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 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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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02 09:56  |  수정 2018-01-02 11:37  |  발행일 2018-01-02 제28면
20180102
장미 作

야드는 담금질을 기다리는 철판처럼 달아올랐다. 바다를 향해 직선으로 뚫린 중앙로가 그늘 한 뼘 없이 지글거렸다. 옆으로 빛바랜 하늘색 공장 건물들이 삼각 지붕으로 솟아 있고, 대형 블록들이 늘어서 일광의 직격을 견뎌내고 있었다. 중앙로 끝 야적장에는 녹이 묻은 철판들과 비닐에 싸인 의장품들이 바닷바람을 맞고 있고, 지게차 한 대가 포크 위에 널찍한 철판을 얹은 채 힘겹게 방향을 돌렸다. 바퀴가 철판의 무게만큼 눌려 지면을 버텼다. 늘어진 철판 끝으로 마른 먼지가 부스러져 내렸다.

일 년 째 보아왔지만 여전히 자신을 외지인으로 만드는 풍경이라 생각하며, 성환은 허리를 숙였다. 안전화의 지퍼를 내리고 안전제일 마크가 새겨진 주황색 각반을 풀었다가 바짝 당겨 바짓단을 여몄다. 삐져나온 바짓단이 철사에 걸려 다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잘 여며야 했다. 지퍼를 올리는데 손가락 끝에 뭔가 묻어났다. 천천히 허리를 펴고 멍한 표정으로 손끝에 묻은 적갈색 가루를 보았다. 2주째, 하루에 한번은 꼭 어딘가에서, 가루가 묻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끝내 없어지지 않는 게 아닐까, 성환은 불쑥 의심이 들었다.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을 다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입어도, 어느 날 문득, 잊지 말라는 듯, 손에 가루가 묻어나올 지도 모른다.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한 듯,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순간 바다 쪽에서 습한 바람이 바닥을 쓸며 덮쳐왔다. 바람에 쇳가루가 섞였다.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지만 입안이 어느새 서걱거렸다. 땀에 젖은 목덜미에도 먼지가 들러붙었다. 혀로 입안을 훑어 침을 뱉어냈다. 목덜미를 손으로 한번 쓸어내고 턱끈을 조였다. 젖었다가 마른 재킷이 안쪽부터 다시 땀에 젖어갔다.



별다른 기술은 필요 없어. 끈기만 있으면 돼. 끈기만. 소개소 아저씨는 겪어본 사람이 겪어보지 못한 사람을 대하는, 조금 내려다보는 듯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스스로 딱히 끈기가 있는 편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길게 고민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조선소라는 곳이 궁금하기도 했고, 조건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두 달만 버티면 등록금이 나온다는 단순한 계산이었다.

소개소의 말은 사실이었다. 배 안에 케이블을 설치하는 일은, 끈기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야드에 간 첫날, 양기정은 성환이 할 일을 5초 만에 설명해 줬다.

어! 할 때 잡고, 가! 할 때 당겨.

그대로 했다. 어! 할 때 잡고, 가! 할 때 당겼다. 잡고 당기고, 잡고 당겼다. 잡고 당기고, 잡고 당기면서, 이런 일은 기계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계속 당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잡고 당기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가 케이블을 당기고 저녁에는 숙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 하나씩 점을 찍어 만들어가는 직선처럼 단순하고 더딘 시간이었다. 어떨 때는 케이블을 당긴 만큼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온통 쇠로 둘러싸인 좁고 어두운 선박의 내벽에 붙어 케이블을 당기고 있으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케이블 말고는 달리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음속에 정해둔 기한이 없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두 달이었다.

하여, 두 달이라는 기한이 사라져 버린 후로는, 그날그날 버텨낼 힘을 그날 안에서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점심 때 먹은 제육볶음이 맛이 있었다. 기름기가 많은 육질이 파와 함께 씹혀 밥이 잘 넘어갔다. 오늘은 칭찬을 받았다. 요즘 애들 같지 않게 끈기가 있다며 담배를 나누어 주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 바람이 어제보다 선선하고 쇠 비린내가 덜하다. 오늘은... 하며, 그러나 결국 버티는 것은 실은 버텨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눈치 챘다. 그것은, 걸음을 걷고 숨을 쉬고 안전체조를 하고 케이블을 잡아, 당기면서 시간의 경과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의지보다는 체념이 필요했다. 매순간의 목적을 다만 다음 순간을 맞이하는 것에 두었다. 계획과 목적 같은 것들은 사람을 지치게 하므로, 시간에 시비를 걸지 않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척, 시치미를 떼고 지나쳐왔다.



