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22] 야유와 연설의 시대에 詩를 읽는다

  • 최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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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4   |  발행일 2019-10-24 제24면   |  수정 2019-10-24
동지 아니면 적…이분법에 갇힌 우리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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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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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담고 있는 대학의 문학 강의에서 학생들과 시를 공부할 때 나는 브레히트의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와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를 가장 먼저 읽는다. 이 두 편으로 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이들이 시에 대한 시이면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시는 시란 무엇을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가를, 보들레르의 시는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는 낭만주의적인 시인관을 품고 있다. 시인 예술가란 원래 ‘구름 위의 왕자’와도 같고 ‘거인’ 같기도 한 천상의 존재, 고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시인이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창공을 유유히 날던 멋진 바닷새 알바트로스가 선원들에게 잡혀 뱃전에 부려지면 큰 날개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하고 놀림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앞에 전개하여, 현대사회의 시인 예술가 또한 바로 그렇게 시민들의 야유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시인을 ‘지상에 유배된 거인’으로 지칭함으로써 돈벌이만을 척도로 하여 예술과 예술가를 무시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는 어떠한가. 이 시는 서정적 화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를 말해 주는 앞의 세 연에 이어 시인으로서 자신이 언제 글을 쓰는지를 밝히는 다섯째 연으로 끝을 맺는다. 이 시를 몰라도 브레히트를 아는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가 보이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참여하는 시인이다.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에 사는 시인이라면 서정시를 접고 현실 문제를 말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이 시의 주장이다. 그런 시대에는 그런 시가 요청된다는 것, 예술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 브레히트의 생각이다.


브레히트의 시, 히틀러 향한 분노 속 꽃 만발한 사과나무에 도취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 이분법 위에서 선명한 대조 보며
이분법 강조된 현실이 얼마나 강퍅하고 단순한 지 새삼 깨달아



시와 예술이 현실의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익숙하다. 모든 시가 언제나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사정이 달라지지만, 시와 예술의 현실 참여 기능이 아주 오래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문학예술을 통해 지배 이념을 자연스럽게 주입하여 사람들을 교화시키려는 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서부터 시행되어 왔다. 현대문학의 첫 시기를 장식하는 계몽주의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술의 기능을 교훈에서 찾는 예술론이 이러한 사태를 주목한 결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시와 예술의 현실 참여를 말할 때는 약간 차이가 있다. 사회 상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세력에 대한 비판의 도구가 될 때를 주로 지칭하는 까닭이다. 요컨대 비판이라는 방식으로 현실 문제에 관여할 때 참여문학이라고 한다. 브레히트의 시 또한 이런 의미에서의 참여문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바로 그런 까닭에 참여문학에 해당하지만 사정이 단순하지는 않다.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이니 현실 문제를 노래해야 한다’라고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를 따라가며 음미해 본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산다 그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고 그의 얼굴은 깨끗하다.” 행복한 사람이 깨끗한 얼굴과 귀에 거슬리지 않는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산다는 사실은 시인에게 자명한 것이다. 해서 그는 ‘물론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도 안다. 행복한 사람은 그러하고 불행한 사람은 그러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하루하루의 노동이 고달프고 올해의 안녕을 내년에도 기약하기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은 행복하기 어려우며 다른 사람의 호감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용모와 말투를 갖추기 힘들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시가 말하는 깨끗한 얼굴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음은, ‘인간의 조건’(시대의창, 2013)이나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창, 2018) 같은 한승태의 노동 에세이들에서 잘 확인된다.

브레히트 또한 2연에서 같은 맥락의 말을 해 준다. “정원의 나무가 기형적인 것은/ 토양이 나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무를 비난한다 불구자라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행복하지 못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데 불행의 주된 요인은 개인이 아니라 상황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것이 브레히트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푸른 조각배’나 ‘해협의 돛’ ‘예나 지금이나 따뜻한 처녀들의 유방’ 대신 ‘어부의 닳아 빠진 어망’이나 ‘사십대에 허리가 구부러진 소작농’에 시선을 돌린다(3연). 그리고는 ‘시에 운율을 맞추는 일이 겉멋을 부리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고백한다(4연).

이 시의 3·4연은 선명한 이분법을 보인다. 비역사적인(ahistorical) 것과 역사적인 것의 대조가 그것이다. 아름다운 경치가 아름다운 것이나 처녀들의 따뜻한 유방이 따뜻한 것은 저 먼 고대에서나 지금에서나 마찬가지다. 시대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데서 이들은 비역사적인 현상이다. 반면 가난한 어부나 소작농의 상황은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 어떤 시대에는 그 정도가 참혹한 수준에 이르고 또 어떤 시대에는 따로 말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 경우가 미미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이렇게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대조 위에서 브레히트는 마지막 연을 쓴다. “나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꽃으로 만발한 사과나무에 대한 도취와/ 저 칠쟁이의 연설에 대한 분노이다/ 그러나 후자만이 나로 하여금/ 당장에 펜을 잡게 한다.” 시인이 당장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꽃으로 만발한 사과나무가 아니라 어설픈 화가이기도 했던 히틀러의 연설이다. 1939년 나치즘의 부상을 목도하면서 그러한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가 쓰는 글이 서정시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시도 아닐 것이다. 독재자의 연설에 대한 비판의 글이리라.

지금까지 브레히트의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를 훑어보았지만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시대를 넘어서는 생명력을 이 시에 부여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지적하지 않은 까닭이다.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이분법 위에서 선명한 대조를 구사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지만, 이 시의 주제효과가 이분법에 갇혀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칠쟁이의 연설에 대한 분노로 글을 쓴다 해서 시인의 가슴이 분노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내부에는 ‘꽃으로 만발한 사과나무에 대한 도취’ 또한 또렷이 있다. 히틀러에 대한 분노를 유발하는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비역사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가 함께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시의 바탕을 이루는 이분법 자체가 이분법으로 나뉘는 두 가지를 모두 작품에 담는 장치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려 했다면 비역사적인 것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양쪽을 모두 언급하되 한쪽을 부정하고 다른쪽만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도취’와 ‘분노’가 자신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다 한 데서 이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다 하여 진정성이 한층 강화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역사적인 것의 아름다움이 부정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폭을 갖추고 있는 것, 이것이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의 특징을 이룬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가 낭만주의적인 인식을 갖고 상황을 비판하듯이, 이 시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안을 저버리지 않고 현실을 비판한다. 원칙에 대한 고민은 던져버린 채 나와 주장이 같은가 다른가에 따라 사람들을 동지와 적으로 가르는 이분법이 한껏 강조되고 그로부터 생겨난 일방적인 야유와 연설만이 판을 치는 우리의 현실, 이 현실이 얼마나 강퍅하고 단순한 것인지 이들 시를 읽으며 새삼 실감한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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