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간첩사건 ‘청춘의 족쇄’…詩로 그 시절과 “안녕”

  • 이춘호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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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16   |  발행일 2017-06-16 제34면   |  수정 2017-06-16
[人生劇場 소설기법의 인물스토리] ‘詩 전도사’ 박창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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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가꾸기를 끝내면 박 시인은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 호에 수록할 좋은 시 엄선 작업을 벌인다. 시작활동은 그 와중에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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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27년간 펴낸 시집은 모두 14권이다.

광복 이듬해 난 포항시 죽도오거리 죽도성당 근처에서 태어났다. 늘 페로몬 냄새 가득한 해풍이 날 에워쌌다. 그 바람과 햇살이 내 피부를 더욱 검푸르게 가다듬었다.

포항중 2학년 때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박주일 시인이 국어 선생으로 등장한 것이다. 2009년 작고한 박 시인은 내 시의 사부라 할 수 있다. 경주 출신인 그분은 평생 13권의 시집을 냈다. 표정과 자태는 조병화·황금찬 풍이었다. 84년 ‘대구문학아카데미’란 문예창작원을 개원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시만 생각하다가 간 어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분이 내 맘에 시를 파종한 것 같다. 가장 열성적으로 지도한 시는 유치환의 ‘울릉도’였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시를 낭송하면 그분의 입가로 하얀 침이 모여들었다. 난 그게 동해의 포말 같았다. 지금도 그 시만 생각하면 포항과 울릉도를 오간 청룡호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송도해수욕장은 내 유토피아였다. 입구엔 명물이었던 순백의 여인상이 있었다. 두 팔을 허공으로 치켜든 나상 버전의 그 여인 앞에서 친구들은 요상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시인이 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학교 성적도 꽤 좋았다. 하지만 시련이 닥쳤다. 고입 시험을 칠 무렵 난 피를 토할 정도의 급성결핵에 걸린다. 어머니는 매일 도라지무침과 보신탕을 안겼다. 그걸 장복한 덕분에 병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정신적 후유증은 지속됐다. 몸은 약해지고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대륜고에 들어가자마자 설상가상 한 유도 선생 때문에 생애 첫 흉터를 갖게 된다. 파리하고 초췌한 내 표정을 건방스럽게 본 그 선생이 날 연거푸 두 번 바닥에 패대기쳤다. 낙법을 잘못 치는 바람에 무릎을 크게 다쳤다. 일어서지도 못했다. 엉금엉금 기었다. 군기가 바짝 든 친구들은 날 부축해주지 않았다. 세상은 그랬다.

광복 이듬해 포항서 태어나 海風에 자라
中2 ‘사부’ 박주일 시인과 운명적 만남
국어수업 열성적 지도로 마음에 詩 파종

고입 시험 즈음 급성결핵에 약해진 심신
고교 진학후 교사의 폭행에 크나큰 상처
섬마을 교사 꿈꾸며 간 교육大서도 불운
여학생 구타와 정학, 그리고 청와대 진정

76년 국민학교 첫 발령 후 대구로 전근
이후 간첩사건 주모자 몰려 10여년 나락
그 사건이 詩 열정 되살려 시인의 길로



◆섬마을 선생이나 될까

졸업하고 대구교육대로 갔다. 섬마을 선생님이 되어 조용히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또 여학생 구타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학생은 당시 경북도 탁구대표. 나만큼이나 운동을 잘 하는 성격 괄괄한 여학생이 매 경기에 지고 들어오는 학우들을 ‘나가 죽어라’는 식으로 멸시했다. 난 분을 못 삭이고 그 여학생한테 손찌검을 했다. 학교는 내게 소명기회도 주지 않고 직권 정학처분을 내렸다. 난 꿀리지 않았다. 중간고사 시험 때 분풀이했다. ‘학장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내 정학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글을 모든 답안지마다 빽빽하게 적었다. 상명하복 시절, 누구 하나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흉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2학년 때 하사관 후보생을 위한 학군단에 지원을 했다.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달라진 법령 탓에 난 군에 징집당한다. 또 욱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등 관계요로에 편지를 보내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난 패닉 상태였다. 입대 전 10권이 넘는 분량의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채웠던 내 전부라 할 수 있는 젊음의 비망록을 모두 소각해버렸다. 그 노트에는 웬만한 한국의 명시, 유명 철학자의 명언이 잘 정리돼 있었다. 정학 처분으로 인해 교사에 대한 꿈도 희미해져 버렸다. 첫 휴가 때 교육대를 방문했다. 학교는 나로 인해 쑥대밭 형국이었다. 청와대 진정 건 때문이다. 내 문제로 중앙정보부가 현장 조사를 나왔다. 이 일로 학장과 학군단장이 면직된다. 난 교수들한테는 ‘저승사자’였다.

