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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낙동강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킨 아군이 낙동강에 수중교를 설치하고 반격에 나서고 있다.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낙동강 전투에서의 승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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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향하는 피란행렬. 전쟁이 일어난후 피란민들은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대구로 몰려들었다. 당시 대구의 피란민은 40여만명에 달했다. |
평화롭고 고요한 일요일이었다. 거리는 썰물이 빠져나간 빈 갯벌처럼 텅 비어 있었다. 한낮의 햇빛은 찢어진 구름 틈새로 쏟아졌고, 빛의 다발은 한산한 거리에 뿌려졌다. 휴일 대구 중앙통 거리는 드문드문 인적이 보일 뿐 햇빛만이 들끓었다. 박신규는 이날 점심 무렵, 목욕탕에 들른 후 단골 다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1950년 2월 영남일보에 갓 입사한 신출내기 기자였다.
길을 걷던 박신규의 뒤통수가 순간 움찔했다. 군용트럭 수십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중앙통에서 대구역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트럭은 라이트를 밝히고 있었다. 전조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섬광처럼 강렬했고, 거리의 햇살을 빠른 속도로 가르며 질주했다. 타이어 밑에서는 자갈이 총알처럼 튕겨 올랐고, 튕겨 오른 자갈은 질서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갈이 튕길 때마다 트럭은 덜컹거렸다. 트럭 위에는 중무장한 군인이 가득했다. 깊게 눌러 쓴 철모 사이에서 눈빛이 흔들렸고, 두 손으로 움켜쥔 총은 직각으로 서 있었다. 모두가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박신규는 트럭이 향한 대구역으로 내달렸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그날도 신출내기 박신규 기자는
단골다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이렌과 수십대의 군용트럭
총을 쥔채 긴장한 군인들 눈빛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터졌다고 직감
신문사가 있는 서문로로 내달렸다
“북한군이 오늘 기습공격을…”
라디오서 나오는 뉴스를 적었고
단골집에 모여있던 직원들과
대구 최초로 전쟁소식을 알렸다
이미 역 광장에는 군인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짬밥이 찬 고참들은 저들끼리 수군덕거렸고, 갓 들어온 신병들은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숨이 가빠 보였다. 경계는 삼엄했다. 기자인 박신규조차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역장실을 찾았다. 일요일인데도 역장은 나와 있었다. 평소에 안면이 있던 터였다.
“무슨 일이오? 군인들이 왜….”
박신규가 물었고, 말이 끝나기 전에 역장은 고함치듯 대답했다
“터졌어! 38선에서…. 오늘 새벽에…. 그것도 크게 터진 모양이야.”
박신규는 역장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신문사가 있는 서문로로 내달렸다. 신문사에 도착한 그는 교환실에 처박아 둔 진공관식 일제 라디오와 미국 공보원에서 기증한 광석식 라디오를 꺼냈다. ‘지지직’ 찢어질 듯한 잡음이 스피커를 타고 나왔다. 불륨은 최대한 높였다.
“오늘 미명을 기해 이북의 적군이 38도선 전역에 걸쳐 탱크를 앞세우고 전면적 기습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다급했다. 한 음절, 한 음절이 간결하고 묵직했지만 어투는 격했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전쟁은 그렇게 예고도 없이 터지고 말았다.
#2. 그날, 영남일보… 대구 최초 전쟁 보도
박신규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뉴스를 빠르게 적어나갔다. 호외를 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일요일이라 신문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딱히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었다. 고민 끝에 신문 배달용 자전거를 타고 급하게 신문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감나무집으로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감나무집은 신문사 직원들의 단골 막걸리 집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곳에는 공무국 공장장을 비롯해 식자와 조판, 평판인쇄공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렇게 모인 영남일보 직원들은 대구 최초로 전쟁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특종이었다.
첫 번째 호외가 나간 뒤에도 영남일보 직원들은 신문사를 떠나지 않았다. 라디오를 들으며 후속 뉴스를 꼼꼼히 체크해나갔다. 전황은 갈수록 긴박하고 불안했다.
영남일보는 이날 두 번째 호외를 발행하며 전쟁속보를 빠르게 전했다. 호외가 나가면서 시민들은 서문로 영남일보 사옥 앞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신문이 붙어 있는 벽보판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렸고, 다급한 문의가 쏟아졌다. 밤에도 호외가 계속 나오는지 독자들은 묻고, 또 물었다. 영남일보는 이날 세 번째 호외를 제작해 또다시 긴급소식을 전했다.
전쟁 발발 다음 날부터 영남일보는 하루 두 번 신문을 발행했다. 아침에는 속보판을 내고, 오후에는 석간 체제로 운영됐다. 전황의 속보가 영남일보를 통해 대구 전역으로 전해졌고, 독자들은 신문이 인쇄되기도 전에 가판대로 몰려들었다. 한번 팔린 신문은 프리미엄까지 붙어 되팔리기도 했다.
