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등 3미·정순순대·숙성맥주골목 명물…블랙닭강정·왕만두 별미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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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6   |  발행일 2018-04-06 제35면   |  수정 2018-04-06
■ 푸드로드 ‘전북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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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서민의 애환이 스며들어 있는 익산 중앙시장 내 ‘정순순대’의 피순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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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장과 오징어먹물, 파 등이 들어간 중앙동 ‘예스닭강정’의 블랙닭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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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당’ 왕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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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법 바게트 가루가 인상적인 ‘풍성제과’의 옥수수 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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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명물인 ‘엘베강’ 숙성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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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하구로 흘러드는 성당면 산북천의 바람개비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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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교도소 세트장 펜스에 걸린‘사랑의 수갑’.

황등풍물시장 입구 왼쪽 도로변에 있는 ‘진미식당’. 좀 소담스럽다. 주방에선 컨베이어벨트처럼 비빔밥 공정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3대 사장 이종식씨(50). 식당 일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궂은 일을 만끽하고 있다. 그를 보면 가업이란 게 참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장비빔밥이 술을 겸할 수 있는 반면 여기는 술보다 ‘밥’에 치중한다. 1931년 오픈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돼 이 사장한테까지 가업이 이어졌다. 이 사장의 어머니 원금애씨는 팔순임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식당의 중심을 잡아준다. 그녀는 2대 사장으로 익산을 대표하는 비빔밥 명인으로 평가받는다. 전주비빔밥 명인이기도 한 전주의 ‘가족회관’ 김연임 사장과 비슷한 세월을 살았을 것 같다.

황등면이 비빔밥 동네로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진미식당 덕분이랄 수 있다. 초대 사장 고(故) 조여아씨가 시장에서 좌판 같은 식당을 처음 열었고 그의 딸 원씨가 물려받았다. 진미식당은 토박이한테 보신탕을 잘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황등풍물시장 3대째 가업 진미식당
황등면 비빔밥 동네 알려진 일등공신
전주와 같이 황포묵, 선짓국 곁들여져

역전중앙동 계란찜 빠트리지 않는 백반
비비지 않은‘비빌 비빔밥’새 버전 등장
오징어먹물과 춘장 어우러진 닭강정
질박한 만두소 만두·추억표 가락국수
풍성제과 옥수수식빵‘마성의 빵’등극



◆진미 & 한일 & 분도, 비빔밥 열전

진미식당의 비빔밥 레시피는 상당히 정교하다. 조리 구역도 공정별로 나눠뒀다. 선짓국 끓이는 공간, 밑간 해서 비비는 공간, 비빈 밥 위에 갖은 고명을 올리고 나서 센 불에 살짝 볶아내는 구역 등으로 쪼개져 있다.

주문 즉시 이 사장이 시동을 건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삶은 콩나물을 넣고 사골국물에 여러 차례 토렴한다. 그리고 물기를 덜어낸 뒤 콩나물이 적당한 크기가 될 수 있도록 가위질한다. 여기에 고추장, 고춧가루, 참기름 등을 넣고 비빈다. 그것도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하다. 밥과 양념이 어떤 각도로 만나야 맛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된다. 손님이 직접 비비는 것과 내공이 다를 수밖에 없다. 대단한 주방 도구가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숟가락으로 슥슥 비빈다. 다음엔 밥그릇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당근과 상추·시금치 나물·김가루·황포묵, 그리고 황등비빔밥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소고기 육회 한 줌을 얹고, 마지막엔 깨소금을 넉넉하게 뿌려서 살짝 화기를 얹어주면 된다. 볶는 것은 식감을 떨어트릴 수 있는 풋내 제거과정. 그렇게 만들어놓고 한 그릇 가격은 고작 8천원.

한 점 떠먹어봤다. 시장비빔밥보다 훨씬 싱거운 맛이 전해진다. 전주비빔밥에 반드시 들어가는 황포묵이 진미식당에도 들어간다. 전주의 황포묵보다 더 탱글탱글하다. 꼭 곤약 같다. 전체적 포스는 고추장을 넣고 비벼낸 안동 헛제삿밥과 비슷하다.

황등비빔밥에는 그림자처럼 선짓국이 따라다닌다. 초창기 ‘술국’으로 불렸던 선지해장국의 전통이 비빔밥에 그대로 스며들어간 모양이다. 진주비빔밥 옆에도 선지가 들어간 ‘보탕국’이 나오는데 이와 비슷하다. 진미식당의 선짓국은 꼭 우동 육수와 멸치 육수를 합쳐 놓은 것 같다. 그 맛을 기억한다면 다음날 아침 익산의 대표적 콩나물국밥집으로 불리는 ‘일해옥’의 식탁에 앉아 있어야만 될 것 같다.

