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속에서 한국역사를 찾다

  • 글·사진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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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5-31   |  발행일 2013-05-31 제38면   |  수정 2013-05-31
하롱베이 닮은 아소만…왜선 109척 불사른 조선 이종무장군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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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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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에 있는 조선역관사 순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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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역사민속자료관 앞에 있는 조선통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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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위정척사운동의 거두였던 항일 의병장 최익현의 순국 비가 슈젠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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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와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 백작이 결혼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결혼봉축기념비가 가네이시조 스미즈공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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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백작.

대마도의 크기는 제주도 면적의 40%쯤 된다. 현재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다. 대마도는 섬 전체가 쓰시마시(市)다. 이즈하라마치, 가미쓰시마마치 등 6개의 마치(町)로 구성돼 있는데, 마치는 우리나라의 구(區)와 같다. 대마도에는 약 4만명이 산다. 전체면적의 90% 이상이 산지이고, 농경지는 4%에 불과하다. 남북과 동서의 길이는 각각 82㎞, 18㎞로 땅콩 혹은 긴 고구마를 닮은 꼴이다.

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인공해로를 내 상(上)대마, 하(下)대마로 나눴다. 이 밖에 크고 작은 섬 109개가 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약 49.5㎞, 후쿠오카에서 132㎞ 떨어져 있다.

최근 엔저영향으로 대마도에 한국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대마도를 다녀간 한국관광객은 29만3천명이었다. 일본대지진 여파가 있긴 했지만 2011년 6만명에 비해 무려 5배나 늘었다. 대마도는 북한을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이다. 대마도 구석구석에는 한국과 일본간 교류와 전쟁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때 우리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시마네현이 2005년 2월22일,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을 때 그해 3월18일 마산시의회가 조례를 통해 ‘대마도의 날’을 제정해 맞불을 놨다.

2008년 7월23일 오전 상이군경회 대구·경북지부 독도사수결사대원 21명이 대마도 이즈하라 시청 앞에서 이즈하라 시민 및 일본의 30여개 언론사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을 규탄하는 삭발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독도는 한국 땅, 대마도도 한국 땅’이라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기자는 상이군경회를 따라 대마도로 건너가 이 사건을 단독보도하기도 했다.

◆다시 밟아 본 ‘우리 섬’

99년 부산∼대마도 간 민간여객선이 처음 취항했다. 이듬해 정기취항선이 생겼다. 2009년 6월부터 김포공항과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는 소형항공기 노선도 개설됐다.

부산항에서 대마도 최북단 히타카쓰항까지는 배로 1시간10분, 이즈하라항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린다. 1박2일 일정은 보통 히타카쓰에 도착해 대마도 북∼남으로 관광을 한 다음 이즈하라에서 부산으로 돌아온다. 역순으로 하기도 한다.

지난 16일 1박2일의 일정으로 다시 대마도를 찾았다. 이번 취재의 목적은 ‘대마도 속 한국역사’를 찾기 위해서였다. 여행 당일 거센 풍랑으로 배가 무척 흔들렸다. 검은 파도가 여객선 2층 창문까지 올라왔다. 왜 대한해협을 현해탄(玄海灘)이라고 부르는지 알 만했다. 대마도와 한국을 오가는 뱃길은 짧지만 험한 항로다.

◆조선역관사 순난비

히타카쓰는 이즈하라 다음으로 큰 항구다. 히타카쓰에서 북서쪽 최북단 해안으로 차를 타고 20분쯤 가면 와니우라(鰐浦)란 포구가 나온다. 와니우라는 ‘악어 포구’라는 뜻이다. 악어 이빨과 같은 바위섬이 바다 한가운데 늘어서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와니는 백제인으로 일본에 유학을 전해준 왕인(王仁) 박사의 일본말 발음이기도 하다. 혹자는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갈 때 이곳을 거쳐 갔다고도 한다. 와니우라는 선박을 정박시키기엔 알맞지만 북쪽 포구 앞바다에는 암초가 많고 얕은 여울이 있어 조류가 제법 세다.

숙종 29년(1703) 음력 2월7일, 한천석·김영민·김수영을 비롯한 108명의 조선통역관이 대마도 21대 도주 소 요시자네를 조문하고 22대 번주 소 요시미치의 습봉(襲封·제후가 영지를 물려받음)을 축하하기 위해 이른 아침 부산항을 출발했다. 저녁 무렵 대마도 입항을 목전에 두고 악어 포구에서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배가 침몰해 역관 전원과 일본인 4명이 차가운 바다에 익사했다. 이 사건을 기려 90년 ‘조선역관사 순난비’를 세웠다. 비석 앞에 112명의 이름을 새긴 검은 대리석이 있으며 배의 형상을 새긴 돌도 있다.

16년 뒤 이곳을 지난 조선통신사 신유한은 해유록(海遊錄)에 “바다 한가운데 늘어선 큰 돌들이 마치 고래의 어금니와 범의 이빨 같았다. 그 가운데 배가 들어가 한 번만 실수하면 부서지고 엎어지기 십상이다”라고 기록했다. 와니우라에는 한국양식을 본 떠 만든, 팔각정으로 된 한국전망대가 있다. 맑은 날이면 부산이 보인다. 전망대 내부에는 부산 야경사진이 전시돼 있다. 전망대 앞 우니지마(海栗島)에는 일본해상자위대 레이더 기지가 있다. 인근에 한국이 원산지인 이팝나무 3천여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난자몬자가 있다.

