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68주년 특집 - 아픈역사 묻힌진실 ‘대구10월사건’을 다시 보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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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11   |  발행일 2013-10-11 제36면   |  수정 2013-10-11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대구의 잊혀진 계절 194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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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1946년 7월2일자에 실린 대구의 식량난 관련 기사.<10월항쟁유족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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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1일 대구시민들이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기아행진을 하고 있다.<10월항쟁유족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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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항쟁’ 당시 사진. 경찰이 총을 들고 시민과 대치하고 있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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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사건으로 희생된 시신들.<10월항쟁유족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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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사건 전개도. <10월항쟁유족회 제공>


1946년 10월 미(美)군정하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반골의 도시’였다. 4·19혁명을 촉발한 계기도 대구 2·28의거였다. 당시 대구는 ‘민주주의의 성지’였다. 1946년에 벌어진 ‘10월사건’은 광복 후 대구에서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사건’으로 명명하기 전까지 ‘폭동’으로 폄훼됐다. 진화위는 10월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못 박았다.

美군정에 ‘식량난’항의
대구역 행진이 시발점…
경찰발포로 사상자 나자
악질 관리·지주 습격…
무정부상태 되자 계엄령

대구경북 310만명 중
70만명 파업·시위 참가
“가창골 등 20여곳에서
좌익정치범으로 분류된
시민 3500명 집단학살”

제주·여순사건과 달리
평화공원·기념관은커녕
명예회복 움직임도 없어

경산 코발트광산 일대
역사평화공원 조성 여론


◆배경

10월1일에 발생한 항쟁은 12월 중순까지 전국으로 번졌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대구·경북인구 310여만명 중 70여만명이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1946년 7월2일자 영남일보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배고파 못 살겠소’ ‘기아시민 간청 쇄도’라는 제목으로 대구의 식량난이 얼마만큼 심각했는지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다.

“갑-쌀은 주지 않고 교통은 전부 막아 놓았으니 매일 지방을 돌아다니며 양식을 구해 먹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 도리가 있나.”

“을-나는 사흘 굶어서 일할 기운도 없소. 집에 식구들이 늘어져 누운 것을 보고 왔는데 그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소.”

“병-배가 고파서 늘어져 누웠으면 호열자(콜레라)에 걸렸다고 와서 잡아가고, 쌀은 주지 않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

쌀을 달라고 수천명의 군중이 아침부터 대구부청과 경북도청으로 몰려와서 오후가 되도록 돌아가지 않고 어떻게든지 목숨을 구하도록 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 전경은 눈 뜨고 볼 수 없거니와, 관계당국에서는 미군정 관장에 문의했으나 별다른 대책을 얻지 못하였으며, 다만 대구부가 가지고 있는 쌀과 잡곡, 합해 600석을 배급하기로 했다. 이 600석의 쌀은 천시민의 하루분 식량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방울로 30만 시민은 문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다. - 영남일보 46년 7월2일자

당시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대구는 발병률 1위였다. 콜레라가 번질 것을 우려해 대구 근교의 출입이 통제됐다. 9월에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로 전매국(담배공장) 파업과 철도 파업, 우편국 파업이 계속됐다.

◆진행

10월1일, 파업투쟁위원회 간판철거문제로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했다. 이를 계기로 대구역 광장에서 시민과 학생 등 1만여명이 시위에 가세해 ‘미군정은 물러가라’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기아행진을 했다. 이 과정에서 돌이 날아들고 경찰이 공포탄을 쏘면서 두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튿날 대구의전(경북대 의대 전신)과 대구사범대, 대구농대(경북대 농대 전신) 학생들이 희생자의 주검을 메고 시위를 벌인 가운데 시민들이 합세해 시위대가 수천명으로 불어나자 경찰이 해산에 나섰다. 이에 시위대가 투석으로 맞서면서 경찰이 발포해 22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격분한 군중은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를 접수하고 경찰을 무장해제 시킨 뒤 남일동과 진골목 일대에 살던 일제강점기 악질관리와 지주, 고리대금업자의 저택을 습격하는 등 무정부상태를 만들었다.

당시 영남일보 기자였던 이목우는 이를 ‘광란과 유혈의 수삼시간’으로 기록했다.

결국 미군정은 전술용 장갑차 4대를 투입해 경찰서를 탈환하고 시위대를 해산시킨 뒤 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6일에는 경북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역으로 확대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시위에 참여한 가운데 시민과 농민 1천여명, 경찰 200여명이 사망하고, 3만여명이 체포됐다.

◆결과

10월항쟁에 가담했던 주요 인사들은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돼 예비검속을 통해 요주의 사찰대상이 됐다. 일부는 6·25전쟁 때까지 좌익정치범으로 분류돼 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집단으로 학살됐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에 따르면 약 3천500명의 민간인이 대구와 경산에서 집단학살 됐다고 한다.

대구형무소 수형인들은 대부분 가창골(현 가창댐)과 경산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회 측은 이 두 곳 외에 칠곡군 신동고개와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과 상인동, 팔공산 동화사입구, 금호강과 낙동강 두물머리, 현 앞산 빨래터공원 인근 계곡 등 20여곳에서 무차별학살이 자행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골로 간다(골짜기로 죽으러 간다)’는 말이 이때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10월사건은 이후 1948년 제주4·3사건, 여순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6·25전쟁 중 좌·우익 상호간 민간인학살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4·3사건과 여순사건에 비해 대구의 10월은 이용의 노래처럼 ‘잊혀진 계절’이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제주4·3사건은 특별법이 제정돼 2008년 평화공원과 기념관이 들어섰으며, 여순사건은 98년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 학술연구와 합동위령제, 피학살 지역 실태조사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대구는 59년 가창댐건설로 대규모학살지인 가창골이 수몰됐다. 60년엔 경산코발트광산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으나 그 이후 40여년간 침묵했다. 2000년대 들어 경산코발트광산에서는 지금까지 4차에 걸쳐 발굴 작업이 이뤄졌으며, 국가에 대한 소송도 진행 중이다.

10월사건은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사건이다. 코발트광산을 역사평화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의견이 많다. 13일 한국전쟁 전후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는 경산시립박물관 대강당에서 14회 위령제를 지낸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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