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LP로드] 뮤직박스 ‘행복의 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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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4   |  발행일 2019-10-04 제41면   |  수정 2019-10-04
분위기 따라 강약조절 음악·멘트…4人4色 추억의 DJ와 행복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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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대구에서 가장 연배가 오래된 ‘미스터 괴성 DJ’로 유명한 김병규씨. ②굵직한 저음과 따스한 멘트가 인상적인 낭만 DJ 김윤동씨. ③ 현재 ‘행복의 섬’을 이끌어가면서 틈틈이 음악 진행도 병행하는 이재진 DJ. ④ 초저녁 첫 무대를 맡아 예전 음악다방 스타일의 깔끔한 진행이 좋은 이창훈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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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지역의 대표적 음악감상실 중 하나였던 대구 동성로 ‘행복의 섬’의 부활을 꿈꾸며 동촌유원지에서 리오픈된 뮤직박스 ‘행복의 섬’ 입구 전경. 입구를 들어가면 정면에 예전 음악다방 상징이었던 뮤직박스가 손님의 감수성을 더 세게 자극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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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섬’ 뮤직박스 옆 상단에 출연 DJ 명단이 아크릴 명패로 부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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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인기 안주인 멕시칸사라다와 돈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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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겨움과 즐거움을 위해 비치해 놓은 각종 가발과 가면, 그리고 교련복 등.

시험이 필요없는 짧디짧은 유년시절은 그 자체가 하나의 행복한 섬이다. 하지만 세파에 시달려야만 하는 어느 날부터는 스스로 ‘자기 몸 안에는 행복한 섬이 없다’고 믿는다. 그 심리가 패배의식으로 건너가고 스스로를 루저로 규정해 버리기도 한다. 퇴근과 다시 출근 사이, 그 사이에 행복한 섬을 이 도시에 만드는 이들이 많다. 그 섬에는 다양한 술과 담배, 그리고 음식과 음악, 그 사이에 춤 등이 모여든다.

연륜·하모니·파워·정확함 추구 4인방
발바닥까지 전해지는 리얼사운드 장착
골든·비골든타임 광기·평상심의 조화
지역 DJ 가장 선배격 김병규의 노련미
로미오줄리엣 가면·교련복·가발 비치
객석은 웃음 반 흥겨움 반으로 기분 업
멕시칸 사라다·돈가스 안주 안성맞춤

지난 주 금요일(9월27일) 밤. 조금은 추적거리는 버전의 이색 뮤직클럽을 찾았다. 최근 대구 동촌유원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뮤직박스 ‘행복의 섬’(이하 행섬). 추억의 4인방 DJ가 본방사수를 하고 있다. 그 시절 이 유원지 클럽들은 다들 후줄근하고 축축했다. 그런데 행섬은 대중성과 전문성을 겸비했다. 일단 사운드가 상당하다. 극장식 돌비시스템을 구동하기 위해 10개의 수제 스피커를 홀 사방에 배치했다. 그래서 발바닥까지 사운드가 리얼하게 전해진다. 김밥집에 와서 퀸의 실황공연을 접한 기분이랄까.

DJ 김병규·김윤동·이재진·이창훈. 넷의 음악은 각기 다르다. 사인사색이다. 김병규는 연륜, 김윤동은 하모니, 이재진은 파워, 이창훈은 정확함을 추구한다.

최근 중년들에게 인기짱인, 그러면서도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박군의 ‘한잔해’, 그러다가 유튜브 사상 뮤직비디오 최다 조회수 50억뷰를 돌파하며 팝 차트 새 역사를 쓴 푸에르토리코의 뮤지션 루이스 폰시가 히트친 ‘데스파시토’와 산타나의 ‘삼바파티’를 건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다.

밤 9시30분부터 2시간은 힘이 솟구치는 타임이다. 소찬휘의 ‘진달래꽃’, 장윤정의 ‘사랑아’, 코요테의 ‘순정’, 우연이의 ‘우연이’, 도시의 아이들의 ‘선녀와 나무꾼’, 비지스의 ‘Tragedy’…. 예전 콜라텍, 소주방, 디스코텍 등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의 빠른 템포의 디스코 명곡이 홀 바닥에 구슬처럼 돌아다닌다. 그런데 넘칠 것 같으면 DJ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준다. 그게 행섬의 최고 미덕.