◆박제상 순국비

와니우라에서 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30분쯤 가면 ‘미나토’라는 작은 어촌이 있다. 이곳엔 신라 눌지왕 때 왜나라에 파견돼 인질로 잡혀있던 왕자 미사흔을 구하고 자신은 목숨을 잃은 충신 박제상의 순국비가 있다. 이 순국비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1988년 대마도의 향토사학자와 한국의 황수영 교수가 세웠다.

하지만 조선통신사 신유한과 실학자 안정복도 박제상이 순국한 장소를 규슈의 하카타라고 추정했다. 삼국사기에 박제상이 죽은 곳이 일본이라 했는데, 당시 대마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고증하지 않고 일본서기의 기록만으로 대마도에 박제상 순국비를 세운 건 매우 경솔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성(城) ‘가네다’

상대마와 하대마의 중간에는 아소만(灣)이 있다. 와타즈미 신사 뒤로 우뚝 솟은 에보시다케산(山)은 아소만을 북쪽에서 360도로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우리나라 남해의 섬같이 리아스식 해안이다. 마치 베트남의 하롱베이를 연상시킨다.

조선 세종 1년(1419) 음력 6월19일 이종무 장군이 아소만에서 왜의 전선 109척을 불사르고 114명의 왜구를 참수했다. 에보시다케 전망대 맞은 편 조야마산(城山·해발 276m)에는 가네다(金田)성이 있다. 이 성은 어긋쌓기 형식으로 축성한 고구려식 산성이다. 1천300여년 전 신라와 당에 멸망한 백제 유민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고구려의 한 갈래였기에 축성방식도 유사했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를 볼 수 있으며, 우물과 음마지 흔적도 있다.

◆여·원연합군 비석

이즈하라시에서 서쪽해안으로 30분쯤 차를 타고 가면 ‘고모하마다’라는 지역이 있다. 1274년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 2만8천명이 대마도를 침략한 곳이다. 당시 대마도주 소 스케쿠니는 80기에 불과한 병력으로 여·원연합군에 맞섰으나 전멸했다. 고모하마다에는 소 스케쿠니를 기리는 신사가 있으며, 여·원연합군 원정 700주기인 1974년에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원구(元寇·일본원정군의 일본식 표현)비를 세웠다.

◆학봉 김성일 시비(詩碑)

1590년 음력 11월 조선은 황윤길과 김성일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일본에 보내 일본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사절단은 교토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기 전 대마도 세이잔지에 들러 고니시 유키나가의 측근 스파이승려 겐소와 친분을 쌓았다. 이즈하라시청 인근 언덕 세이잔지(西山寺) 안에는 통신사로 갔던 학봉 김성일의 시비가 있다.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서 머물던 외교 창구 겸 숙소였던 세이잔지는 현재 유스호스텔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통신사비

조선사절단이 통신사란 이름으로 처음 일본을 방문한 때는 세종 11년(1429)이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덟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로 교류가 중단됐다. 1607년 조선통신사는 전쟁포로 귀국, 국정탐색을 시작으로 1811년까지 모두 열두 차례 일본을 방문해 외교·문화교류를 했다. 규모는 300∼500명이었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로 가기 전 조선통신사가 거쳤던 곳이다.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를 가로지르는 하천 난간에는 조선통신사행렬을 묘사한 그림이 여러 개 걸려 있다. 이즈하라시청 왼편에는 현립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다. 자료관에는 조선에서 가져 온 종과 조선통신사행렬도, 조선왕의 교지 등 대마도의 인문·자연자원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민속자료관 입구에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지은 고려문이 있다. 또 1992년에 건립한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즈하라시에선 매년 8월초 아리랑축제를 하면서 조선통신사행렬을 재연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순국비

“내 머리는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의 거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은 전라도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과 싸우다 사로잡혔다. 당시 74세였던 그는 대마도로 압송돼 5개월간 저항하다, 1907년 1월1일 단식 순국했다. 대마도 유배생활 동안 대마도인들은 그의 절개와 기품을 높이 샀다. 대마도인이 슈젠지(修善寺)에 최익현의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슈젠지 왼편에 있는 2m 높이의 순국비에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라고 쓰여 있다. 1986년 한국과 일본의 뜻있는 사람이 세웠다.

◆덕혜옹주 소 다케유키 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낳은 딸이다. 정식 비가 아니라 양귀인에게서 낳았다고 공주가 아니라 옹주다. 덕혜옹주는 13세 때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강제로 가게 된다. 19세 때 1931년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해 대마도에 와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이를 기념해 대마도 사람들이 높이 2.3m, 폭 1m되는 결혼봉축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혼한 뒤 비석은 깨졌으며, 기념비는 대마도 내성인 가네이시조(金石城) 밖에 버려졌다. 21세기 들어 부산과 대마도를 오가는 관광객이 늘어나자 한국과 일본의 뜻있는 지식인이 2001년 가네이시조 스미즈공원에 다시 세웠다.
글·사진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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