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하늘’로 詩心의 땅을 일구다

  • 이춘호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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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16   |  발행일 2017-06-16 제33면   |  수정 2017-06-16
[人生劇場 소설기법의 인물스토리] ‘詩 전도사’ 박창기 시인
1990년 등단 절차 없이 첫 시집 내며 작가로
일흔 넘도록 삶의 흉터·미움 품어안는 詩作
지금껏 펴낸 14권의 시집은 ‘또 다른 나이테’
96년엔 詩로 ‘행복의 씨’ 뿌리려 계간지 창간
20170616
우락부락하고 거무튀튀한 살갗의 박창기 시인. 문학과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그의 삶은 간첩사건 등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시적으로 돌변했다. 21년 도반인 계간 시잡지 ‘시하늘’을 통해 민들레 홀씨 같은 좋은 시를 세상을 향해 퍼트리고 싶은 게 그의 여망이다.

갓 일흔을 넘겼고 난 종일 성경 앞에서 서성거린다. 그렇다고 더 성스러워질 일도 없다. 생각해 보면 입신양명이란 얼마나 치명적인 구석이 있는가. 쭉정이 같은 허명이라도 챙기고 싶은 게 삶의 마지막 노욕(老欲) 아닐까. 도시로 향하는 욕망을 나름 다독거렸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욕망의 밑불은 제압이 어렵다. 난 심심함과 논다. 하체의 근육이 심심할 때면 잠시 텃밭에 가서 푸성귀한테 물을 주고 들어온다.

산적두목. 그래 난 꼭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래서 내가 시인이라고 하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당신이 무슨 시인’이란 뜨악한 표정이다. 그렇게 무시하지 마시라. 난 근육이 아니라 감성으로 사물을 포착한다.

내 삶은 흉터 가득하다. 남들은 잘도 피해갔던 ‘사람의 덫’에 자주 갇혔다. 그럴 때마다 증축된 흉터. 거기엔 ‘미움’만이 가득했다. 그 미움의 잣대로 세상을 맘대로 난도질했다. 남을 미워하는 것. 그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내게 미움을 주는 존재가 결국 나밖에 없다는 것도 오랜 세월 뒤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미움은 나를 성찰케 하는 ‘거울’이었다. 그 미움 탓인지 난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 덫은 세월이 내게 준 ‘배려’였다.

박창기로 태어나 ‘박창기 시인’이란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건 태어나서 44년이 지나서부터였다. 1990년 어느 날. 난 등단이란 절차도 거치지 않고 겁도 없이 첫 시집부터 출간했다. 다들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문예지 신인상, 추천 등을 통해 등단하던 시절이었다. 난 시인 자격보다 시집 자체가 더 절실했다. 솔직히 심사를 통과해야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예상대로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시인 사이에도 서열이 엄존했다. 유명시인과 무명시인 사이에 엄청난 크기의 크레바스(crevasse, 빙하 속의 깊이 갈라진 틈)가 가로놓여 있었다. 시인 앞에 무명과 유명이란 수식어를 붙을 수 있단 말인가. 난 유명도 무명도 싫었다. 그냥 ‘자칭 시인’으로 살다 죽자고 다짐했다. 새로운 시집이란 게 별건가. 뭐랄까, 내 시의 변화를 가늠케 해주는 하나의 ‘반성문’이었다. 그러니 새 시집을 굳이 알릴 필요도 없었다. 남의 반응보다 내 반응이 더 중요했다. 지금껏 14권의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은 날 성장시켜준 또 다른 ‘나이테’다. 그 시집을 순서대로 보관해주는 건 아내뿐이다. 아내가 유일한 독자라고나 할까.

어느 날부터인가 거리는 시인으로 흘러 넘쳤다. 하지만 시민들은 시와 멀어지고 있었다. 시인들만의 자화자찬이었다. 이 대목에 화가 났다. 그런 와중에 내게도 하나의 욕심이 생겼다.

시인이 아니라 시를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시’를 널리 보급해보고 싶었다. 익명의 소시민에게 향하는 시. 그건 ‘행복의 씨앗’이었다. 내 삶의 화두도 확실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시심(詩心)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박창기의 삶이라고 믿었다. 1996년이었다.

손바닥만 한 계간 시잡지인 ‘詩하늘’. 솔직히 시하늘은 21년간 지속된 가장 믿음직한 ‘도반’이다. 이놈들은 내게 삶의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남을 돕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돕는 일 아닌가. 하지만 일이란 원래 자기 돈이 들어가야 제대로 굴러가는 법. 적잖은 돈이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갔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그 돈은 전생 빚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사는 변화난측의 연속이었다. 무지개로 다가왔다가 먹구름만 안겨주고 떠난 사람도 있었다. 디딤돌 같았던 사람이 걸림돌로 돌변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익명의 후원자가 없었다면 시하늘은 사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시하늘을 들여다 보면 내 유년 최고의 놀이터였던 포항 송도해수욕장의 파도가 내 가슴속에서 출렁거린다. 오, 오뉴월이면 파란색과 흰색으로 극명하게 대비됐던 그 바다와 백사장, 그리고 그 경계를 핥고 지나가는 황홀한 해조음.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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