걷다보니 어느새 도크에 도착했다. 바다를 향해 길게 파인 도크 안에 배가 누워 있었다. 배는 터무니없이 컸다. 63빌딩을 옆으로 누인 것보다 크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근처를 돌아다니는 트럭이나 지게차 따위가 장난감 같아 보였다. 배는 소인국에 불시착한 걸리버처럼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좁쌀 만 한 사람들이 거체(巨體)의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있었다. 줄을 걸어 매달린 도장공들이 흘수선 경계에 페인트를 분사하고, 도크 아래서 고소차로 올려 진 사람들이 여기저기를 그라인더로 갈아댔다. 불똥이 분수처럼 튀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거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동력이 없는 까닭이다. 누군가는 거체의 구석구석으로 동력과 신호를 전달하는 케이블을 깔아주어야 한다.

성환은 마스크와 보안경을 쓰고 목장갑을 꼈다. 안전모의 조임 나사를 돌려 머리에 단단히 고정한 후 도크 다리를 건너 선미 쪽으로 올라갔다. 갑판 한켠에는 크레인을 기다리는 의장재들이 쌓여 있고, 또아리를 튼 케이블 뭉치들이 바둑알처럼 딱딱한 윤기로 볕을 튕겨내고 있었다. 옆으로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케이블 바인더와 도르래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 가운데 도면 뭉치를 한손에 든 양기정이 보였다.

양기정은 케이블 포설 2팀의 현장 책임자였다. 앞뒤 재지 않고 밀어붙이는 방식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납기를 잘 맞추었고, 이런 저런 수당도 잘 챙겨주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욕하면서 따랐다. 이야기할 때 가끔 아무런 맥락 없이, 상대를 쳐다보며, 배는 나가야할 거 아이가, 라고 따지듯 말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기억이 있었다. 배가 나가야한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었는데, 당연한 말을 굳이 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배가 나가는 것을 누가 막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한 말로 들렸다. 괜히 주눅이 들어서, 배는 나가야죠, 작은 목소리로 답했는데 양기정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습관처럼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대꾸하지 않고 다른 곳을 보며 양기정의 시선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양기정이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도면을 툭툭 쳐가면서 작업 위치를 지정했다. 둘러선 사람들의 눈이 양기정의 손끝을 따라다녔다.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를 배정받고 싶은 조바심일 터였다.

교육은 받을 만 하드나?

다가온 성환에게 양기정이 물었다. 빚 받으러 와 놓고 생활고를 걱정해주는 사람 같은 얄궂은 표정이었다. 성환은 바로 답하지 않고, 양기정을 마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른 태도로 양기정이 말을 걸어오자 조금 긴장됐다.

교육이야 뭐 받을 만하고 말고가 있나요.. 그냥 받는 거죠.

교육은 받을 만하지 않았다. 강사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마우스 버튼을 무심하게 눌러댔다. 협착, 추락, 질식, 절단, 화상, 감전, 낙하... 눈앞에 바짝 들이댄 돌맹이 무늬처럼, 별 뜻 없이 생생하기만 한 죽음들이,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죽음이 옆에 앉은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졌는데, 경각심보다는 안도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는 여기 앉아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욕봤다. 많이 힘들제? 근데 니이..

양기정이 말을 멈추고 성환의 눈을 보았다. 괜히 부담스러워진 성환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양기정이 늘어진 말끝을 당기듯 물었다.

눈이라도 봤나?

성환은 거짓말 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네?

멀 그래 놀라노? 맞나보네..태식이 가도 안됐지마는..내는 니가 더 걱정이다. 죽는 사람 눈을 보는기 그기 예사일이 아인기라.

살아 있는 눈이 가지고 있는 일렁임 같은 것들이 한순간에 스러지고, 고인 물처럼 정지하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한번 정지한 것 일 텐데, 성환의 머릿속에서는 매번 새로 정지했다. 정지한 눈은 항상 성환을 향했는데, 그 안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성환은 여전히 잘 믿어지지 않았다. 문득 궁금했다. 양기정은 누군가를 다감하게 위로하거나 걱정해 주는 성격이 아니다.

야 봐라. 이거 또 멍 하네. 니 진짜 조심해래이. 또 사고 나면 큰일 난대이.