가판신문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도 엄청났다. 총무국 직원들이 발로 꾹꾹 눌러 담은 돈 보따리가 신문사 구석에 차곡차곡 쌓였다. 당시 영남일보는 전국 신문 중 최대 부수를 자랑했다. 20만부는 족히 되었다고 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당시 영남일보를 돌리던 14세 소년이었다. 전쟁 직후 대구로 피란을 내려왔지만, 이 시절 부친은 납북되고 형들은 모두 전장으로 떠나야 했다. 소년 김우중이 감당하기엔 현실은 가혹하고 참담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남아있는 네 식구를 먹여살려야만 했다. 그런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신문팔이였고, ‘영남일보’를 외치며 발품을 팔았다.
#3. 불리한 전황…최후의 보루 낙동강방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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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는 군인들의 대열은 산과 강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란행렬은 서로 엉키고 부딪히고 넘어지며 밟혔다. 늙은 아비의 이불 짐이 트럭에 부딪혀 휘청거렸고, 젊은 아낙의 보따리가 인파에 휩쓸려 위태로웠다.
미군이 합류했지만 전세는 갈수록 악화됐다. 대전으로 내려온 이승만 정부는 7월16일 임시 수도를 대구로 옮겼다. 지금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서북쪽에 있던 경북도지사 관사를 임시 관저 겸 집무실로 사용했고, 국방부 임시청사는 한국은행 대구지점 자리로 정했다. 한일극장(CGV대구 한일) 자리인 당시의 문화극장은 국회의사당 역할을 했다.
7월말, 북한군은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이제 남은 곳은 대구와 부산뿐. 국토를 거의 다 빼앗기고 숨만 깔딱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한·미연합군을 지휘하던 미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사령관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침내 8월1일, 워커 사령관은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은 칠곡 왜관을 기점으로 동서쪽은 국군이, 남북쪽은 미군이 맡아 배수진을 쳤다. 최후의 보루에서 벌어진 전투는 지속적이고 치열했다. 그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이곳은 대구로 가는 길목이었고, 남·북 양측이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다행히 아군은 낙동강 전선을 기점으로 북한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냈다. ‘8월15일 부산에서 통일 기념식을 열겠다’던 김일성은 전세가 주춤해지자, 8월15일을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하고 다시 한번 총공세를 가해왔다.
대구함락 소문에도 신문은 발행됐고 그 기록은 역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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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영남일보는 ‘我軍 仁川에 敵前上陸(아군 인천에 적전상륙)’이라는 1면 머릿기사를 내보내며 비중있게 다뤘다. 2. 서울을 수복한 다음날인 1950년 9월29일 영남일보 기사. ‘서울 占領(점령)을 全世界(전세계)가 환희’한다는 1면 머릿기사를 싣고 상세한 내용을 전했다. 3.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는 내용을 실은 영남일보 기사. 4. 영남일보는 1950년 12월30일부터 ‘무료 피란민 소식란’을 만들어 이산가족을 도왔다. 이후 신문에는 ‘찾는 사람’ 광고가 줄을 이었고, 실제 가족상봉이 이뤄졌다. |
#4. 그래도 신문은 계속 발행해야 한다
8월18일 새벽, 가산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 14연대는 일부 병력을 금호강으로 침투시켰다. 금호강에 침투한 적은 이날 대구를 향해 120㎜ 중박격포 7발을 날렸다. 박격포는 대구역에 떨어졌고, 역무원 1명이 숨지고 민간인 7명이 크게 다쳤다.
폭음과 함께 대구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적 포탄이 날아왔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대구가 곧 함락될 것이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북한군이 금호강까지 쳐들어왔다. 정부는 벌써 보따리를 싸서 부산으로 빠져나갔다. 미군들도 일본으로 철수하기 위해 동촌비행장으로 떠났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었고, 갈수록 포악해졌다. 전쟁 발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을 발행하던 영남일보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적의 박격포가 떨어진 대구역은 신문사가 있던 서문로와 지척이었고, 직원들도 포탄의 굉음을 들었던 터였다. 당시 영남일보 사장이었던 김영보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자칫하다간 직원들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김영보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전황이 매우 불안합니다. 더 이상 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문사 문을 닫겠다’는 사장의 말에 직원들은 웅성거렸다. 김영보는 준비한 퇴직금을 직원들에게 나눠 주며 다음을 기약했다.
“아직 우리에겐 신문용지가 있고 잉크가 있습니다. 독자들도 영남일보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대로 떠날 수는 없습니다.”
부국장 이정수였다. 그의 말에 직원들도 뜻을 함께했다. 모두가 ‘전황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신문은 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영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세 악화로 대구마저 위태롭자
너도나도 부산으로 피란갔지만
독자를 위해 신문은 계속 내야했다
전쟁중 하루도 빠짐없이 발행
인천상륙작전·서울수복·휴전협정…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1면에 알렸다
#5. 전세 역전…그리고 역사의 기록
8월말, 낙동강 전투는 서서히 아군쪽으로 힘이 쏠리기 시작했다. 9월 중순 들어서는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9월15일,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서 총반격에 나섰다.
