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대구시가 나서 억울한 혼령 달래고 유족을 위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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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0   |  발행일 2014-10-10 제35면   |  수정 201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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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항쟁! 주리고 서러운 백성들의 거대한 외침이었다. 누구는 ‘대구폭동’이라 하고, 누구는 ‘인민항쟁’이라고 하지만, 좌·우정치인들의 아전인수를 빼버리면, 남는 것은 오롯이 몸통, 즉 ‘내 나라를 만들어, 배 주리지 않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갑오농민전쟁 이래 50년간 나라를 빼앗겼다가 광복돼 이제 제 나라 세우자는 열정 가득한 시절, 하지만 정치권 돌아가는 사정은 영 미덥지 못했고 근대국가를 세우는 데 필수조건인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모략으로 이리저리 표류하고 말았다. 게다가 시민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미 군정의 거듭된 실정이었다. 미 군정은 식량정책을 자유시장제와 배급제로 오락가락하면서 민생을 파탄냈고, 치안을 한답시고 친일경찰을 재등용하여 민심이 흉흉했다. 20대 후반 젊은 장교들이 지휘하는 미(美) 군정의 정치 수준은 한마디로 ‘꽝’이었다. 미 군정 아래 공용어는 국어가 아니고 영어라서 친일지식인들이 통역을 독점하는 가운데 미 군정을 교란하였다.

대구시민은 물러가는 일본인과 친일파에게 린치를 거의 가하지 않았다. 1945년 8월14일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 선생에게 권력을 이양했고 이어 민족주권체가 조직되기 시작했으므로 평화적 권력이양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를 믿고 질서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무너졌다. 뒤늦게 46년 10월항쟁에서 그 감정이 폭발했다. 일부 지역에서 친일경찰에 대해 아주 부분적인 ‘복수’가 있었는데 이를 가장하여 ‘대구폭동’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과한 처사가 분명하다.

10월항쟁은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민족운동이고 국민주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민주운동이었다. 그래서 민주·민족운동인 것이다. 좌·우, 중도의 각 정치세력들은 사전 혹은 사후에 자신의 정치계획에 맞게 이 항쟁을 해석했고 그에 맞게 대처했다. 아쉽게도 미 군정은 이를 적대했다. 미 군정은 백성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요구를 포괄하는 형태로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정권은 미국과 협력적이고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미 군정의 젊은 장교들이 지닌 정치 감각은 불능에 가까웠다.

대구시민의 요구는 ‘쌀을 달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은 ‘쌀 강제공출 반대’로 저항했다. 미 군정은 식량정책의 난항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친일경찰과 관료가 다시 동원되었다. 그들은 온갖 나쁜 짓은 다했다. 분노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이들의 악행이었다. 마침내 분노는 대구에서 시작해 경북과 경남, 전국으로 번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했다. 모두가 다 나섰다. 이 와중에도 노련한 친일경찰은 시위 참가자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이 명단은 6·25전쟁 한 해 전인 49년 국민보도연맹 강제가맹의 원재료가 되었다.

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친일 인맥이 장악한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 지도부는 보도연맹원 학살을 결정했다. 혹시 인민군에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예지력(?)을 발휘한 것이다. 30만명의 보도연맹원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를 제외하고 재판도 거치지 않고, 거의 다 학살당했다. 인권 대유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유족들 주장으로는 38도선 이남에서 보도연맹원을 포함해서 약 100만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일일이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건 분명하다.

대구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은 신빙성 있는 자료와 증언만으로 볼 때도, 4천500~8천명에 이른다. 부산일보의 김기진 기자는 해제된 미군기밀자료를 인용해 당시 대구형무소에 4천500명이 있었고, 이들이 학살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필자가 대구에서 유족회 활동을 하던 이복영 선생(2009년 사망)의 증언을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 고위 교도관이 증언한 바, 4천500명은 일정 시점의 수용자이고, 전 기간을 다 하면 8천명이 대구형무소를 거쳐 가창골, 경산코발트광산 등 대구 인근 14개 지역에서 학살되었다고 했다. 4·19혁명 직후 대구시 달성군 가창골과 달서구 학산공원 등지에서는 일부 학살터가 발굴되었다. 하지만 5·16 군사정부는 이를 다시 묻어버렸다.

민간의 증언에 따르면 약 5천명이 가창면 골짜기 일대에서 학살당했다. 현재 몇 군데에는 유골이 묻혀 있다는 주민의 제보가 있다. 하지만 법과 재정 때문에 자치단체의 관심 없이는 발굴이 가능하지 않다. 이제라도 유골 발굴을 추진하고 추모비와 추모공원을 조성해 억울한 죽음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로해야 한다. 아이들이 소풍을 가서 현장을 보고, 자기들 세대에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하는 인권교육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제라도 대구시가 나서줄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함종호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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