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6] 후송당 고택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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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0   |  발행일 2019-08-20 제13면   |  수정 2020-03-18
안채·사랑채 나란히 배치…남녀공간 통합·기능 중시한 근대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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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당은 정미(丁未)의병 당시 청송 의병부대인 산남창의진에서 활동한 후송 조용정이 지은 집이다. 가로로 긴 전체의 모양새가 큰 굴곡없이 나즈막한 뒷산과 닮아있다.

양반제가 흔들렸다. 상업자본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부농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항과 더불어 서구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조선 말 우리사회의 모습이다. 급변하는 사회였다. 근대문화의 유입은 정치, 사상,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변화를 가져왔고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로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붉은 벽돌과 유리, 슬레이트 등의 자재가 도입된 것이 이 시기다. 전통한옥의 공간구성과 건축형식을 따르면서 일식주거 및 양식주거의 장점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절충하는 한옥이 건축되었다. 욕실과 변소가 집 안으로 수용되는가 하면 공간으로 표현되던 엄격한 위계와 남녀유별이 희석되었다. 변화하는 사회상황이 우리의 생활패턴을 바꾸고 주택공간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집이란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민족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누적된 결과이므로, 당시 우리의 집은 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종래의 질서와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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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당 사랑채는 정면 4칸, 좌측면 4칸, 우측면 2칸으로 비대칭적인 ‘ㄷ’자 평면을 갖고 있다. 특히 안채와 좌우로 나란히 배치돼 남녀공간의 통합과 기능을 중시한 근대한옥의 건축 경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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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이뤄진 후송당 안채의 모습. 종도리 밑쪽에 ‘단기4280년상량’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한 차례 소실됐다가 1947년 다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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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양리 신창마을 입구에 서 있는 후송의 행적비. 행적비 오른쪽 숲속에는 후송이 아버지의 효행을 기려 세운 효자각이 있다.
항일의병운동 헌신한 조용정이 건립
부친도 을미사변나자 의병활동 참여
안채 부엌문 옆 태극문양은 애국 상징
전통한옥과 달리 욕실·변소 내부 수용
동선도 안마당서 사랑채로 곧장 출입

#1. 창양의 일송과 후송

19세기 말, 충의참봉(忠義參奉)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일송(逸松) 조규명(趙圭明)이라는 사람이 있다.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이자 남포(南浦) 조순도(趙純道)의 11세손이다. 그는 1860년 1월6일에 태어나 청송 안덕면 문거리에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금부도사 조성욱(趙性旭)으로 인심 좋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조규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예의범절이 바르고 부모는 물론 이웃 어른들을 섬기는 마음씨가 깊어 ‘하늘에서 내린 효자’라 불렸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는 김도화(金道和)가 이끄는 안동의진(安東義陣)에 들어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1896년 3월 경북도 북부지역의 연합의진이 감행한 상주 함창의 태봉전투(胎封戰鬪)에서 패한 뒤 은거를 택한다. 그가 이거한 곳이 청송 현동면 눌인천(訥仁川)가의 창양리(昌陽里), 빛이 넘치는 땅이었다. 이후 마을은 새로운 창양이란 뜻에서 신창(新昌)이라 했다.

일송의 아들은 후송(后松) 조용정(趙鏞正)으로 고종 신묘(辛卯)년에 태어났다. 그 역시 일찍부터 의술을 익혔으며 의정부찬정궁내부주사(議政府贊政宮內部主事)를 제수 받았다. 그는 가난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덕행으로 원근에 명성이 높았다. 또한 1907년 정미(丁未)의병 당시 청송의 의병부대인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에 참여해 활동했다. 대구로 나가 무기를 구해오고 집에서 직접 실탄을 만들어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그의 의병활동은 실로 역동적이었다고 전한다.

일송이 창양리로 들어왔을 때 후송은 아버지를 위해 일송정(逸松亭)을 지었다. 일송은 전쟁터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음을 후회하면서 일송정에서 독서로 소일하다 1935년 9월29일 세상을 떠났다. 그 즈음 후송은 일송정 아래에 집을 지었다. 후송당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교육에 남다른 뜻을 품었던 후송은 광복 후 현동에 학교를 세웠다. 이후 후송의 아들인 계송 조한성이 후송당의 부동산 일부를 학교를 위해 내놓았고 1980년에는 후송의 손자인 조창래가 부동산 전부를 학교에 기부했다.