말끝이 이상했다. 이상한 말이었다. 심상하게 씹던 음식에 뭔가 비릿한 맛이 돌 때처럼 쉬이 넘겨지지 않았다. 되묻는 말이 조금 급하게 나갔다.

무슨 일이 나는데요?

뭐..뭐라노?

양기정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큰일 난다면서요. 사고 나면. 사고 나면 나는 큰일이 뭔데요?

그기 아이고..사고 나면 큰일이라는 거지. 야가 와 말꼬리를 잡고 이라노.

양기정의 말끝이 뭔가를 덮으려는 듯 사납게 올라갔다. 그러나 얼굴에 드러난 당황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알 것 같았다. 보상, 문책, 징계, 사유서, 납기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사고가 나면 큰일이지만, 큰일이 나기도 한다. 번다한 수습의 과정과 징계가, 남은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일은 일대로 남고 납기가 미뤄지는 일도 없다. 화가 났지만,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직 자신을 보고 있는 양기정의 시선을 느끼며 성환은 애써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 안 나게 조심할게요.

가서 일봐라. 일 많다.

툭 던지듯 말하며 돌아서는 양기정을 보며 성환도 천천히 액세스홀로 향했다.



태식은 지게차에 깔렸다. 다리부터 허리까지가 바퀴와 바닥 사이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바로 죽지는 않고 몇 초를 더 살다가 죽었다. 호흡이 멈추던 순간은 알 수 없으나 눈이 멈추던 순간은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어느 순간, 죽음이 시작된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눈이 성환을 향하던 순간인지, 바퀴에 다리가 말려들어가던 순간인지, 안전통로를 버리고 강재적치장 쪽으로 길을 잡은 순간인지, 아니면 주춤거리던 성환의 어깨를 잡아채던 순간인지,..여전히 알 수 없고, 계속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채로 기억만 되새김질 된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장면 속에 핏물만 느리게 흐르던 순간, 자신을 담고 스러지던 눈을 보며, 성환은 느꼈다.

살았다.

죽었다가 아니라 살았다. 너는 죽었고 나는 살았는데, 내가 느끼는 것은 살았다. 지금 핏물을 쏟아내는 몸이 내 몸이 아니다. 팔로 뒤를 받친 채 온몸을 우들우들 떨었다. 지게차 기사가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아마도 그 기사가 강재 적치장의 그늘로 데려갔던 것 같다. 질척하게 피가 묻어 있는 옷을 입고 멍한 표정으로 강판 위에 앉아, 물어 올 말들을 떠올렸다. 왜 안전 통로로 가지 않았느냐. 왜 멈칫 거린 거냐. 혹은, 너 때문 아니냐. 답을 궁리했다.이렇게 혹은 저렇게 대답할 말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경위는 중요치 않은 것 같았다. 흔히 있는 사고가 한 번 더 일어난 것뿐이었다. 어차피 일 년에 열 명 이상은 꼬박꼬박 죽어나가는 곳이었고, 자주 일어나는 일은 어떤 일이든 예사가 되는 것 같았다. 자주 죽음이 있는 곳에서, 모르는 척, 못 본 척 시치미를 떼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좋은 방법인지도 몰랐다. 사고는 금세 수습되었다. 구급대가 바닥과 바퀴에 들러붙은 시신을 수습해갔고, 살수차가 와서 물을 뿌렸다. 작업자 몇이 짧은 솔이 촘촘히 박힌 기다란 밀대로 바닥을 긁어냈다. 핏물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작업은 두 시간 만에 재개되었다.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수습이었다. 뒤로 며칠을 새벽에 깼다. 꿈을 꾼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매번 기억나는 건 없고, 어깨가 저릿한 느낌만 아련하게 남았다. 어두운 숙소에서 혼자 어깨를 주무르며, 죽음에 대해 대답할 말들을 떠올리던 자신을 생각했다. 묻지 않는 사람들 보다, 묻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하던 자신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후 작업 케이블은 오백 미터짜리였다. 손목 정도 굵기였다. 서너 개의 액세스 홀과 또 몇 개의 사다리를 지나 배정 받은 위치로 들어갔다. 블록 천장과 전압기 사이의 좁고 어두운 틈새였다. 선로에 손을 뻗기 위해서는 들어가 누워야 했다. 누운 채로 팔을 뻗어 케이블을 잡았다. 왼편 허리께가, 튀어나온 볼트 머리에 눌려 아팠다. 볼트 머리를 피해 자세를 고쳐 누웠다. 통로 어딘가에서 밝은 빛이 터졌다가 사라졌다. 조금 더 어두워진 공기 속으로 푸르스름한 용접 연기가 퍼졌다. 천장에서 철가루가 떨어져 목덜미와 재킷 사이로 들어갔다. 목 뒤로 천천히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통로 저편에서 쇠막대기로 성마르게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업대기 신호였다. 성환은 침을 삼켰다. 구령이 시작되었다. 어!

