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골서 희생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쾌동 선생의 아들 유병화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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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0   |  발행일 2014-10-10 제34면   |  수정 2014-10-10
전쟁 후 아버지 생사확인하러 광산 수직갱에 가니 ‘썩는 냄새’ 진동
20141010
보도연맹사건으로 가창골에서 희생된 독립지사 유쾌동 선생의 아들 유병화씨가 인터뷰를 하며 회한에 잠겨있다. 1950년 7월 유씨도 아버지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유병화씨(85·대구시 중구 대봉동)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유쾌동 선생의 장남이다. 군위군 효령면에서 한학자의 아들도 태어난 유쾌동 선생은 한학을 하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이 되자 대구의무노조 간부로 일하다 46년 대구 10월항쟁에 참가했다. 이후 6·25전쟁 중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붙들려갔다. 대구형무소에는 그의 장남인 병화씨가 이미 예비검속으로 수감돼 있었다. 병화씨는 대구형무소에서 아버지가 가창골로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父子가 보도연맹…대구형무소 함께 수감
어느날 밤 가창골 끌려가던 父 모습 목격

지난 8일 유쾌동 선생의 장남 병화씨를 만났다. 그의 아내 이순조씨(80)는 “남편이 전날 밤 경찰에 끌려가는 꿈을 꿨는데 내가 붙잡아서 끌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했다. 유병화씨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간다.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본인 또한 평생 힘든 삶을 살아왔다. 형제·자매가 몇 명 있나. 그들도 병화씨와 비슷한 삶을 살았나.

“2남4녀 중 장남이다. 동생과 누이들은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르다.”

-아버지와 병화씨는 어떤 연유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나.

“다른 것 없다. 둘 다 보도연맹에 가입돼 있었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대구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래서 늘 일경의 감시대상이 됐다. 덕산국민학교 5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신의주, 봉천(선양)을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이후에도 서울~원산~도문을 지나 만주에 심부름을 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친구한테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제국주의 침략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자랑삼아 이야기 했더니 일경에 잡혀가 일주일간 흠씬 맞았다. 광복 전에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퇴학 당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이고, 요사찰 대상이었으며 경찰에 잡혀간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랬다.”

-광복 후에 아버지와 병화씨는 무엇을 했나.

“아버지는 대구의무노조간부로 일했고, 난 철도국 운송과 직원으로 일했다. 아버지가 10월항쟁에 참가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아버지는 우익이 시킨대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1950년 7월에 대구형무소로 수감됐다. 난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가 있는 상태였는데, 형무소 사무실 맞은편 큰방에 있었다. 30명 정도가 끌려와 이미 수감돼 있었다. 그런데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끌려와 밤에 실려가는 걸 봤다. 같이 있던 동료가 아버지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교도관이 사람을 패고, 몽둥이로 트럭 짐칸에 밀어 넣는 것을 목격했다.”

-병화씨와 나머지 예비검속자는 끌려가지 않았나.

“예비검속자도 가창골에 끌려갔다. 난 미성년자이고, 친척 한 분이 대구경찰서에 근무하는 교도관을 알아 구사일생으로 빼줬다.”

-대구형무소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언제 풀려났나.

“5~6개월간 있다 12월쯤 풀려났다. 풀려나서 집에 있는데 교도관이 그날 밤에 불려간 사람은 다 죽었고, 가창골 수직갱에 생매장됐다고 말해줬다. 석방되고 세상이 무서워 구들방 밑에서 숨어 살았다. 그러다 소집영장이 나와 국군으로 징집돼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포항을 거쳐 지리산공비토벌대(50연대)로 배속받아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군 생활을 잘해 상관이 임관하라고 그러더라. 안 한다고 했다가 장교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아버지가 어떤 말을 남겼나. 또 그때 잡혀간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아버지와 대화를 못 했다. 좌익 계통의 사람들은 다 잡혀갔지만 좌익이 아닌 사람도 많이 잡혀갔다.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에게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는 사람도 잡아갔다. 지목 당해 잡아가면 끝이었다.”

-아버지가 끌려갈 때 어떤 감정이었나.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더라.”

-석방될 때 어떤 생각을 했나.

“아버지는 가셨지만 어머니한테 잘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아내 이순조씨는 어머니가 콩을 팥이라 해도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에 대한 생사확인을 했나.

“가창골 중석광산 수직갱에 갔다. 나무꾼에게 물어 어렵게 수직갱을 찾아 혼자 들어갔다. 무언가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나서 개울가에서 토했다. 생사확인을 하지 못했다. 가창골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중에 비에 씻겨 시신이 드러나 냄새가 났는데, 흙으로 다시 덮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0월항쟁유족회 채영희 회장한테 연락을 듣고 2011년 가창골에서 처음 제사를 지냈다. 그때 비로소 통곡을 했다.”

-어떻게 생계를 이어갔나.

“침술을 배웠다. 아내는 과일행상, 빵장사를 했다.”

-보도연맹사건은 어떻게 해결돼야 한다고 보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 그동안 재산 없어진 것도 보상하라.”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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