상황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는 점도 우리를 안심시킨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큰 이야기가 힘을 잃고 작고 소소한 이야기가 미만해 있는 상황이라 해도, 이 둘을 모두 생각하게 해 주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바로 소설이다. 이러한 점을 확인시켜 주는 최근의 성과가 권여선의 ‘레몬’(창비, 2019)이다.

‘레몬’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종결된 뒤 피해자의 동생 김다언과 모친이 긴 세월 동안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줄기를 이룬다. 범인으로 몰렸던 한만우의 비극적인 삶과 범인으로 추정되는 신정준 및 그의 아내가 된 윤태림의 불행한 현재가 추가되고, 서술자인 상희의 생활이 살짝 언급된다. 이것이 전부다.

‘레몬’의 특징이라면 그러한 심리묘사가 사실상 김다언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났으며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김해언의 경우 내면이 텅 빈 인물로 설정되어 묘사될 만한 심리랄 것이 없는 형편이다. 정신과 상담 내용만이 기술되는 윤태림 또한 신정준이 범인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역할에 머물러, 자신의 스토리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한만우도 마찬가지다. 그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눈 김다언의 추론과 기억을 통해서만 그의 곡절 많은 삶의 내역이 밝혀지는 것이다. 신정준이나 다언 자매의 모친은 거론만 될 뿐 행위가 그려지지도 않는다. 이렇게 ‘레몬’은 사실상 김다언 한 사람의 심리와 생각을 서술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고 김다언의 내면이란 것이 ‘레몬’을 빼어난 심리소설의 경지에 올려놓을 만한 것은 아니라는 점, 이것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언니의 죽음이 주는 고통을 벗어나지 못해 학업을 쉬고 언니처럼 보이게 성형수술까지 받으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켰을 때도, 한만우의 죽음을 거치며 언니를 애도하게 되고 자신의 아이까지 낳은 현재도, 김다언은 내적인 성숙을 보여 주지 못한다. 죽음이나 삶의 의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소박하다.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어서 살아남은 자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이자 ‘나머지 존재’로 만든다는 생각 정도거나(179쪽), ‘원한 적이 없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35쪽)하며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198쪽) 질문하는 수준이다.

물론 이는 작가 권여선이 취한 전략에 따른 것이다. 상황을 설정하고 보여주되 자신이 나서서 설명하지는 않는 것, 이러한 자세로 작가는 한 인간의 억울한 죽음이 남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휘어잡고 흔드는지를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렸다. 이러한 태도로, 살아남은 자들이 평생을 안고 가게 되는 고통이 그들을 성숙시키기는커녕 퇴행 상태에 오래오래 가둔다는 삶의 실상을 그대로 묘파한 것이 바로 ‘레몬’이다.

작가의 전략은 이야기의 크기 면에서도 특징적이다. ‘레몬’이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열아홉 여고생의 죽음은 일반적인 이야깃거리가 아니며 큰 이야기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한 죽음이 특별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띠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큰 이야기에도 닿아 있다. 신정준과 한만우의 극명한 대비가 알려주는 엄연한 계층 분화, 한만우의 굴곡진 삶이 보여 주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뚜렷이 빛을 발하고 있는 까닭이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한만우 가족이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움 또한 절실하며, 비정규직 연구자인 상희의 상황도 미래가 불투명한 만큼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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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확실히 반영하면서도 ‘레몬’은 지금껏 말했 듯이, 30대 후반이 되어서도 성숙한 면모를 보이지 못하는 인물의 고통과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큰 이야깃거리는 작품의 설정 차원에서 끌어안고, 주된 내용은 특별할 것 없는 인물의 절절한 상처와 그에 따른 문제 곧 작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한 작품에 공존시키는 것, 이것이 ‘레몬’의 문학적 성취에 해당한다.

여기까지 오면 ‘레몬’에서 느낄 수도 있는 답답함,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이나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가 인생에 대한 통찰 위에서 죽음과 병고의 문제를 유려하게 그려낸 데 비할 때 생기는 답답함 또한 ‘레몬’의 가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답답함이야말로 ‘한 아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 늘 굶주리고 매를 맞고, 쓰레기장을 뒤지다 질병에 걸려 눈이 멀고, 열두 살 나이에 집단 강간을 당한 후 살해되어 자기가 뒤지던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비극’(185쪽)이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태연히 벌어진다는 것, ‘신의 섭리가 아니라 무지’(187쪽)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을 작가가 의식한 데서 생긴 효과이자 동시에 그러한 의식을 확인시켜 주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할 때, 너무도 겸손한 것은 아닌가 싶은 작가적 태도의 정체가 확실해진다. 그것은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의 공존을 통해서만 포착되는 삶의 실상을 향해 가는 좁고 긴 길이다.<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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