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뼛속까지 대구사람”이라는 원조 아나테이너의 외길 인생 왕종근

  • 이춘호 이현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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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12-09   |  발행일 2011-12-09 제42면   |  수정 2011-12-09
“2년 전 진품명품서 잘렸을 때 한 달간 방문 걸어 잠그고 줄담배…”
■ 아나운서 35년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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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오전 8시30분 KBS1 대구아침마당을 진행중인 왕종근씨.

◆ 왕종근= 1954년 제주에서 태어난지 한 달 만에 대구로 와서 성장했다. 삼덕초등, 계성중·고, 경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안동 MBC에서 6개월쯤 일하다 훗날 부산 KBS에 통폐합되는 부산 TBC에 78년 입사한다. ‘퀴즈로 배웁시다’ 등 한꺼번에 주당 6개 프로를 진행하는 등 역량을 인정받아 94년 KBS 본사로 전격 발령이 난다. 이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퀴즈 신학국 기행, 체험 삶의 현장, 사랑의 리퀘스트, 도전 주부가요 스타, 생방송 세상의 아침 등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주목을 못받다가 ‘TV진품명품’진행자로 나서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99년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변신한다. 현재 매주 금요일 ‘KBS대구 아침마당’, 매일밤 10시 한국경제TV ‘성공을 부르는 밤’, TBS교통방송 ‘한마음의 콘서트’, 매주 토요일 아들과 함께 SBS ‘스타주니어쇼’ 등에 출연중이다. 한달에 7~8차례 ‘말과 인생’을 주제로 한 특강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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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왕종근은 매주 화요일 방송 녹화를 위해 대구로 내려오면 지인들과 동인동 찜갈비를 먹으며 고향의 소중함을 음미한다. 이현덕 lhd@yeongnam.com
‘왕종근(57)’

‘TV진품명품’ 때문에 유명해진 아나운서다. 하지만 그는 서울 아나운서 사이에선 ‘이단아’였다. 경상도 사투리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입성한다. ‘경상도 사투리 쓰는 지방 아나운서는 절대 서울 본사에 못 간다’는 방송가의 불문율을 처음으로 용도폐기시킨다. 김종찬과 함께 아나운서도 인기 연예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줘 ‘아나테이너(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란 신조어까지 탄생시킨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가 벽을 만난다. 2009년 4월 봄개편 때였다. 예산절감 차원에서 구조조정된 것이다. 99년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전향한 그는 다른 케이블 방송 같은 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TV진품명품에만 올인했다. 그에게 그 프로그램은 자기 분신이었다. 순정과 열정을 바쳤다. 하지만 방송가는 냉정했다. 가차없이 ‘레드카드’를 내민다.

중도하차라 충격이었다. 23세 때 방송에 입문한 뒤 35년 외길 아나운서 삶을 살아오면서 맛보는 최초의 좌절이었다. 한 달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줄담배만 피워댔다. 보다 못한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한숨, 그거 당신한테는 절대 안 어울려요. 당신은 세상에 소풍 나온 아이처럼 방송해야 딱이야.”

한대 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타임머신이 그를 80년 11월30일 오후 5시 부산 TBC(동양방송) 뉴스데스크 자리로 데려갔다. 거기에 24세 왕종근이 뉴스 진행자로 앉아 있었다.


40세때 KBS 본사로 발령 진품명품과 운명적 만남

“솔직히 고액광고 탐나 프리랜서 선언했다

한때 월 50건 출연제의 와

진보적 인사 만나보니 그들의 지적도 일리 있어

강호동 결백증 강한 사람 곧 방송에 돌아와야 해

아들 내 밑에 있는 이상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 TBC 방송통폐합 통곡의 생방

‘내일(80년 12월1일)이면 TBC는 KBS에 통폐합된다.’

군부정권이 강제로 방송을 통폐합시킨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다보니 자꾸 울컥했다. ‘군부정권이 어떻게 맘대로 한 방송국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만감이 교차했다. 한 꼭지를 읽고 다음 뉴스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힘들었다. 꼭 조사(弔辭) 낭독자 같았다.

‘부산시는 오늘…’

울먹이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끝내 통곡한다. 생방송이었다. 지켜보던 직원 그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 직원 모두의 심경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대형 방송사고였지만 이미 패잔병 신세가 된 직원들은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NG가 뭐 그리 대수냐’는 반응이었다.

“끝내 뉴스를 끝내지 못하고 내려왔어요. 직원들이 나를 향해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줍디다.”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부산 KBS 라디오 스튜디오에 집결하라는 공고가 났다. 150여명의 TBC 직원들이 도착한 스튜디오는 포로수용소 같았다. 갑자기 직원 수가 급증해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는 모양만 KBS 직원일 뿐이었다. 내부적으로 알력이 있었다. 점심 때면 TBC 식구들끼리 몰려 다녔다. 서로 다른 진영을 헐뜯었다. 1년가량 눈칫밥을 먹었다.