◆DJ 라이프스토리

자그마한 몸집의 이재진 DJ. 그는 오래 산업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동구 불로동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무렵 옛 만경관극장 바로 옆에 있었던 음악다방 ‘어제 그 다방, YESTERDAY’에 견습 DJ로 들어간다. 이태완, 최인식, 이정화 등 5명의 DJ가 있었다. 보조라서 오후 5시 멘트없이 뮤직박스 안에서 이런저런 판을 돌렸다. 일신·유신학원 근처 다방가를 많이 돌아다녔다. 유신다방, 영광다방, 남부정류장 근처 신일다방…. 그때는 삐삐시절이었다. ‘삐삐 치신 분 전화받아라’는 안내 멘트를 많이 날렸다. 당시 선풍을 일으켰던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는 그가 즐겨 낭독하던 시였다. 몸이 아프고 말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다운된 날은 긴 곡을 내보낸다. 20분에 육박하는 레인보우의 ‘Catch the rainbow’, 그리고 국내곡 중 엄청 긴 곡은 20분에 달하는 김수철의 ‘완성의 꿈’.

그는 서둘러 직업훈련원에 들어가서 전기기술자의 삶으로 터닝한다. 24세에 수성못 옆 수성랜드 놀이기구 유지보수 요원으로 투입된다. 당시 고공파도타기, 바이킹, 다람쥐통 등 모두 13종의 놀이기구가 있었다. 그중 최고 명물은 우방랜드(현 이월드)에조차 없었던 ‘디스코팡팡’. 그는 낮에는 고장난 기구를 고치고 밤엔 디스코팡팡 전속 이벤트 DJ를 병행했다. 탬버린처럼 생긴 대형 라운드 박스에 앉은 손님을 여러 버전의 요동을 가해 바닥에 넘어지게 만드는 것도 그의 몫. ‘얼굴을 가리지말고 아랫배를 가리세요’ 등 짖궂은 농담을 적재적소에 잘 집어넣었다. 음악다방 DJ 때 터득한 유머러스한 입담이 큰 도움이 됐다.

항상 음악다방에 대한 꿈을 못 버렸다. 서른 즈음에 일을 저지른다. 2001년쯤 만경관 옆 예전 그자리에서 같은 상호의 음악다방을 오픈한 것. ‘음악다방 DJ의 부활’이란 문구가 적힌 현수막도 내걸었다. 커피, 식사, 술 등이 가능한 레스카페형 음악다방이었다.

이창훈, 강병욱 등 4명의 DJ를 풀로 돌렸다. 이때 동성로 로데오·야시골목 전성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사업은 쉬 무너지고 만다. 만경관이 멀티플렉스 버전으로 리모델링 되는 바람에 손님이 격감된 탓이다.

그는 한국종합유원시설협회 전기부문 검사원이었다. 유원지 등의 놀이기구는 연 1~2회 정기점검을 받아야 했다. 그 일은 그의 주업무였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 인천 월미도 등 전국 30여 군데 랜드를 순회했다. 그러면서 하절기 시즌엔 주요 해수욕장 디스코팡팡 DJ로도 활동했다.

40세 때 새로운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동성로 갤러리존 옥상에 지역에선 처음으로 디스코팡팡을 설치한다. 중고 기계 한 대를 2억5천만원에 구입을 했다.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풀로 돌렸다. 김지훈, 문용일 등 아는 DJ 5명을 가동했다. 많을 때는 하루 1천명이 이 기구를 이용했다. 그런데 돈이 된다 싶으니 대백앞, 중앙파출소, 야시골목 등 시내 곳곳에 디스코팡팡이 증설된다.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결국 1년6개월 만에 일을 접는다.

2017년 4월1일. 한 때 달서구에서 통기타라이브클럽 ‘솟대마을’을 운영했던 하상운 사장이 동촌유원지에 솟대마을을 론칭했다. 그 공간에서 1기 행섬이 출발했다. 하지만 너무 DJ 위주로 운영되다 보니 영업이 아주 저조했다. 새로운 피가 필요했다. 하 사장이 이재진 DJ에게 러브콜을 날린다. 그래서 유원지 행섬 2기가 지난해 2월 재오픈식으로 출발된다. 1기와 버전이 달랐다. 철저하게 손님 위주이고 철저하게 음악의 완성도 위주로 갔다. 그리고 상황별 필살기 곡을 투입했다. 손님은 대만족이었다. 그 감각은 DJ의 전문영역이었다. 여느 업소의 밋밋한 장식용 스트리밍 뮤직으로는 행섬을 이기기 힘들었다.