가 ! 라고 답하며 미리 잡고 있던 케이블을 당겼다. 어! 할 때 잡고, 가! 할 때 당겼다. 어! 가! 어! 가! 템포가 점차 빨라졌다. 성환도 부지런히 팔을 움직였다. 한 번에 오십 센티 정도 씩 케이블이 지나갔다. 당길 때, 성환은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 처음과 같은 힘으로 일정한 길이를 당겼다. 손목 안쪽이 오래 돌린 기계처럼 뜨거워졌다. 이두근이 알이 잡혀 땡땡했다. 목장갑과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목에 선로 모서리에 긁힌 자국들이 더해졌다. 눈을 감았다. 구령 소리가 어두운 통로에 메아리 쳤는데 소리가 귀가 아닌 몸을 통해 직접 진동해 왔다. 일순 중력의 방향이 헷갈렸다. 누워 있는 게 아니라, 깊은 수직 갱도의 바닥에서 벽에 기대 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위에서 혹은 옆에서 계속해서 구령이 울렸다. 어! 가! 어! 가!

당기는 팔을 바꾸기 위해 자세를 열 번 정도 바꾸었다. 머리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고, 엎드려 보기도 했다. 점점 더 자주 자세를 바꾸게 되었다. 어떤 자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일이 있고부터 성환은, 그러나 자리를 가리지 않았다. 부러 힘든 자리를 자청하기도 했다. 일단 자리가 배정되면 묵묵히 버텼다. 몸이 편하면 생각이 시작되므로. 생각이 설치류의 이빨처럼 머릿속을 갉아대지 못하도록, 규칙적인 동작에 몸을 가두었다. 통로 저편에서 쇠막대기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령이 멈추었다. 쉬는 시간이었다.



갑판 위에는, 몇 조각 안 되는 그늘마다 사람들이 해를 피해 모여 있었다. 쪼그려 앉아 안전모를 벗고 젖은 수건을 털기도 했고, 지급받은 냉수 병을 목이나 이마에 대기도 했다. 숫제 얼굴에 냉수를 붓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별로 말이 없었다. 녹가루가 떨어지는 오래된 철판 같은 얼굴들을 하고 지친 몸을 쉬게 했다. 성환도 한 옆에 조용히 앉아 안전모를 벗었다. 눅눅한 머리 냄새가 올라왔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데, 선수(船首) 쪽에 거대한 쇳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덤프트럭 두 대를 합친 것 만한 철 구조물이 갑판 위 십 미터 정도 높이에 떠 있었다. 구조물 곳곳에 붙어 있는 러그마다 쇠줄이 팽팽하게 걸려 있었다. 위로 모아진 쇠줄은, 거꾸로 선 U자 모양의 골리앗 크레인에 연결되어 있었다. 크레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 그래 보고 있노?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김씨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20년 넘게 조선소에서 잔뼈가 굵었다. 용접, 도장, 절단, 못하는 것이 없었는데 내세울 만큼 잘하는 것 역시 없었다. 그때그때 돈을 많이 주는 일을 했다. 굵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항상 웃고 있었는데, 저렇게 웃을 수 있어서 20년을 버틴 건지, 20년을 버텨서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건지, 성환은 가끔 궁금했다.

그냥요. 저 줄이 안 끊어지고 버티는 게 신기해서요.

말해 놓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쇠줄은 수 십 톤 쇳덩어리가 저 높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유일한 이유였다. 쇠줄이 끊어지면 쇳덩어리는 떨어진다. 기를 쓰고 아래를 향하는 쇳덩어리와 기를 쓰고 버티는 쇠줄 사이의 팽팽함에 쇠줄의 소용이 있었다. 그러므로 끊어지기 전까지는 팽팽함을 견뎌야 한다. 끊어지지 않는 한, 끊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글제? 신기하제. 요즘은 쇠줄도 하나하나 다 관리를 하니 까네. 엔간해서는 안 끊어진다. 세상 차암 좋아졌제이.

