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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의 魂 樓亭 .5] 동부리 여남강당과 도항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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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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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여년 전 신라 땅에 정착한 영양 남씨 시조 南敏 기리는 곳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여남서원’이 훼철된 이후 남민의 후손들은 1920년 시조를 기리기 위해 여남강당을 세웠다. 여남강당은 1985년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 76호로 지정됐다.
영양남씨들의 재실인 도항재. 최초 건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1968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각지에서 온 후손들이 이곳에 모인다.
1천200여년 전, 폭풍 속을 표류하던 이국 사람이 이 땅에 들어왔다. 그가 이 땅에 정착하기를 원하자 왕은 그에게 성과 이름을 주고 영양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 그의 이름은 남민(南敏), 그로부터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시작되었다. 하나의 뿌리로부터 뻗어나간 가지는 튼튼하고 장대했으며 시대와 상황이 요청하는 의를 행함에 결단력이 있었다. 영양의 중심인 영양읍에 남민의 묘가 있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여남강당(汝南講堂)이 있고, 영양남씨들의 재실인 도항재(道項齋)가 있으며 지금도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천년이 더 지나도록 그를 기리는 후손들의 마음은 끊이지 않았다.

#1. 영양남씨 영의공 남민

남민은 본래 당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다. 신라 경덕왕 14년인 755년,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가던 중 태풍은 만난 그는 현재의 영덕 축산도(丑山島)에 표착하게 된다. 그는 당나라로 돌아가는 대신 정착하여 살기를 희망하였고, 경덕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당나라 현종(玄宗)에게 알려 허락을 받았다. 경덕왕은 그가 여남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 성을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의공(英毅公) 시호와 함께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영의공의 아들 김석중(金錫中)도 아버지 사신일행과 동행했다가 함께 정착했다. 이름은 남익(南翼)이며 검교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영양군(英陽君)에 봉해졌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남민의 후손 3형제가 영양, 의령, 고성 등 3개의 본관으로 갈라진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영양남씨는 그렇게 가지를 뻗어나갔다. 조선시대에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부마 4명, 일등공신 4명 등이며 대과 급제가 183명, 무과급제는 문과급제의 배가 되었다고 한다. 소론의 거두 남구만, 대사성 남현로, 연산군에게 선정을 일깨웠던 남세주, 학자 남사고, 여류 독립운동가 남자현 등이 모두 남민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생몰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묘는 ‘일월산 부용봉(芙蓉奉) 아래 도항동(道項洞)’에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선조 초에 그의 묘는 실전되었다. 정확한 연유는 전해지지 않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이후 숙종 원년인 1675년에 지금 군청의 북쪽 영산(英山) 아래 산기슭에 단을 쌓고 단사(壇祠)를 지었다고 한다. 보다 더 잘 알려진 사실로는 숙종 3년인 1677년에 시조를 향사하기 위해 영산 아래에 향현사(鄕賢祠)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민은 원래 당나라 봉양부 여남 사람
755년 日 사신 다녀가다 영덕에 표착
후손들 1677년 향현사 건립 시조 향사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1920년 ‘여남강당’ 지어 선조 모셔

‘도항재’는 재실…1968년 중수 기록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
집안 행사때 전국의 후손 모이는 곳



향현사에서의 향사는 10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리고 순조 3년인 1830년에 유림의 공의를 거쳐 서원으로 승격되어 ‘여남서원(汝南書院)’이라 했다. 이는 당시 각지에서 서원을 설립하여 선현을 제향하고 강론처 및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던 풍속에 자극된 것으로 영양남씨 자손들과 영양현의 바람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다. 여남서원은 강당을 중간에 배치하고 사당은 뒤에 두었으며, 전면에는 2층의 문루를 두었다고 한다. 서원은 강학과 선비들의 모임터로 널리 이용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여남서원이 훼철되던 해 ‘사판(祠版)을 도항동(도뭇골) 재사의 후묘(後廟)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재사의 후묘는 보차재(報車齋) 또는 추모재(追慕齋)라 하였고, 당은 도목당(道睦堂)’이라 했다고 한다. 영양의 지명 유래에 ‘도항동에 영양남씨들이 도항재라는 재실을 지어 선조를 모셨다’는 내용이 있다. 폭풍 속에 이 땅에 들어와 이 땅의 사람으로 뿌리를 내린 이래 그를 기리는 후손들의 노력은 거의 끊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남강당 비각 내부 비석에는 ‘당안렴사증시영의남공민유허’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남강당 현판.
도항재 현판.
여남강당 좌측 뒤쪽에 위치한 비각. 정면 처마도리에 ‘여남(汝南)’이라고 힘차게 쓴 커다란 글씨가 눈길을 끈다.
#2. 여남강당

남민의 후손들은 1920년에 다시 시조를 기리는 건물을 지었다. 여남강당이다. 영양군청의 맞은편, 고샅길 하나 건너 지척인 자리다. 여남강당이 자리한 마을은 여남 혹은 여남몰이라 불린다.

