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방식으로 ‘조선의 옹기’ 만드는 정대희씨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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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09-23   |  발행일 2011-09-23 제37면   |  수정 2011-09-23
“돈 주고 사는 게 어떻게 명품이냐, 상품이지…국내 옹기 99.9%가 안 좋아”
납 섞인 광명단 사용하는 공장식 옹기가 판을 치니 진짜가 진짜로 살지 못해
난 도공들도 이해가 안돼 맘에 안든다고 작품을 깨? 자식 장애 있다고 버리나
20110923
‘상주옹기’ 요장에서 6대째 전통방식으로 옹기를 굽고 있는 정대희씨가 가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대희씨는 1958년 4남3녀 중 넷째(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상주.

어릴 때부터 흙을 만지며 살아온 그는 운명인듯 인생인듯 자연스레 옹기장이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 상주시 이안면 흑암리에 위치한 ‘상주옹기’ 요장에서 6대째 전통방식으로 옹기를 굽고 있다. 2007년에는 경북도 무형문화재 옹기장 후보자로 선정됐다. 당시 아버지 정학봉씨는 경북도 무형문화재 옹기장으로 지정됐다. 그의 집안에 내려오는 옹기 제작의 비법은 납이 섞인 유약인 광명단을 발라 저온에 굽는 방식이 아니라, 전통 잿물을 유약으로 발라 장작가마에서 7박8일간 1천200~1천300℃의 고온으로 구워낸다는 데 있다.


벌거벗었을 때부터 흙을 만지며 자랐다. 학창시절 전교에서 흙으로 만드는 걸로 그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들었던 옹기는 강에서 바다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이 됐다.

쉬운 인생은 아니었다. 전통 옹기를 고집하며 지켜내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

조선시대 때 독은 소 한마리 값이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강점기 때 대량생산의 물꼬가 트였다. 유약이 들어오면서 600~700℃의 낮은 온도에서도 굽히는 옹기가 기계적으로 생산됐던 것이다. 전통 잿물을 유약으로 바른 뒤 1천200~1천300℃의 고온에서 7박8일 동안 구워내는 전통 옹기는 쉽게 굽히고 싸게 팔리는 공장식 옹기 앞에 힘을 잃어갔다. 2000년대 들어 등장하기 시작한 김치냉장고도 옹기산업의 퇴보를 가져왔다.

“그 속에서 어떤 수난과 고통을 맛봤겠어요? 진짜가 정말 진짜로 살아보고 싶어도 가짜가 너무 판을 치니 진짜로 살 용기조차 안 생긴다고.”

우선 금전적인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가마 한가득 옹기를 구워도 다 깨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 다시 굽고, 또 돈을 빌리고…. “10번, 20번 그러고 나면 누가 또 돈을 빌려주겠어요.” 자연 재해로 건물 자체가 폭삭 내려앉는 시련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옹기를 만들겠다는 오롯한 집념이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세상 속에서 없는 걸 꺼내는 게 내 목적이니까. 나는 대한민국으로는 양이 안 차요. 지구상에서 최고, 인간 세상에서 흙을 만지는 데 최고의 자리에 서는 게 내 꿈이에요.”

장애물이 닥쳐 과정이 늦어진 적은 있지만 옹기를 향한 꿈의 진로가 한번도 빗나간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편하게 앉아서 밥 한그릇을 못 먹고 세월가는 게 억울해서 낮잠도 한번 못 자봤단다.

상주에서 6대째 전통방식으로 옹기를 만드는 정대희씨의 옹기 인생은 그랬다.

지난달 28일, 2007년 경북도 무형문화재 옹기장 후보자로 선정된 그를 만나러 상주로 향했다.

흙빛 옹기가 햇빛에 비춰 반짝 빛을 뿜어내던 좁은 골목길을 지나자 그의 작업실이 나왔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개량 한복 차림에 희끗희끗하고 곱슬한 긴 머리칼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희끗한 턱수염과 콧수염도 덥수룩했다.