‘한일식당’은 관광객한테 덜 언급되는 것도 사실이다. 1975년쯤 문을 열었다. 초대 사장 김복예. 그 가업이 김 사장의 언니한테 전해졌다가 외손녀 김현정씨(47)가 2011년 3대 사장으로 나섰다.

한일식당의 비빔밥은 다른 세 곳과 좀 다르다. 다른 곳은 토렴하지만 여긴 그렇게 하면 맛이 묽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토렴하지 않고 고슬고슬한 밥에 선짓국물을 조금 넣은 뒤 살짝 볶으면서 훈김을 줘서 상에 낸다. 특제 양념장도 독특한 레시피를 갖고 있다. 주재료는 돼지 항정살. 그걸 삶아서 간장, 고춧가루, 마늘 등을 넣고 만든다. 고명도 그렇게 많지 않다. 시금치, 배추, 호박 등이 전부다. 진미식당이 사용하는 황포묵 대신 여긴 도토리묵을 넣는다. 그게 전체적으로 식감을 풍성하게 한단다. 물론 육회가 들어간다. 한우 우둔살에 고춧가루와 마늘, 참기름 정도만 넣고 비벼 만든다. 여긴 특이하게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추장이 들어가면 된장 냄새가 풍겨 식감을 방해한다는 게 김복예 할매의 생각이다. 한일식당은 비빔밥 이외에 갈비전골도 잘 한다.

시장 상가 안에 자리를 잡은 ‘분도식당’. 28년 전 황등면의 대표적 식육점 겸 로스구이 전문점으로 자릴 잡았다. 비빔밥은 파생 메뉴. 15년전부터 황등비빔밥 스타일의 비빔밥을 점심특선으로 낸다. 원래 주먹시 구이는 물론 육사시미로도 정평이 나있다. 밤엔 단골에게 2천원 받고 특미 분도비빔밥을 제공한다. 고기 기름이 스며들어가 있는, 갓 구이를 끝낸 돌판에 묵은지와 김가루를 넣고 볶아주는 돌판비빔밥을 닮았다.

주인 최영오씨에겐 여전히 고기가 주메뉴다. 초창기엔 돼지 육사시미도 내놓았다. 비빔밥은 점심 때만 판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새우, 멸치, 액젓 등이 들어간 양념으로 만든 ‘무생채김치’를 고명으로 올린다는 것. 먹어보니 가장 밋밋한 맛일 것 같은 분도식당의 비빔밥이 가장 내 입에 맞았다.

◆익산표 백반

황등시장의 명물은 ‘황등3미’. 비빔밥·백반·갈비전골이다. 예전엔 석공들이, 나중엔 원광대 학생과 직원들이 많이 먹었다.

전라도엔 도시마다 자기식 백반이 있다. 익산 백반에는 흥미롭게도 계란찜을 빠트리지 않는 게 특징이다. 예전에는 백반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는데 이젠 패스트푸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황등면의 경우 ‘방교가든’이 아직도 자기 소리를 내고 있다.

익산역전 중앙동 예술인거리 초입에 오면 백반 전문 ‘백여사식당’이 있다. 여사장은 오래 요리를 해 본 포스다. 뭐든지 뚝딱 잘 만들어 준다. 1인분 7천원짜리 백반을 먹었다. 달래와 냉이무침, 심심한 된장국, 고등어구이, 게장, 그리고 직접 담근 전라도풍의 묵은지가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 숭늉으로 식사를 끝냈다.

맞은편에 새로운 버전의 황등비빔밥이 등장했다. ‘익산비빔밥 전문점’. 비빈 황등비빔밥에 거부감을 느끼는 관광객을 위해 날계란과 새싹 등을 올린 ‘비빌 비빔밥’으로 도전장을 냈다. 아직 제대로 된 울림을 내기 위해선 고명에 대한 호흡조절을 고민해봐야 될 것 같다.

35년 역사의 중앙동 ‘군산식당’. 각종 제철 생선탕으로 꽤 유명하다. 봄철에는 금강 황복탕이 압권이다. 그리고 대하탕, 홍어탕, 서대탕 등은 미식가들만 알고 찾아 온다. 언니한테 가업을 이어받은 임귀임 여사장(68)의 뒤를 이어 아들 김해성씨가 식당수업 중이다.

◆익산음식은 회관에서

익산은 95년 주민투표를 통해 이리시를 품어버렸다. 77년 이리역폭발사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익산 피순대 전문점인 중앙시장 내 ‘정순순대’는 그날의 악몽을 잘 기억하고 있다.