그 무렵 한국 방송가도 엄청나게 변했다. 통폐합 되던 날부터 뉴스 일부가 컬러로 방송되고, ENG 카메라도 등장한다. 그 전까지는 재생이 불가능한 무비카메라였다. 78년부터 재활용 테이프가 장착된 ENG카메라가 등장한다. 카메라맨도 기능을 완벽하게 숙지 못했으며, 녹음이 안돼 다시 촬영하러 다니는 해프닝도 잦았다.

◆ 난 원래 대구 사람이다

그가 부산 사람인 줄 안다. 아니다. 대구 사람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대구시 중구 삼덕동 삼덕초등 근처로 이사온다. 이어 삼덕초등과 계성중·고를 나와 경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한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아나운서가 되는 게 소원이었다. 고교 시절에는 교내 방송반 소속이었지만 경북대 시절에는 교내 방송이 없어 혼자 녹음기를 들고 대학 인근 북구 배자못 등에서 아나운서 연습을 했다.

77년 대구MBC에 응시한다. 면접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당시 여인철 편성국장이 뒤늦게 그가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란다.

“어떡하지? 사투리가 너무 심해 아나운서로는 좀…. 내심 기대했는데….”

김준연과 박동복씨는 합격했지만 그는 낙방이었다. “빌어먹을 사투리, 대구 사람인 게 당시엔 정말 원망스럽더라구요.”

한 달쯤 있다가 안동MBC 총무국장에게서 입사 제의가 들어왔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장 안동 화성동에 하숙방을 얻었다. 당시 안동MBC는 TV가 아니라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아쉬웠지만 일단 아나운서가 된 것에 만족했다. 안동에서 그는 나름대로 유지였다. 그런데 부친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부산TBC에 입사원서를 접수한다. 합격을 했다. 부산TBC는 안동과 반대로 TV방송 밖에 없었다.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비록 사투리는 남아있지만 부산 시청자에게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다.

“저는 유전자가 좀 다른 아나운서였어요. 다른 아나운서와 달리 점잖지도 교양적이지도 않았죠. 오픈 마인드였고 조금은 푼수끼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아줌마 버전으로 놀았죠. 내 기질 때문에 사투리는 대충 묻혀 넘어간 것 같습니다.”

인기가 좋았다. 여러 코너를 맡는다. 그는 한 주에 6개 프로를 동시에 진행했다.

◆ 사투리 쓰는 아나운서 첫 서울 입성

당시 안국정 KBS 본사 편성본부장이 그를 찜한다. 지역 소식을 전해주는 매거진 프로 때 왕종근을 눈여겨 본 것이다. 94년 2월17일자로 서울 본사 아나운서로 발령이 난다. 한편으론 좋고 다른 한편으론 걱정이었다. 사투리 탓이다. 그의 나이 마흔, 부산에 모든 기반이 있었다. 연습없이 바로 방송 두 꼭지를 쳐내야만 했다. 왕영은과 함께 하는 ‘퀴즈주부대학’과 ‘도전 내가 최고’ 프로였다.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포공항 상공에 이르자 자신이 꼭 ‘개선장군’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1년간 그는 계속 얼어 있었다. 주위에서 잔뜩 기대한 탓이다. 당시 아나운서실에 90여명의 아나운서가 있었지만 사투리를 그처럼 심하게 사용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 운명의 ‘진품명품’

그런데 어느 날 임성훈씨가 진행하던 ‘TV진품명품’이 그에게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국문학도 출신인 그는 평소 역사에 상당한 소양이 있었다. 그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 같았다.

“그 프로는 상당히 촌스러운 프로였어요. 저도 촌스러워서 잘 맞았다고나 할까요. 구성작가가 써주지 않은 멘트까지 애드리브로 날려버렸지요. 200년된 도자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몇 명의 주인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요. 도자기야, 너는 그들을 알고 있겠지’라고 주절거리기도 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시청률이 팍팍 오르기 시작했어요.”

◆ 동인동 찜갈비 집에서 인터뷰한 사연

매주 화요일 오전 그는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매주 금요일 오전 8시30분 방영되는 KBS1 ‘대구아침마당’ 프로를 녹화하기 위해서다. 지난 봄부터 고향과 친구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 프로를 맡았다. 녹화 이후에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동인동 찜갈비 광팬이다. 지난 달 29일 인터뷰도 그가 원해 동인동의 한 찜갈비 집에서 이뤄졌다.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게 무척 힘들어서인지 인터뷰 동안 그는 모두 8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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