풍기는 아우라는 마치 도사 같았다. 산속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사는 듯한…. 아니나 다를까 일명 ‘도사’라 불린단다. “옹기도 도(道)지, 뭐”라며 껄껄 웃는다.

◆ 6대째 전통방식으로 굽는 옹기

- 6대째 전통방식으로 옹기를 만들고 있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아버지한테 하나도 안 배웠어요. 그냥 내가 만들었을 뿐이야. 그릇을 한 개 만드는 데 계속 창작에 창작을 거듭하며 찾아내다보니까 어느 경지까지 오른 거지. 우리는 서로 말이 없어요. 시켜도 잘 안 하고. 나도 아들에게 절대 지시를 안 해요. 어차피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사는 거지.”

- 스스로 터득했다고 하셨는데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노하우를 배우면 좀더 쉽게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요.

“기본이야 배우죠. 그 다음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거지. 스승이 자기 마음까지 다 꺼내서 보여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제자가 자기 상상 속에서 뺏어가야 해. 스승의 최고는 제자에게 밟히는 거라. 제자가 스승을 넘어섰을 때 스승은 하늘을 나는 것보다 기분이 더 좋은 거 아니겠어요.”

- 어릴 때 옹기를 하는 아버님을 뵈면 ‘저 경지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위대했지요. ‘과연 내가 저걸 할 수 있겠는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었는데, 열심히 해보니까 되더라고.”


◆ 가장 결정적인 건 불

- 옹기를 굽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흙으로 만드는 것도 매력인데, 흙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내 것이 아니에요. 불이 허락을 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거든. 가장 결정적인 게 불이에요. 불은 욕심낸다고 안 되잖아요. 기다려야지. 근데 숙제는 못풀어요, 평생. 불은 평생에 똑같은 걸 한번도 못 때보거든. 자연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불의 예술이 가장 고귀하지요.”

- 옹기를 가마에 얼마나 자주 굽습니까.

“두달에 한번 정도 구워요. 그중 50%정도 건진다고 보면 돼요.”

- 가마에서 옹기를 꺼낼 때 마음에 안 드는 건 깨버리기도 합니까.

“그냥 둬요. 자기 자식이 장애인이라고 버리지 못하잖아요. 나는 도공들이 자기 작품을 망치로 깨는 걸 이해를 못하겠어. 정이 없다는 얘기잖아. 자신이 혼을 바친 작품이 설사 조금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과감하게 내버립니까. 방송에서 한 개만 깨보라고 해서 연출로 할 때는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깰 이유가 없죠. 못난 것도 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데…. 못난 놈이 있으니 잘난 놈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 광명단을 발라 저온에서 옹기를 굽는 방식은 왜 안 좋다는 겁니까.

“납이 안 좋잖아요. 납을 산화시켜서 구운 게 광명단이에요. 반면 700년 전에 흙으로 빚어 불을 때보니 색이 올라왔어요. 그게 재인 거라. ‘아, 이걸 다 바르면 색깔이 나오겠구나’해서 바른 게 잿물이에요. 재와 흙을 갠 뒤 삭혀서 만들어 바르는 거죠.”

- 가마에서 나온 옹기를 3개월 동안 천천히 건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요.

“그늘에서 수분을 서서히 빼야 해요. 작은 건 더 빨리 건조가 끝나고요.”


◆ 옹기 인생의 9부 능선에 머물고파

- 옹기에 물고기나 거북 그림을 주로 그린다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참 재미있잖아요. 거북을 천마리 만들어놔도 천마리마다 답이 다 있어요. 이야기가 되잖아. 그게 얼마나 매력있는지. 역사 속으로 올라가면 옛날 옹기는 정말 화려했어요. 선조들은 힘없이 살았기 때문에 복되고 건강하게 사는 걸 원해서 상징적인 동물로 물고기와 거북을 접목시킨 이유도 있었죠.”

- 옹기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라면.

“어떤 일이나 다 힘이 들죠. 내가 얻은 답은 고통을 겪은 것만큼 기쁨도 주더라고. 나의 기쁨은 작품이에요. 완성돼 나오면 그걸 접함으로 인해 피로가 다 풀리죠. 마지막날 불때고 나면 잠도 못자서 피곤하지만 그 이튿날 일찍 일어나요. 가마에서 나올 작품이 궁금해서.”