익산의 묵은 맛이 그리워서 한때 익산에서 가장 다양한 식당과 클럽 등이 즐비했던 ‘중앙동 먹자골목’을 잠시 누볐다. 골목은 재개발 대상이 될 정도로 낙후됐다. 70년대의 영화는 온데간데 없다. 대신 익산만의 ‘숙성맥주골목’은 나름 명맥을 잇고 있다. 원조는 82년 김칠선 할매가 역 앞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 역 앞에 차린 ‘엘베강’이다. 여기 맥주는 급속냉각기를 사용하지 않고 사전에 잘 숙성시켜 맛이 탱탱하고 기름지다. 초창기 엘베강의 인기 안주는 오징어눈. 이제 엘베강은 혈족들이 앞장서 체인맥주 ‘역전할머니맥주’로 키워냈다.

익산에는 익산만의 ‘회관문화’가 있다. 신선로, 삼계탕, 불고기, 로스구이, 갈비탕, 초밥, 회, 돈가스, 카레라이스…. 익산에서 회관하면 한식·양식·일식·중식 불문 ‘전천후폭격기 식당’. 70년대 회관문화는 예식장과 동고동락했다. 중앙동에선 ‘영빈관’과 ‘신사임당’ 예식장이 쌍두마차였다. 당시를 풍미한 회관은 화신, 영빈, 호남, 낙원, 등대, 중앙, 수복, 실비, 신흥, 송명, 고려 등이다. 이들 회관은 2층 연회석을 다 갖추고 있었다. 예식장 손님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많던 식당들은 새로운 외식문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다들 백기를 들고 말았다. 중앙회관이 생선구이전문점으로 변하듯.

현재 회관거리를 고수하고 있는 마지막 증인은 ‘영빈회관’. 장석만 오너셰프는 익산에서 가장 그럴듯한 영빈정식과 회정식을 빚어낸다.

◆익산별미 스토리

익산에 와서 짠한 사람을 만났다. 정명환씨(56). ‘어쩌다 식당주’가 됐다. 포항 출신의 토목기술자로 16년간 번 돈을 지인 한테 사기당해 파산했다. 고향이 싫어서 18년 전 익산으로 망명했다. 단돈 2천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신개념 닭강정을 만들고 싶어서 속초와 인천의 닭강정 명가를 순회하는 등 1년간 별별 레시피를 다 섭렵하면서 ‘예스닭강정’을 오픈했다. 기존 닭강정과 차원이 다른 오징어먹물과 춘장, 그리고 생파가 어우러진 ‘블랙닭강정’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론칭한다. 먹물 파스타에서 힌트를 얻었다. 반죽은 밀가루, 쌀가루, 콩가루, 마늘 등을 섞어 만든다. 원광대 등에 입소문이 났고 3년 전 모 방송에 노출되면서 전국적 인지도를 갖게 된다.

영빈회관 근처에 있는 ‘고려당’. 익산 대표 만두집으로 불린다. 요즘처럼 잘 생긴 만두가 아니라 투박한 모양의 ‘옛날표 왕만두’. 만두소도 요즘 것보다 더 질박하다. 추억표 가락국수를 만두와 함께 먹으니 갑자기 ‘홍익매점’이 생각난다. 현재 손녀 김혜경씨가 3대 사장인데 아직도 창업주 김명숙 할매가 주방을 지킨다. 재료가 떨어지면 일찍 문을 닫는다.

이와 연장선상에 있는 ‘웃기는 짜장집’이 낭산면에 어둑하게 숨어 있다. ‘간판없는 짜장면’ 집이다. 12년 전 ‘시거리’란 간판이 태풍에 날아가버려 지금껏 무간판이다. 인터뷰조차 거부하는 김세경 사장. 그는 여느 중식당과 달리 볶지 않고 장을 끓인다. 그 위에 고춧가루와 파를 올리는, 37년 외길 한국표짜장이다.

익산은 이상하게 오래 된 빵집이 없다. 찾아낸 게 마동의 동네빵집 ‘풍성제과’(사장 전철남).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빵을 붐업시켰다.

최근 TV ‘생활의 달인’에 ‘옥수수 식빵 장인’으로 소개된다. 나도 아침 일찍 한 덩어리를 샀다. 3천원. 싸다. 구름을 들고 있는 것처럼 폭신거리는데 먹으면 졸깃하다. 풍미도 장난이 아니다. 여태 먹었던 식빵과 식감이 확연히 다르다. 감칠맛의 주범은 바게트. 1개월 건조시킨 바게트에 멸치·소금을 입혀낸 뒤 재건조해야 얻어지는 비법가루. 그래서 연령불문, 남녀노소 사랑하는 ‘마성의 빵’으로 등극한 모양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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