그럼 전에는 저런 게 끊어지기도 했어요?

함은! 내 봤다 안 카나? S조선에서 일 할 땐데. 갑판에서 용접 때리면서 요래 앉아 있었거든. 근데 저만치에 블록 하나가 매달려가 살살 움직이고 있는 기라. 기우뚱 거리는 게 좀 불안하다 싶어서 잘 보고 있었제. 근데 바람 때문인가. 갑자기 크레인이 덜컹 하드 마는 쇠줄 하나가 탁 끊어져 뿐기라.


20180102
장미 作

어떻게 됐어요?
 어찌 기는. 조  됐지.
 아저씨가 사이사이 꺼멍이 낀 이를 드러내며 개구지게 웃었다.
 다행히 블록이 떨어지진 않았는데 끊어진 줄 하나가 휴게소를 덮쳐 뿐기라. 해필이믄 안에 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대. 한명은 천행으로 살았는데, 한명은..,
 하고 아저씨는 입맛을 한번 다시더니,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를 손날로 직선을 그려 보이면서 말했다.
 깨깟하게 반똥가리 나뿌렀지.
 살아남은 한명은 그 장면을 보았을까, 성환은 궁금했다. 멀리 선수 쪽으로 옮겨진 쇳덩어리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쇳덩어리가 바닥에 닿자 쇠줄은 긴장을 잃고 풀어졌다. 쇳덩어리와 쇠줄이 공히 안정했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러그와 쇠줄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누워, 쇠막대기 소리를 기다리다가, 성환은 오른손 장갑을 벗어보았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이긴 했지만 아직 섬약해 보이는 손이었다. 푸른 정맥이 지나가는 손등 여기저기에 거무튀튀한 쇠 먼지가 묻어 있었다. 태식의 손은 섬약하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 아버지의 손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손날이 두툼하고, 손톱 아래와 손금 사이사이에 이끼처럼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쇠를 많이 만진 사람의 손이었다. 태식이 손을 내밀며, 장태식입니다, 무뚝뚝하게 말했을 때, 성환은 선뜻 손을 마주 내밀지 못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태식의 눈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유난히 큰 눈이 두어 번 깜빡거린 후에야, 악수하자는 뜻이야, 라고 누가 뒤늦게 일러주기라도 한 듯 급하게 손을 내밀어 태식의 손을 맞잡았다. 손에서 쇠의 질감이 느껴졌다. 

 성환은 보고 있던 손을 무언가에 포개듯이 조심스럽게 어깨에 대보았다. 거슬거슬한 작업복 감촉 아래로 열 오른 몸이 느껴졌다. 천천히 손을 움켰다. 잡힌 곳이 저릿했다. 다시 손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섬약해 보이는 손이 괜히 못마땅했다. 뭔가를 잡아채기라도 할 것처럼 천장으로 손을 쭉 뻗었다. 순간 손바닥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손바닥 가운데 피가 비쳤다. 다시 보니 보강재 그늘 속에 비죽이 솟은 쇠붙이가 보였다. 고압 케이블 용 스틸 바인더였다. 바인더 끝이 조금 풀려 있었다. 주먹을 한번 쥐었다가 펴보았다. 통증이 제법 깊이 느껴졌다. 손금을 타고 피가 번졌다. 손바닥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피에서 쇠 비린내가 느껴졌다. 쇠에서도 피 냄새가 났던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철공소에서 녹이 슨 동가리 쇠를 주워와 사포로 문질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끝에 힘을 주어 문지르면 금세 녹이 벗겨지고, 뜨뜻해진 표면에서 밝은 광채와 함께 은은한 비린내가 올라왔다. 분명 그 냄새는 피 냄새를 닮아 있었다. 다시 코에 손바닥을 가까이 대보았다. 피 냄새가 새삼 비렸다. 이상하게도, 피하고 쇠에서 비슷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래 품어온 질문에 대한 답처럼 여겨졌다. 피에 쇠가 스몄다는 사실 아래에, 쇠에 피가 스몄다는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손바닥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오므린 후 천천히 장갑을 꼈다. 멀리서 쇠막대기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블이 끝없이 지나갔다. 어! 가! 어! 가! 손바닥의 상처가 점차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잘 멎지 않는 것 같았다. 장갑 안쪽이 기름이라도 먹인 것처럼 질척거렸다. 개의치 않고 계속 당겼다. 팔이 몸의 일부 같지 않았다. 독립된 장치처럼 구령에 맞춰 알아서 움직였다. 등이 땀으로 축축해지고, 몸이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달아올랐다. 엷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혼곤한 와중에 손바닥의 통증만 먼 밤길을 따라 다가오는 자동차 불빛처럼 점차 명료하게 느껴졌다.