-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옹기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해 주세요.

“99.9%가 안좋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쉽게 산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어요. 무슨 명품이든지 쉽게 못 가지잖아요. 정말 좋은 건 마음으로 가져야지. 최고에 버금가는 명품은 인간이잖아요. 세상에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 어디 있어. 그런데 인간은 인간을 쉽게 가지잖아요. 바로 마음으로. 돈을 주고 가지는 게 어떻게 명품이에요, 상품이지.”

-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옹기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법 한데.

“아직 멀었지. 머지않은 시기에 전시회를 열 거예요. 아직은 준비가 덜 됐지. 내가 100% 만족한 다음에 생애 첫 전시회를 열 계획이에요. 한 2~3년 이내가 되지 않겠나 싶어요.”

- 옹기학교와 옹기박물관을 짓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후손들에게 우리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남기고 싶어요. 작년에 옹기학교를 지어 인력을 양성하려고 국비 60억원가량도 확보해뒀어요. 그런데 늦게 이뤄지는 사업이에요. 10년 후에…. 10년 후면 내가 힘이 빠질 땐데…. 그게 또 불만이에요.”

- 그외 다른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지금 내 옹기 인생의 8부능선까지는 왔다고 생각해요. 정상까지 갈 생각은 없어요. 정상에 가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는 게 운명이니까. 욕심이 있다면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 9부 능선에서 계속 머무르고 싶어요.”


20110923
■‘옹기학’ 기자에게 약식 강의

“조선의 그릇은 만지면 죽는다 했어…氣가 엄청나다는 얘기지

문경찻사발축제는 일본사람에 맞추다보니 그릇에 힘이 없어

陰의 그릇 도자기는 ‘문화’이고, 陽의 그릇 옹기는 ‘생명’이야”


정대희씨는 질문이 필요없는 인터뷰이였다.
옹기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현실태를 술술 풀어냈다. 만나자마자 40~50분간은 인터뷰라기보다는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그릇의 위대함으로 말문을 열었다.


“조선의 그릇은 만지면 죽어요. 그 정도 위력이 있어. 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자기와 맞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조선시대의 후손으로 선조들이 하던 걸 따라해야 할 것 아닙니까. 힘이 있는 그릇, 혼이 담긴 그릇, 기운이 나오는 그릇을 만들어야 될 것 아니냐고. 그런데 못하고 있잖아요. 문경찻사발축제도 이름은 멋진데 못마땅한 면이 있어요. ‘완(わん)이 얼마’하잖아요. 일본 사람 입맛에 맞췄다는 거예요. 일본 사람에게 돈 받는 것에 만족해서 만드는 그릇에는 힘이 없어요.”


그러면서 그릇에 음과 양이 있다는 얘기를 설파했다.
“우리 선조들은 수천년 전에 음과 양의 그릇을 만들었어요. 발효는 양의 그릇이 아니면 안돼요. 콩을 삶아서 냉방에 넣어놓으면 청국장이 안되잖아. 음과 양의 그릇은 완전히 달라요. 흙이 다르고 만드는 방법이 달라요. 그 다음에 성격이 다르고, 구워냈을 때 빛깔이 다르고, 완성됐을 때 기능이 달라요. 하나도 같은 맥락이 없지. 따뜻한 그릇이 옹기, 차가운 그릇이 사기·자기예요. 그래서 내가 ‘도자기는 문화이고 옹기는 생명이다’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다음 화두는 자연스레 발효로 이어졌다.
“된장·고추장을 인간이 만듭니까? 흙이 만듭니다. 옹기가 만드는 거죠. 인간은 발효를 해낼 수 없어요.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은 발효의 천국입니다. 김치가 세계 3대 음식 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김치 저장고의 원조인 옹기의 흔적조차 모른다면 박자가 맞습니까. 전국 대학에 옹기과가 하나 없고 옹기교육장이 없고….”

그의 깊고 쓴 한숨이 살포시 전해졌다.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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