영남일보는 9월16일자 1면에 ‘我軍 仁川에 敵前上陸(아군 인천에 적전상륙)’이라는 머릿기사를 내보내며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빠르게 전했다. 17일자에는 ‘洛東江 全戰線서 總反擊戰을 開始(낙동강 전전선서 총반격전을 개시)’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총반격에 나선 아군은 여세를 몰아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영남일보는 19일자 1면 사설 ‘가자! 서울로’를 통해 국민의 단결된 힘을 촉구했다. ‘총반격 북진의 날! 서울로 가는날! 그 얼마나 감격의 어구(語句)인가! 민족적인 과제로서 다같이 밀고 올라가야 할 그날이 이제 역사적인 서울 수복작전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모두가 첨병이 되어 정다운 서울로 가자!’
마침내 9월28일 석달여 만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되찾았고, 다음 날 영남일보는 ‘서울 占領(점령)을 全世界(전세계)가 환희’한다는 1면 머릿기사를 실었다. 아군의 승전보는 계속됐고 10월18일에는 평양까지 입성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물러서야 했고,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1·4후퇴 직전 서울은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당시 영남일보 종군기자였던 이용길은 1951년 1월1일 신년호에 폭풍 전야의 서울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다. ‘고요한 서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용길은 ‘새해를 맞은 지금, 노유부녀자(老幼婦女子) 전부가 남으로 내려가고 서울은 고요한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서울은 마치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어 씨름터에 나선 역사(力士)와 같다. 닥쳐오는 공방전에 용감히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전쟁 직후 이용길은 당시 대구신보 기자였던 이목우와 함께 종군했다. 이들은 1년여간 전장을 누비며 긴박한 전황을 기사화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이목우는 영남일보로 옮겨 사회부장을 맡았다. 그는 전쟁통의 대구 모습을 사회단평 형식으로 쓴 ‘여담록’을 연재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1·4후퇴 이후 전쟁은 격전과 소강을 반복하다, 결국 1953년 7월27일 휴전을 맞았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다음 날, 영남일보는 1면에 ‘韓國戰爭에 一旦 終止符(한국전쟁에 일단 종지부)’이라는 제목의 머릿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27일 오전 10시3분 판문점에서 북측 대표인 남일 소장과 UN측 대표인 해리슨 중장이 참석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체결됐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담았다. 영남일보는 6·25전쟁 중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을 발행했고, 독자들은 영남일보를 통해 전황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3년여의 기록은 지금 역사로 남았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영남일보 DB 자료조사=조사팀 박성희
참고문헌=6·25전쟁 당시 영남일보 신문, 영남일보 50년史, 한국 언론 인물 사화
“아들 찾아주세요” 대구에 40여만명 피란민 몰려 가족생사 찾는 광고 줄이어
전쟁이 일어나자 대구에는 40여만명의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거처할 곳도 마땅치 않았고, 구호물자도 넉넉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산의 아픔이 컸다. 피란길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은 생사도 모른 채 타지에서 애만 태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쟁 초기 영남일보에는 ‘찾는 사람’ 광고가 줄을 이었다. 전라도에서 올라온 아버지가 두 아들을 애타게 찾는 광고가 실렸고,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이 하나뿐인 형을 찾는다는 광고가 지면을 채웠다. 이산가족들은 광고 말미에 자신이 있는 장소로 연락하라는 문구를 남겼고, 실제 신문을 보고 가족상봉이 이뤄지기도 했다.
‘찾는 사람’ 광고가 늘어나면서 영남일보는 1950년 12월30일부터 ‘무료 피란민 소식란’을 지면에 실어 이산가족들을 도왔다. 사회부장 이목우가 연재한 ‘여담록’에도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어제 새벽부터 본사(영남일보) 정문 화강암 계단에 여아동반의 한 늙은 아버지가 하루 종일 앉아 있다. 그는 서울 아현동에서 온 유씨 성을 가진 피란민으로 영남일보에 그의 아우를 찾는 무료 광고를 내고 상봉할 때까지 백날이라도 거기서 기다린다고 한다. 집이 없으니깐 밤이면 노숙하고 신문사 앞에 와서 골육의 아우를 기다리는 애절한 인생이다.(유씨는 사흘 만에 아우를 찾음)’
전쟁 중에도 대구에서는 사건 사고가 잇따랐다. 52년 12월26일 서문시장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해 점포 43동 380호와 민가 400여세대가 전소됐다. 다행히 3명만 부상당하고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200억원의 재산피해와 2천5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화재 이후 불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처녀를 생매장해야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영남일보는 ‘서문시장 화재가 낳은 희극’이라는 제목으로 유언비어가 나도는 기현상을 상세하게 다뤘다.
50년 12월25일에는 대구 제일교회에서 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성탄 축하행사 도중 2층에 있던 전기난로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한 교인이 “불이야”라고 외쳤고, 교회 안은 먼저 빠져나가려는 신도로 아수라장이 됐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 당시 전기난로에는 불을 피우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영남일보는 전쟁 소식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사건사고도 신속하게 보도했다. 백승운기자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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