 태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줄곧 조선소에서 일했다고 했다. 나이는 성환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조선소에서 일한 경력은 3년이 넘었다. 상대적으로 체격이 왜소한 성환은 내심 태식이 험한 말을 하거나 거칠게 굴까봐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태식은 서열이 분명한 집단에서 오래 지낸 막내의 깍듯함을 가지고 성환을 대했다. 도르래나 공구 따위를 가지러 갈 때는 먼저 무거운 것을 들었고, 담배를 피울 때는 성환의 담배에 불을 붙여 준 후 자기 담배를 꺼냈다. 케이블을 바인딩 하는 방법이나 안전 규정 따위를 알려 줄 때, 성환이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도 답답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눈을 살피며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조선소에 오고 두 번째 월급을 받은 날 성환은 태식과 술을 마셨다. 아버지의 철공소가 빚만 남기고 문을 닫은 다음 날이었고, 학교를 휴학하고 일을 더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막상 술자리에 가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할 줄 몰라서 안한 건지 하기 싫어서 안한 건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술이 얼근해졌을 때,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삼겹살을 뒤집으며 그냥 조금 더 일하기로 했다고만 이야기했다. 태식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조용히 술잔을 비우더니 대뜸 엉뚱한 말을 꺼냈다.
 형. 아침에 노래 안 나왔죠?
 매일 아침 7시 50분에는 야드 전역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노래가 나왔다. 안전을 강조하는 가사 때문에 안전송이라고 불렀다. 밝고 경쾌한 음색의 남녀가 부르는, 놀이 공원에나 어울릴 법한 분위기의 노래였다. 회색 빛 야드에 퍼지는 안전송은, 무뚝뚝한 사람이 짓는 억지웃음처럼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안전송이 나오면 사람들은 모여 체조를 했다. 일종의 준비운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노래가 나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안전송?
 성환이 되물었다. 태식이 조금 의아해하는 성환의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형 모르는구나. 안전송 안 나오면 전날 누가 죽은 거예요. 사망사고 있으면 다음날 안전송 안 나와요. 노조에서 요구했다고 하더라고요. 노래 틀지 말라고. 노래가 나오면 그것도 웃기잖아요.
 태식이 살짝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안전송을 흥얼거렸다.
 안전 좋아~ 안전 최고~오늘도 안전하세요~

 들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제 누가 죽었구나. 전혀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었지만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눈앞의 죽음은 아니었지만 발밑에 숨어 있는 죽음이었다. 처음 야드에 왔을 때, 어디에나 안전제일 마크가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던 순간이 떠올랐다. 녹색 십자가 둘레에 한 글자 씩 박힌 안. 전. 제. 일. 네 글자가 고개만 돌리면 보였다. 공장 벽에도, 천장에도, 크레인에도, 지게차에도, 안전모에도 작업복에도, 신고 있는 안전화에도...어디에나 보이는 안전제일이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아 섬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감각해졌다. 어제 누가 죽었대. 이번엔 떨어져 죽었다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무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 팔을 움직이는데 멀리서 쇠막대기 소리가 들리고, 이어 스톱! 스톱! 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성환도 스톱이라고 소리 친 후 몸을 굴려 자리를 빠져 나왔다. 케이블이 지나가는 경로 곳곳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김씨 아저씨가 긴장된 어투로 말하며 다가왔다.
 성환아. 일 났대이. 어서 올라가자.
 궁금했다. 케이블 작업 자체는 사고가 별로 없는 작업이었다. 도르래에 손이 끼어 다치는 경우나 허리를 다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아저씨가 저렇게 긴장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아저씨는 못들은 것인지 대답 없이 휘적휘적 앞서갈 뿐이었다. 멀리 액세스 홀 아래서, 양기정이 굳은 얼굴로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어두운 통로를 걸어가며, 무릎 언저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한발 한발 나아갈수록 떨림은 심해졌다. 험한 등산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처럼 다리에는 힘이 없고, 바닥을 디디는 발끝이 푹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몸에 힘을 주기 위해 주먹을 쥐다가 어깨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손바닥의 통증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기억하기 싫은 일이 강제로 반복되는 꿈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올라가면 다시는 마주하기 싫은 장면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떨리는 팔다리를 추슬러, 사다리를 밟아 올라갔다. 어둠 속으로 부연 먼지가 떠다니고 있었다. 잠시 멈춰 위를 보았다. 어제보다 무거워진 하늘이 액세스 홀에 갇혀 있었다. 한 손을 떼고 다음 칸으로 손을 뻗었다.
 
