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湖之音’…4대를 이어온 ‘깊은 소리’

  • 이춘호
  • |
  • 입력 2016-01-15   |  발행일 2016-01-15 제33면   |  수정 2016-01-15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경주 정순임 명창
20160115
▲ 명창의 길, 혼자 독야청청해도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선대로부터 전승한 소릿제를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도 명창의 중요한 소임이다. 정 명창이 북채를 잡고 제자를 위해 시창을 해보이고 있다. 소리에 임하면 눈매도 서릿발처럼 일어선다. 그녀의 소리가 종이를 찢고 허공으로 솟구칠 기세를 보이고 있다.


경북도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19세기부터 명창 줄이어
2007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전국 첫 판소리 명가로 선정

홍시를 청동빛으로 얼려버린 병신년 첫 동장군. 그것에 감금된 새벽녘. 일흔 고개를 넘어서자 내 잠의 부피는 더 홀쭉해진다. 초벌잠에서 깨어나 재벌잠을 청해보지만 머릿속만 더없이 초롱거린다. 이불을 걷고 좌정했다. 단가 ‘사철가’의 첫 구절 옆에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붙여 담묵처럼 풀어냈다. 지난밤 쌓였던 묵직한 피로가 단번에 증발한다. 박동실제의 심청가, 김세종제의 춘향가, 박봉술제의 수궁가. 박녹주제의 흥보가, 박봉술제의 적벽가, 평생 흉중에 품은 금쪽 같은 그 판소리가 나를 살게 하는 ‘부적’이다. 내가 판소리고 판소리가 나인 셈. 느리디 느린 진양조와 계면조의 극치인 애원성의 율조에 내 맘을 올리면 판소리꾼만이 만끽할 수 있는 극치감에 닿는다.

사위는 깜깜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떡목(고음부의 음역이 좋지 않아 자유로운 소리 표현이 안 되고 소리가 심하게 거친 목)’ 같은 설한풍이 대문 옆에 걸린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 현판을 핥고 지나간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이 빤히 보이는 야트막하고 더 없이 고즈넉한 동네. 멀리 자그마한 낙락장송이 보이고 가끔 그 곁을 날아가는 백학도 창 너머로 보인다. 연구소 입구에는 지난 태풍에 한쪽 팔을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고졸하고 기굴한 기운을 뿜어내는 고목이 동네를 수호하고 있다. 다른 동네는 21세기라지만 여기는 아직 20세기에 한 발을 담그고 있다. 나는 이 분위기가 소리하기에 더 없이 좋다.

좌정하고 촛불을 피워올렸다. 1998년 세상을 떠난 액자 속 어머니 사진을 본다. 내 어머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조선의 마지막 여인 같다. 한국의 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걸 경주에 알려주고 간 만능 국악인이었다. 93년 문화체육부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해 어머니는 가야금병창으로 경북도 무형문화재 19호 명인이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예술 이상으로 신산(辛酸)스러웠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젊은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좋게 찍은 흑백사진을 올려다 본다. 저 사진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주는 또 다른 ‘타임머신’. 저것을 통해 내 핏줄 여행을 시작한다.

요즘은 꿈이 일상보다 더 또렷하고 짙다. 나이가 든 탓이리라. 지난밤 어머니는 나와 원격통화를 하고 싶었는지 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저승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다. 산 공부를 들어온 몇몇 제자들은 이런 기척을 알 리 없이 곤히 자고 있다.

올해 내 나이 일흔넷. 2007년 1월 나는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홍보가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2013년에는 부산에서 박송희, 남해성, 최승희, 유영애, 김수연, 조소녀, 김영자, 신영희, 안숙선 등과 함께 ‘여류명창 10인10색 눈대목 공연’도 했다. 갈 길은 아직도 멀지만 그래도 소리에 입문해 첫 관문은 통과한 것 같다. 봄의 푸른 잎이 겨울까지 푸릇할 수는 없는 법. 열정은 아직도 정정하지만 솔직히 호흡과 율정(律情)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럴 때마다 숙명 같은 판소리가문이었던 외가의 가계를 더욱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본다.

지난해 마지막날 그토록 고대했던 귀한 책 한 권이 출간됐다. ‘장월중선의 예술세계’(민속원 간)다. 이에 앞서 2007년 6월 우리 가문에 또 다른 경사가 났다. 문화관광부로부터 ‘판소리 명가’로 선정됐다. 판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던 동리 신재효의 고향인 전북 고창 등 전국 판소리 명가 등 3대 이상 국악 명문가 중 우리 가문이 엄선됐기에 나는 더더욱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우리 가문에는 숱한 명창이 줄을 이었다.

나의 인생을 둘로 쪼개면 한쪽은 호남, 또 한쪽은 영남의 소리에 닿아 있다. 한때는 목포권, 60년대 중반부터는 경주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소리와 기색(氣色)을 곱씹어보면 영남과 호남의 합작품 같아 어떤 때는 내가 꼭 ‘영호지음(嶺湖之音)’같다.

내 생애 첫 소리는 경주가 아니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목포다. 내 유년의 소리는 거기서 싹텄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