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스스로 창끝이 된 작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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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16   |  발행일 2020-07-16 제27면   |  수정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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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관 문화부장

얼마 전 대구에서 97명의 화가가 "작품이 안 팔리면 불태우겠다"는 각오로 '안·팔·불·태 2020'전을 연 적이 있다. 총 400여 점을 전시했는데, 이들 중 27명이 직접 참여를 선언했다.

코로나19가 대구에서 창궐하면서 전시공간이 폐쇄되는 바람에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는 전업작가들은 지난 몇달간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그 절박함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들이 출품한 118점 중 7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팔렸다. 작품을 판 작가들이 동료의 작품을 팔아주는 훈훈한 '품앗이 구매'도 있었다. 또 측은지심을 발휘해 작품을 구입한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7개의 작품은 화로 속으로 들어가 재가 됐다. 전시 마지막 날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지켜봐야 했던 관람객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태우는 작가의 마음은 더 아렸을 터이다.

최근 미술·전시를 담당하는 기자가 된 기념으로 나 역시 구매 행렬에 동참해 '스스로 창끝이 된 사람'이란 제목의 유화 한 점을 샀다. 60대 여류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코로나19라는 시대적 상황과 홍콩 민주화운동인 '우산혁명'을 잘 표현한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작가는 50대가 넘어 작품활동을 새로 시작했단다. 그동안 자신만의 삶과 세계에만 갇혀 있다가 코로나로 인해 세상 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고 했다.

그의 그림 안에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검은 우산을 든 채 홍콩에서 중국 대륙을 향한 날카로운 창끝에 앉아 있는 한 작은 사람이 있었다. 작가는 그림 속 주인공이 2014년부터 홍콩민주화 운동을 이끈 두 20대 지도자 '조슈아 웡'이나 '네이선 로'일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생계유지'라는 현실적 어려움에 처한 작가들 처지 역시 창끝에 앉은 사람과 그리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스쳤다. 다만 두 민주화운동 지도자가 추구하는 가치는 민주주의임에 틀림없으리라. 그것이 자유든 평등이든 평화든 박애든 간에 '팔리고 안 팔리고 '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안·팔·불·태'전 이후 여러 전시장에서 다양한 작가들을 만났다. 그중 몇몇 중견작가는 '안·팔·불·태'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작가는 코로나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숙명적으로 힘이 든다. 나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오히려 혼자 골방에 처박혀 작품에 몰두할 수 있어 더 좋았다. 작품이 안 팔리면 안 팔면 된다. 나는 평생 팔기 위한 작업을 하지 않았다. 굳이 팔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팔리는 작품을 제작하면 된다"면서 보조금에만 기대는 일부 젊은 작가의 작가정신 결핍과 나약한 삶의 태도를 꼬집었다.

어떤 이들에겐 이런 말이 '꼰대' 같은 말로 들릴 수 있겠으나 나는 이런 정신을 가진 작가가 홍콩의 젊은 지도자처럼 '스스로 창끝이 된 작가'라고 본다. 덧붙이면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추구하는 '미적 구도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고통과 고난 속에 더 영롱해지는 진주조개처럼 산전수전 공중전을 거친 작가의 작품의 경지는 심오해지고 빛이 나는 법이다. 중국이 아무리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홍콩시민의 주권을 억압하더라도 목숨 걸고 싸우는 민주투사가 있듯 예술가는 모름지기 창끝에 앉아 있어야 한다. 작품의 가치를 팔리고 안 팔리고의 잣대로만 평가한다면 얼마나 삭막한가. 진정한 작가는 '유항산(有恒産) 유항심(有恒心)'이 아니라 '무항산(無恒産)이라도 유항심(有恒心)'이어야 한다. 안 팔려도 불태우지 않는, 목숨 걸고 작업하는 작가를 만나고 싶다.
박진관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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