 액세스 홀에서 빠져나온 성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비닐을 뜯지 않은 케이블 뭉치 위에 양기정이 앉아있고, 김씨 아저씨가 그 앞에서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성환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약간의 어지럼증도 느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뭔가 기대하던 장면을 놓치기라도 한 것 같은 허탈함도 같이 느껴졌다. 천천히 사람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 미터 때문에 그기 말이 되나?
 김씨 아저씨가 평소와 다르게 날을 세우며 말했다. 아저씨를 대표 격으로 세워두고 사람들이 둘러섰다. 양기정은 대답할 말을 고르는 듯 도면만 보고 있었다.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와 말이 없노? 오 미터 때문에 그기 말이 되냐고. 요번 거는 그냥 몬 한다. 관리 책임 아이가?
 성환도 곧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케이블 길이가 잘못 계산되는 경우가 드물지만 종종 있었다. 다 설치된 케이블이 길이가 짧으면 되감고 다시 깔아야 했다. 그럴 때 원청과 하청은 책임 소재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오백 미터를 되감고 다시 깔려면 천 미터 작업이었다. 일이 컸다. 조용하던 양기정이 입을 뗐다.

 마 죄송하게 됐고요. 우짜겠습니까? 이대로는 배가 몬나간다 아입니까?
 달래는 것 같기도 하고 배짱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한 말이었다. 사실이기도 했다. 십 미터가 부족하든 오 미터가 부족하든 케이블을 연결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케이블이 연결되지 않은 배는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둘러선 사람들의 눈이 양기정에게 집중되었다. 김씨 아저씨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확인 잘 하라꼬 관리자들 있는 거 아이가? 납기만 쪼을 줄 알지.
 양기정이 고개를 바로 하고 아저씨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라고예?

저씨도 마주 노려보았다. 시선을 양기정의 얼굴에 두고 입에 문 담배에 천천히 불을 붙였다. 잇새로 연기가 새어나왔다. 양기정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먼 망치 소리가 울렸다. 신호수 고함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성환은 문득 지금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정색하고 있는 양기정도, 노려보는 아저씨도, 둘러선 사람들도 다 우스웠다. 되감으면 되는 것 아닌가. 되돌릴 수 있는 일은 되돌리면 되니까.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무감하고 되돌릴 수 있는 일에 유감한 사람들이 유감스러웠다. 아저씨 뒤에서, 혼잣말처럼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배는 나가야죠..
 김씨 아저씨가, 뭐고, 하는 얼굴로 돌아봤다. 아저씨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이 성환을 돌아보았다.
 성환이 조금 화난 사람처럼 다시 말했다.
 되감으면 되잖아요. 되감으면.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머라노, 시비조로 힐난하는 사람도 있었고, 조금 걱정하는 눈으로 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집중되었던 분위기는 흐트러져 버렸다. 양기정이 때를 놓치지 않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자 성낸다고 케이블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니까네, 숨 좀 돌리고 다시 함 해 보입시다.

 김씨 아저씨는 완전히 돌아서서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사람들은 어색하게 양기정과 아저씨를 흘금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양기정을 향할 때 양기정은 피하지 않고 하나씩 마주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을 지배하던 분노는 머뭇거리는 눈짓들 사이로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지친 표정으로 돌아가 말이 없어졌다. 눈앞에 놓인 케이블 뭉치처럼 단단한 사실 하나만 사람들의 침묵 속에 남아 있었다. 양기정이 도면을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배는 나가야 할 거 아이가..
 김씨 아저씨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환을 한 번 더 보았다. 성환은 아저씨를 외면하고 안전모를 고쳐 썼다.
 