담당 교수가 날 챙기지 않았다면 난 교사가 될 수 없었다. 고향에 내려가 3년간 참기름집, 떡방앗간 등에서 일했다. 오전 5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돌아왔다. 잘못 살아온 나를 잊으려 일부러 나를 혹사시켰다. 드디어 76년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덕산국민학교로 첫 발령이 났다. 대구 동부정류장에서 오전 10시에 타서 정류장에 내려 내 숙소가 있는 곳까지 20리를 걸어가면 밤 9시 무렵. 완벽에 가까운 고요와 침묵, 그리고 어둠을 습작한 시기였다. 1년3개월, 기도로 살다시피 했다.

◆간첩사건에 또 휘말리다

울진에서 벗어나 대구 모 초등학교로 온다. 거기서 또 간첩사건에 휩싸인다. 현실은 날 시인으로 만들기 위해 날 ‘간첩’으로 만들 모양이었다. 어느 날 앞산 중앙정보부 직원이 날 잡아갔다. 승진에 목마른 사람이 사건을 조작해 날 간첩으로 신고한 것이다. 구속 직전에 이 사실을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대리로 계시던 둘째 형님에게 처음으로 얘기했다. 이 사건 때문에 나는 6개월 동안 바늘 끝 같은 일상을 보냈다. 제자까지 경찰의 미행과 조사를 받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전두환 시대라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이 종료되는 데 무려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사건을 뒤에서 조작했던 3명의 악령은 모두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간첩사건 주모자가 다 사라졌지만 난 더 괴로웠다. 사건 종료 후 바로 19년의 직장을 박차고 떠났다. 공립학교로 왔지만 누구나 다 한다는 교감·교장 한 번 못하고 정년을 맞는다. 간첩사건은 망각됐던 시에 대한 열정을 되살렸다. 그 사건 때문에 폭압적인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전두환 정권을 고발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문학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온다. 불의에 대한 저항, 정의에 대한 갈구, 평화에 대한 희망, 사회평등에 관한 염원 등을 내 1·2집 시집에 다 쏟아냈다. 이 시집은 사회고발적인 시이자 실천시였다. 굳이 등단과정을 밟을 필요를 못 느꼈다. 난 이 시집으로 지난 시절과 이별했다. 제3시집 ‘창밖에 내리는 별빛’의 첫 시 ‘그리움’은 “가을 하늘을 담은 듯 겨울 바다를 담은 듯 내 맑은 눈에 담긴 네 모습이 아마도 그리움인 게지”로 깔린다. 참여와 실천에서 난 서정의 세계로 돌아섰다.

◆주머니 속의 행복…시하늘

96년 공립학교로 오면서 내 맘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시하늘의 전신이 거기서 태어난다. 계간 ‘주머니 속의 행복’이다. 작고한 박곤걸 시인을 비롯해 최동룡, 김동원 시인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자금은 내 몫이었다. 도중에 뜻이 있는 사업가 한 명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를 발행인으로 등록했다. 사업가와 예술가는 근육의 구조가 좀 다른 것 같았다. 같은 일을 해도 생각의 방향이 달랐다. 결국 돈 때문에 헤어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머니 속의 행복이란 제호를 사용할 수 없어서 새로 만든 이름이 ‘시하늘’이다.

당시 이윤수 시인이 꾸려가던 ‘죽순’과 92년 대구의 첫 시 전문 계간지로 탄생한 ‘시와반시’가 대표적 시전문지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다른 문예지는 문예진흥기금도 받을 수 있었지만 시하늘은 사각지대에 있었다. 작은 잡지라 누구도 눈여겨보질 않았다. 그래도 난 ‘샘터’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고 언제든지 끄집어내 읽어 볼 수 있는 포켓용 잡지 같은 걸 만들고 싶었다.

후원은 언감생심. 초기 편집위원들은 국내 좋은 시를 찾아나섰다. 비용 때문에 사무실조차 별도로 마련할 수 없었다. 식당이 사무실이었다. 당시는 전자조판이 아니라 ‘육필원고’ 시절. 식탁은 졸지에 원고지로 가득 차 버렸다. 식당주의 눈총은 다반사였다.

2000년부터 시하늘로 개명된다. 시하늘이란 이름은 김동원 시인이 늘 좋아했던 시어 ‘시천(詩天)’이란 한자어를 우리말로 푼 것이다. 시하늘은 다른 문예지와 색깔이 달랐다. 다른 데는 등단제도가 있지만 우린 그런 게 없다. 시하늘은 ‘동학’ 같은 공간이다. ‘누구나 시인이다’란 생각이다. 특권의식도 배척한다. 시인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 대신 시만은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걸로 선별한다.

통권 85호를 맞았다. 여전히 지역 출판사 ‘그루’가 편집출간한다. 발행인은 시조시인 김석근, 난 편집주간이다. 심의위원은 11명, 편집위원은 14명. 매 회 취지에 맞는 전문작가의 사진을 구입해 표지에 깐다. 매번 다음카페 시하늘 회원까지 좋은 시를 추천해준다. 편집위원 등이 몇 차례 선별회의를 통해 80여수를 엄선한다. 누가 고른 게 아니고 모두가 고른 좋은 시다.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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