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1] 영화에 빠진 구미의 소년, 그리고 ‘유랑’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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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1   |  발행일 2019-08-21 제13면   |  수정 2019-08-21
32년 짧은 삶에도 큰 족적…무산계급영화 제작 새지평 열어

◆시리즈를 시작하며= 일제강점기 고통받는 조선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천재 영화감독’. 32세 나이로 요절한 구미 출신 김유영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영화감독이면서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한 그는 초창기 한국영화사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참담한 현실과 저항정신을 담은 작품을 잇따라 연출해 당시 무산계급영화 제작 열풍에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 최초 순수문학단체인 ‘구인회’ 결성과 국내 첫 영화제 창립을 주도하는 등 한국 문화·예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영남일보는 짧지만 강렬했던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10차례에 걸쳐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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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고아읍 원호초등 뒤편에는 김유영 감독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그가 연출한 유랑(1928), 화륜(1931), 애련송(1939), 수선화(1940) 네 작품의 스틸컷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김 감독은 1908년 9월22일 구미 고아읍 원호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예술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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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소년, 영화와 마주하다

독립된 조국을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 있다. 1908년에 태어나 1940년에 생을 마감한 김유영(金幽影), 그의 삶이다. 1908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서 3년 후이고, 1940년은 광복이 이루어진 1945년에서 5년 전이 아닌가. 고작 32년을 살았을 뿐인 김유영의 세상은 일제강점기 하의 대한제국이 전부였다.

김유영은 선산군 고아읍 원호리 12번지에서 선산김씨 김현묵의 4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때 김유영은 아직 김유영이 아니었다.

“아들아, 네 이름은 영득이다. 영화 영(榮)에 얻을 득(得). 이름처럼 살았으면 싶구나.”

집안은 뜨르르했다. 유서도 깊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는 김유영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순조롭게 성장했고 공부에도 막힘이 없었다. 김유영은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데 이어 대구공립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김유영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독서회 조직이었다. 관심만큼 재능도 있었다. 김유영이 짓는 글은 늘 관심을 받았다. 그런 김유영에게 더 큰 세상이 펼쳐졌다. 서울에 있는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로의 전학이었다.

그곳에서 김유영은 영화에 빠져들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활동사진에 심취했던 김유영에게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 같은 서울의 극장들은 보고(寶庫)나 다름없었다.

“예명을 지어야겠어. 예술인다운, 영화인다운 이름으로.”

이때 김유영은 비로소 김영득에서 김유영이 되었다. 그윽하고 검다는 뜻의 유(幽)와 그림자와 환상이라는 뜻의 영(影)이었다. 그렇다고 문학을 버린 건 아니었다.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25년, 김유영은 대구에서 ‘여명’을 발행하고 있던 숙부 김승묵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원고 하나를 내밀었다. ‘꽃다운 청춘’이었다. 김승묵은 조카의 소설을 흔쾌히 활자화했다. 꿈을 향한 첫발이었다.

#2. 질긴 인연의 시작, 카프(KAPF)

“영화는 문학과 달라.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사람이 필요해. 사람 속으로 들어가야 해.”

영화와 사랑에 빠진 김유영은 바로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막 구성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입했다. 1927년, 만 나이 19세 때의 일이었다.

‘조선영화예술협회’는 1927년 3월에 조선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던 인물들이 한데 모여 만든 단체였다. 문단에서 이름난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 수출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구태의연한 신파극에서 탈피할 것, 지식을 갖춘 신인을 발굴할 것, 영화촬영소를 설립할 것, 영화 각본을 검토하고 연구할 것 등을 활동 내용으로 삼았다. 영화계의 중진이었던 이경손과 안종화, 이우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곧이어 ‘영화인회’도 조직되었다. 영화인회에는 심훈, 나운규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름을 올렸다.


1908년 선산군 고아읍 원호리서 출생
소설가·시나리오 작가 등 다방면 재능
1925년 대구서 소설 ‘꽃다운 청춘’ 출간

경성보성학교 전학후 영화에 본격 심취
19세 나이에 ‘조선영화예술협회’ 가입
‘영화인회’연구생으로 이론·연기 공부
첫 작품 ‘유랑’ 흥행 실패했지만 무게감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현실 주로 그려



“유영, 영화인회에서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소식 들었어?”