여남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장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에 정문인 사주문이 서있다. 좌측에는 주사건물이 있는데 담장으로 구획하고 협문을 달아 출입하게 했다. 강당건물은 너른 마당을 앞에 두고 남쪽을 향해 서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바닥을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고 주춧돌은 자연석이며 기둥은 모두 방형이다. 건물의 가운데에는 2칸 마루방을 두고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구성했다. 전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마루방 정면에는 네 짝 사분합 들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했고, 배면에는 아래에 머름을 꾸미고 두 짝 여닫이 판문을 달고 판벽으로 마감했다. 좌우 온돌방 정면에는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의 뒤쪽 칸에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온돌방의 아궁이는 각 방의 전면 기단에 두었고 굴뚝은 배면에 세웠는데 붉은 벽돌을 방형으로 쌓아 처마선보다 높게 했다. 마루방의 좌측 처마도리에 ‘여남강당’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의 좌측 뒤쪽에는 비각이 자리한다. 비각은 원형주초에 원기둥을 세운 사방 한 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사방에 홍살문을 둘렀고 기둥 상부는 단청이 되어 있다. 맞배지붕 건물로 홍살문이 둘러 있고 기둥 상부에 단청을 하였다. 비각 안의 비석에는 ‘당안렴사증시영의남공민유허(唐按廉使贈諡英毅南公敏遺墟)’라고 새겨져 있다. 정면 처마도리에 ‘여남(汝南)’ 편액이 걸려 있는데 힘차게 쓴 커다란 글씨가 인상적이다. 강당의 우측 뒤쪽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두 칸 건물이 서있다. 여남강당은 1985년에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 7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곁의 주사 건물에도 현재 사람이 살고 있다.

현재 남민의 묘는 영양읍 동부리의 도뭇골(도항동)에 자리하고 있다. 1958년 후손들이 옛 기록에 따라 선조 남민의 묘라고 전해오는 곳을 발굴해 보았는데 그곳에서 신라시대의 석관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묘역을 조성하고 단사는 폐하였다. 매년 음력 10월10일마다 향사하고 있으며 지금도 시제 때면 전국 각지에서 후손들이 모여든다. 그날 영양읍의 숙소와 식당은 남씨 후손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3. 도항재

여남몰과 바로 이웃한 북동쪽에 재궁몰이라는 마을이 있다. 영양남씨들의 재실인 도항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항재의 최초 건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1968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만 있다.

도항재는 정면의 대문채에 좌우측의 동재와 서재가 이어진 ‘ㄷ’자형 건물과 ‘ㅡ’자형의 재실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대문채 옆으로 낸 한식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전체를 감싸고 있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이며 좌우는 온돌방이다. 대청방의 정면에는 네 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았고 배면에는 두 짝 판문을 달았다. 좌우 온돌방에는 정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의 뒤쪽 칸에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기단은 시멘트모르타르로 계단 형식으로 높게 축조했다. 주춧돌은 자연석을 썼고 전면에는 두리기둥,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처마도리에는 ‘현덕사(顯德祠)’와 ‘예인재(禮仁齋)’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간은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도항재’ 현판을 단 솟을대문이 서있다. 대문 좌측의 1칸은 서재와 연결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2칸의 방 2개로 구성되어 있다. 방의 배면에는 4칸 모두에 미닫이 창문을 달아 놓았다. 대문 오른쪽은 2칸 규모의 방이다. 우측 방 뒤로 동재가 연결되는데 2칸의 부엌과 1칸의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부엌 배면에는 근래에 증축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붙어 있다. 동재와 서재 모두 기단을 자연석과 시멘트모르타르로 축조 마감했으며, 주초는 자연석, 기둥은 모두 사각이다.

도항재는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 각지에서 온 후손들이 모이는 곳이다. 집안의 회의가 열리기도 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한다. 남씨의 본관은 문헌에 57본에서 60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선조 때 편찬된 일종의 백과전서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남씨를 조선의 20대 명벌(名閥)로 전하고 있다. 지금도 전국에 산거(散居)한 남씨들은 역사적인 견고한 뿌리를 인식하며 대동단결(大同團結)에 노력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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