◆적절한 제약과 광기의 조화

테이블마다 액세서리용 색상가발이 놓여 있다. 그리고 헐크와 로미오줄리엣 가면, 섹시한 이벤트용 앞치마, 또 추억의 교련복도 군데군데 걸어 놓았다.

몇가지 운영원칙을 정한다. 광기와 평상심의 조화였다. ‘너무 고상해도 너무 천박해도 진다’고 여긴다. 그래서 골든타임과 비(非)골든타임의 음악에 대한 강약조절을 확실히 한다. 밤 9시 이후부터 자정 직전까지는 너무 음악적이고 심각한 건 금물. 가능한 흥겹고 유쾌하고 재밌게 간다. 너무 발라드하고 정적인 음악도 자제키로 했다. 록·댄스뮤직 중심으로 깔았다.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이장희의 ‘그건 너’,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윤수일의 ‘아파트’,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 그렇게 5곡 정도 빠른 곡이 나가면 한 곡 정도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 애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 등과 같은 슬로곡으로 깐다. 하지만 이곳은 유흥업소가 아니기 때문에 가급적 사교춤을 홀에서 못 추게 유도한다. 흥이 나도 제 부스에서 스탠딩 댄스를 추게 한다. 또한 손님에겐 절대 마이크를 넘기지 않는다.

너무 젊은 손님이거나 너무 연로한 분이 오면 ‘여기 음악이 안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고지해 준다. 역시 가장 많은 팬을 확보한 김병규와 김윤동은 남들이 잘 모르는 음악을 유튜브 등을 검색해 잘 깔아준다. 지역 DJ 중 가장 선배격인 김병규는 역시 노련미가 돋보인다. 객석이 원한다 싶으면 갑자기 송가인의 ‘한많은 대동강’을 조커처럼 내놓는다. 그럼 좌중은 박장대소, 다들 자지러진다. 김병규는 혼자 ‘그럼 그렇지’라면서 능청스러운 미소를 날린다. 늘 곡이 끝나면 즉시 ‘여기는 행복의 섬’이라는 멘트를 징처럼 박아준다. 가장 묵직한 보이스를 가진 김윤동은 음악과 음악에 따스한 정감을 얹어준다. 그는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영덕 출신의 이창훈 DJ는 현재 낮에는 탑차를 몰며 많게는 하루 300개 이상 물품을 배달한다. 그도 이재진 DJ와 함께 대학가 음악다방 시절을 보냈다.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근처 핸덱스·몽자르텡·무제, 동성로 행복의 섬·포크니 등을 거쳤다. 10년 전부터 택배기사로 일한다. 땀을 씻지도 못하고 택배 업무가 끝나기 무섭게 오후 7시30분까지 행섬으로 온다. 자기가 여기서 더 행복한 타임을 가져간다. 그의 진행방식이 예전 음악다방 스타일에 가장 적합하다. 가끔 장사익의 ‘비내리는 고모령’, 김창환의 ‘노모’ 등으로 중년을 울컥하게 만든다.

김병규와 김윤동. 지역 다운타운 음악다방·음악감상실 역사를 좀 아는 이에겐 스타급 DJ. 둘은 얼마전까지 대구교통방송 심야 추억의 DJ로 활동해 영업용 택시기사 등 상당한 팬덤을 유지하고 있다. 김병규는 60대, 나머지 세 사람은 50대. 요즘 중년을 위한 음악은 의외로 푸대접을 받는다. 정년과 함께 밀려드는 중년의 고독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 4명의 DJ가 중년의 신바람을 위해 ‘동촌결의’를 한 것이다.

이 공간은 30~50대에게 가장 필이 꽂힌다. 요즘 신세대에겐 절대적으로 신봉되는 EDM이나 랩 뮤직은 여기선 다소 낯설다. 객석은 늘 웃음 반 흥겨움 반. 너와 나는 일시에 ‘우리’로 변한다. 술이 아니라 음악이 만든 매직이다.

불금, 동쪽으로 분출하던 행섬의 열기가 일시에 서쪽으로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동적인 물결이 정적으로 가라앉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DJ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롭다. 이때다 싶어 출출한 허기를 파고드는 추억의 멕시칸 사라다와 돈가스. 대구 동구 효동로 2길 65. (053)939-7737.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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