#2. 후송당

커다란 능수버들이 수려하고도 처연하게 서 있는 마을 입구에는 ‘창양리 신창마을’이라 새긴 표석과 ‘함안조씨 세거지’라는 표석, 그리고 후송의 행적비가 있다. 그 오른쪽 숲속에는 후송이 아버지의 효행을 기려 세운 효자각이 있다. 마을 앞은 다소 넉넉한 들이다. 뒤에는 낮은 산이 큰 굴곡 없이 부드럽게 흐른다. 그 가운데에 후송당이 자리한다. 가로로 긴 전체의 모양새가 들과 산을 닮았다. 후송당 솟을대문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독립운동 유공자의 집이라는 의미다. 정면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자리한 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로 솟을대문 좌우에 방과 창고, 변소 등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 담장에는 근래의 것으로 보이는 사주문이 있다. 대문간 오른쪽에는 5칸 규모의 곳간채가 있는데 ‘후송당민속박물관’ 현판을 달고 있다.

솟을대문 앞에서 사랑채가 정면으로 보인다. 사랑마당에 서 있는 두 그루 향나무 뒤로 ‘후송헌(后松軒)’ 현판이 고개를 내민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좌측면 4칸, 우측면 2칸으로 비대칭적인 ‘ㄷ’자 평면을 갖고 있다.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좌, 우 익사가 있다고 이해하면 쉽다. 정면의 가운데 2칸이 대청으로 미세기 유리 창문이 달려있다. 좌익사에는 2칸의 작은사랑과 마루, 고방을 두었고 우익사는 2칸의 큰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익사의 사랑방 뒤쪽에는 원래 가마솥이 달린 욕실과 변소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사랑채 종도리 밑면에 ‘소화 10년 을해 7월8일 갑인 기시 정초(定礎), 동월 18일 갑자 사시 입주(立柱), 동월 21일 정묘 진시 상량’이란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유리창문을 설치하고 욕실과 변소를 건물 내부에 수용했던 것은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가옥이 변천하는 모습을 알려준다. 이 외에도 뒤쪽에 두 칸의 초가 창고가 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가 열려있다. 기단은 1단으로 낮고 누하주도 짧은 편이며 비교적 좁은 돌계단이 사랑채 툇마루의 한가운데로 오른다. 대청의 배면과 좌익사의 전면과 배면, 우익사의 배면에도 툇마루와 쪽마루를 놓아 동선을 연결한다. 마치 복도처럼 이어진 툇마루의 발달은 방으로의 진입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양 익사로 인해 대청의 배면은 작은 중정이 된다. 중정은 집 뒤편의 낮은 야산을 마주본다. 그 산중턱에는 조용정이 아버지를 위해 지은 일송정이 있다.

사랑채의 왼쪽에는 중문간채가 자리한다. 정면 7칸, 측면 1칸에 우측 뒤로 2칸을 더 달아내어 안뜰을 감싸는 ‘ㄴ’자형 평면이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과 마구간, 방앗간,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3단으로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사랑채의 누하주 높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사주문 앞에서 바라보면 중문간채방의 쪽마루와 사랑채의 툇마루 선이 같은 소실점으로 흘러 전체적으로 간잔지런한 이미지를 준다. 중문간채와 사랑채 사이에도 문이 있는데 문설주에 ‘가효국충(家孝國忠)’이라 새긴 세로 편액이 걸려 있다.

중문을 통과하면 아담한 마당 너머 3단의 기단 위에 수평으로 안온하게 앉은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종도리 밑쪽에 ‘단기4280년상량’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광복 후인 1947년에 다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마루방, 윗방, 대청, 안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엌을 제외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측면과 배면에도 쪽마루를 둘렀다. 안채 부엌문 옆에는 태극 문양의 구멍이 조각되어 있다. 일송에서 후송으로 이어지는 애국의 상징이다. 안마당은 안채와 중문간채, 그리고 사랑채의 좌익사에 둘러싸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전후가 아닌 좌우로 나란한 배치형식이며 안마당에서 사랑채로 곧장 출입할 수 있는 동선 구조다. 이러한 건물 배치와 동선은 남녀 생활공간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반가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남녀공간의 통합과 기능을 중시한 근대한옥의 건축 경향을 따른 것이다. 후송당은 1984년 1월10일 국가민속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보고서에 따르면 ‘당대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사상과 기술, 사회, 경제적인 배경 등의 제반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역사적 증거물을 잘 반영하고 보전하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편 상, 문화재관리국, 1985. 대구경북 근대한옥에 관한 연구, 이성규, 2011.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공동기획지원: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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