 어!
 가!
 다시, 케이블을 당겼다. 케이블이 갔던 길을 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당길 때, 케이블이 되감아져 나오는 시간은 배안으로 들어가는 시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케이블을 당기는 일의 내용은 방향과 무관했다. 한 번에 당겨지는 길이가 같았고, 당기는 힘과 호흡이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케이블을 당기는 일이 시간을 되감는 일처럼 느껴졌다. 케이블을 되감으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돌려 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힘이 들수록 외려 묘한 희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손바닥의 통증도 날카로운 느낌을 잃고 둔하게 퍼져 견딜 만했다. 당겼다. 당기고 당겼다. 당기고 당기고 당기고 당겼다, 그러다가 주욱.

 손이 미끄러졌다. 다시 당겨보아도 오른팔에 힘이 걸리지 않았다. 손이 케이블을 제대로 쥐지 못하고 있었다. 쥐지 못하는 손아귀 사이로 케이블이 계속 움직였다.
 어! 가! 어! 가!
 완전히 손을 놓아 보았다. 검은 피복에 싸인 케이블이 기계적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케이블을 잡고 있을 다른 손들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익숙한 얼굴들이 그 손들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같이 당기던 손 하나가 사라져도 계속 당기게 되어 있는 손들의 관성이 소름끼쳤다. 사람들은 함께 당기고 있었지만, 당기는 순간에는 혼자인 것 같았다. 각자 눈앞의 케이블만 겨우 당겨내고 있었다. 어두운 선로에서 사람들은 서로 멀었고, 밭은 숨으로 외치는 어! 가 ! 어! 가! 로 서로의 호흡을 규제하고 있었다. 그 호흡 안에서, 사람들이 케이블을 당기는 것인지 케이블에 당겨지고 있는 것인지 성환은 헷갈렸다. 고함 소리가 들렸다.

 누가 안 땡기노!
 다시 케이블을 잡아보았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케이블이 다시 미끄러졌다. 케이블을 두고 손을 폈다. 장갑 손가락 끝을 하나씩 당겼다. 당길 때마다 장갑과 살이 붙어 있던 곳들이 툭툭 떨어졌다. 장갑을 손목에서부터 천천히 벗겨냈다. 움직이는 케이블 위로 적갈색 가루들이 떨어져 내렸다. 다시 누군가 소리쳤다.

 누가 안 땡기노! 어이? 놀러왔나!
 잠시 후 쇠막대기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블이 움직임을 멈췄다. 성환은 장갑을 벗겨낸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벌어진 상처 주변으로 노란 고름이 엉겨있고, 주변은 도도록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손금을 타고 퍼진 피는 굳어 가루가 되어 있었다. 입을 이용해 남은 장갑도 마저 벗었다. 여기저기 검은 용접먼지나 쇳가루 따위가 낀 왼손이 창백했다. 왼손으로 상처 주변을 쓸어냈다. 묻어 있던 쇳가루에 핏가루가 섞였다. 섞이고 보니 구분되지 않았다. 손가락을 비벼보았다. 가루들은 손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성환은 자기 손을 처음 보는 것처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양기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니 머하노?
 성환은 대꾸하지 않고 손만 보고 있었다. 양기정이 한걸음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야! 김성환. 안 들리나? 니 뭐하냐꼬!
 성환은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섞였어요.
 뭐라노?
 양기정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섞였다고요. 쇠하고 피가. 쇠하고 피가 섞여서 안 떨어져요.
 
 식당에 앉아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과 들기름에 볶아낸 청경채, 두툼한 무가 얹힌 고등어조림, 된장국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리려다 붕대가 감긴 손바닥을 보고 손을 내렸다. 소독약을 붓다시피해서 씻어내며 이 정도 상처는 바로 병원에 왔어야 한다고 나무라던 사내병원 의사가 떠올랐다. 손바닥 이곳저곳을 찌르며 반응을 본 뒤, 다행히 신경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약솜으로 꼼꼼하게 닦아낸 후 여섯 바늘을 꿰맸다. 두 달 정도는 오른손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두 달 정도는 오른손을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왼손으로 국을 한 숟갈 떠먹었다. 국물을 조금 흘렸다. 젓가락은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고등어의 살을 떼어내고 무를 조각내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섞인 밥과 찬이 달았다. 삼키고 다음 숟갈을 뜨는데 살짝 목이 멨다. 고개를 돌렸다. 멀리 창밖으로, 도크에 얹힌 배가 바다를 향하고 있었고, 크레인이 수십 가닥의 쇠줄에 매달린 블록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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