“듣다마다. 신청까지 마친 걸.?”

무려 200여명의 지원자가 몰린 가운데 어렵사리 20명이 뽑혔다. 김유영도 포함되었다. 김유영은 본격적으로 영화이론, 분장기술,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태풍처럼 휩쓸기 시작했다. 배우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수려한 용모에 시나리오 습작과 연출 쪽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연기실습에서도 두드러졌다. 활동이 김유영을 중심으로 돌아갈 정도로 김유영의 역량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김유영은 곧 고민에 빠졌다.

“뭔가 부족해. 이런 게 전부가 아니야.”

당시 조선 영화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뜨거운 상황이었다. 우선은 1926년에 개봉된 ‘아리랑’과 주연배우였던 나운규의 등장이 뜨거운 이슈였다. 아리랑은 저항의식을 내포한 항일영화이자 민족영화로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을뿐더러 대중으로부터도 사랑받은 작품이었다. 한 편에선 급진적인 견해를 가진 영화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영화를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투쟁하는 데 필요한 예술도구로 보는 시각이었다. 바로 1926년 1월에 준기관지 ‘문예운동’을 발간함으로써 그 성격과 활동을 표면화시킨 카프(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였다. 이름난 문필가였던 임화를 주축으로 서광제, 조경희 등이 속해 있었다.

뜻과 뜻이 부딪치는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김유영은 카프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 두 뜻이 충돌했을 때도 김유영은 카프의 편에 섰다. 즉 카프 멤버들이 안종화를 축출하고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장악했을 때 김유영도 힘을 보탠 것이다.

이후 조선영화예술협회는 카프에 소속되었고 체질 개선에도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김유영이 그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1928년 1월, 이제 막 스물을 넘긴 김유영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김유영. 감독을 맡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소.”

#3. 김유영의 첫 영화이자 카프의 첫 영화, 유랑

“작품은 이종명의 것이겠군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명은 조선영화예술협회의 간사였고, 1월5일부로 중외일보에서 ‘유랑’ 연재를 시작한 터였다.

“좋습니다. 해봅시다.”

진행은 일사천리로 이어져 1월8일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한 달간에 걸친 촬영의 끝을 2월10일에 ‘동아일보’가 기사화했다.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 유랑을 촬영 중이던 바, 남한산성과 양주 등의 로케이션을 마치고 영화가 완성되었다. 원작 이종명, 각색 김영팔, 감독 김유영, 촬영 한창섭, 주연 임화·조경희, 조연 차남곤·서광제·강경희·전장수·추용호·장연숙-

그리고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4월1일, 유랑은 개봉을 맞이했다. 김유영이 드나들던 바로 그 단성사에서였다. 김유영의 가슴속에 복잡다단한 감정이 휘돌았다. 초조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것이 갈증이 일었다.

“나에게만 처음이 아니잖은가. 카프의 이름이 걸린 첫 영화이기도 하니.”

드디어 영사기가 돌기 시작했고 흑백의 영상이 흘러갔다.

유랑은 고향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떠났던 이영진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영진이 없는 동안 땅을 빼앗긴 부모는 북간도로 사라진 뒤였다. 이에 상심한 영진이 다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우연히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노인을 만나 그 집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노인의 딸 순이와 사랑에 빠진 영진은 고향에 눌러앉기로 결심하고 야학을 시작한다. 비방이 빗발치고 냉소가 쏟아졌지만 열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부호가 나타나 순이의 집에 준 빚을 빌미로 외아들인 바보 윤길과의 혼례를 강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절망한 순이는 죽기로 작정하고 혼사 전날 밤, 눈 쌓인 산성으로 오른다. 뛰어내리려던 찰나 영진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영진과 순이, 노인은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기대가 컸지만 평이 극명하게 갈렸다. 프롤레타리아 농민의 비애가 잘 드러났다는 호평과 나운규의 ‘아리랑’을 모사했을 뿐이라는 악평이었다. 흥행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랑이 가진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무산계급을 다룬 영화가 전국적으로 제작될 수 있도록 묵직하게 진동한 까닭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한국영화감독론, 김수남. 향토작가연구 ; 김유영의 삶과 영화 세계, 이강언. 유실된 카프 영화의 상징 ; 김유영 론, 김종원. 카프 영화와 프로키노의 전개과정 비교연구, 이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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