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집안 외가 10여명이‘명창’…장판개 큰외조부 스승이 송만갑 선생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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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15   |  발행일 2016-01-15 제34면   |  수정 2016-01-15
4대를 이어온 ‘소리’…경주 정순임 명창
20160115
판소리는 서양음악처럼 일정한 악보가 없다. 그래서 혼자 배우기가 불가능하다.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밥상머리교육’처럼 한 소절 한 소절 따라 부르며 익힐 수밖에 없다. 일조일석에 완성될 수 없는 명창의 길이기에 사제 간의 정은 혈육의 정을 넘어선다.
20160115
정순임 명창은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판소리 연구소에 산공부 하러 온 한 제자의 누더기 같은 판소리 심청가 대본. 얼마나 많은 손길이 스쳤던지 종잇장이 으스러져버렸다.


만능 국악인 장월중선이 어머니
연주 못지않게 작창 능력도 탁월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 등 수상
다들 서울 진출을 권했지만 거절

국극단 공연 구경한 후
배우지도 않은 내용을 몽땅 외워
이것이 내 운명이다 생각

내가 소리꾼 길 가는 것을
어머니는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 떠난 후
나를 포함 4남매 모두 국악의 길

대한민국의 판소리에는 다양한 유파(소릿제)가 존재했다.

통상 섬진강을 가운데에 두고 그 동쪽은 소리가 우람찬 동편제, 서쪽의 아리고 갸날픈 서편제로 나눠지는데 동편제의 종장은 전남 남원을 중심으로 한 송흥록, 순창을 중심으로 한 박유전은 서편제의 종장이다. 송흥록의 손자가 그 유명한 송만갑이다.

18세기에 등장한 판소리의 최고 전성기는 유성기 이전 시대였다. 특히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 소리꾼의 몸값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TV와 라디오조차 없던 시절, 직접 소리꾼을 만나야만 소리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창의 최고 데뷔 무대는 풍류를 아는 사대부가의 정자나 사랑채. 당시 대감(정2품)들은 저마다 최고의 판소리 명창 한 명을 식객으로 데리고 있는 걸 큰 ‘위세’로 여겼다. 특히 실각해 전국을 낭인처럼 떠돌 때 유명 소리꾼의 면면을 누구보다 풍부하게 접해왔던 흥선대원군. 남다른 귀명창이자 풍류객이었던 그가 1863년 실세가 되면서 신재효발 판소리 시장은 빅뱅 국면으로 치닫는다.

내 윗대 집안 어른 중 판소리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어머니의 큰아버지인 ‘장판개’ 할배다. 그 할배는 판소리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났다. 그만큼 재능을 떨칠 기회가 많았다. 그 어른은 전남 곡성군 겸면 출신의 ‘동편제’ 명인이다. 상성부 통성이 얼마나 파워풀한지 판소리 중 최고 절정고음부인 ‘서슬’을 칠 때면 장지문의 문고리가 떨릴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젊은 소리꾼 상당수는 스승의 목소리를 마냥 베끼기만 하는 ‘사진소리’로 추락하는데 그 시절에는 다들 자기만의 ‘더늠’(필살기)을 갖고 있었다.

전국의 명창이 1867년 중창된 경복궁 어전 앞으로 러브콜된다. 장판개 할배도 고종 앞에서 소리를 해 벼슬을 얻게 된다. 요즘에는 공무원시험을 쳐야 되는데 그 시절에는 소리만 잘해도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할배는 스승 송만갑의 부름을 받고 1904년 원각사(한국 첫 근대식 극장)에 가세를 하고 그해 7월 어전에서 장기인 전투장면이 압권인 ‘적벽가’를 부른다. ‘적벽대전’ 대목에 이르렀다. 발림(몸짓)은 실제 전쟁터 군인을 방불케 했다. 살기 등등함까지 전해졌다. 곁에 있던 대신들도 체신을 잃고 탄성을 자아낸다. 고종은 그 재능을 가상히 여겨 종9품 벼슬에 해당되는 ‘혜릉참봉’을 제수한다. 혜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외증조부인 장석중도 판소리는 물론 거문고 명인으로 순릉참봉이 된다. 외조부인 장도순 할배 역시 판소리 명창이고 외고조모인 장수향은 더 다재다능했다. 소리는 물론 가야금, 거문고, 무용에 두루 능했다.

장판개 할배는 원래 줄타기에 빠졌다가 한번 떨어졌다. 그 바람에 고수의 길을 걷는다. 15세부터 김채만의 수행고수로 활동하다가 송만갑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간 춘향가 등 판소리 네 바탕을 연마한다. 청미함과 우람함을 겸비한 음성은 저음에서 고음까지를 자유롭게 갖고 놀았다. 수리성(후천적으로 닦은 목소리)보다는 천구성(타고난 목소리)이 남달랐다. 소리에 북, 해금, 거문고, 피리에도 능통해 20세 전후 그 명성이 삼남 일대에 자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할배 소리는 호남보다 경주, 안동 등 경상도에서 더 알아주었다.

판소리 하면 호남인 줄 아는데 실은 그게 아니다. 전주대사습에서 장원한 명창도 경상감영의 선화당에서 소리하여 인정받아야만 서울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전라도에서 공부해서 경상도에서 발판을 마련해 서울에서 명창이 된다는 말이 판소리계의 지론이다. 동편제를 창도한 송홍록을 비롯해 박기홍, 서편제의 명수 유성준과 김창환, 박지홍과 그의 제자 박동진도 모두 대구·경북에서 활동했다. 특히 강소춘, 김초향·김소향 자매, 김추월, 박녹주, 이소향, 임소향, 박소춘, 박귀희 등도 지역 출신 여류명창들이다.

전남 남원 출신의 여류명창 배설향은 장판개 할배의 아내였다. 흥보 박타는 대목에 능한 할매는 경성방송국에서 남도단가를 자주 불렀고 훗날 경주에서 어머니를 가르치기도 한다.

외조부 장도순은 일찍이 협률사·장안사·연흥사 무대의 ‘8잡가꾼’으로 유명했다. 남원으로 내려간 외조부는 1920년대 ‘쑥대머리’(춘향가 중 한 대목)로 유명한 임방울(당시 유성기가 조선팔도에 100여만대가 보급됐는데 그의 판은 120여만장이 팔린다)과 함께 국내 최고의 여류명창으로 불렸던 이화중선을 가르쳤다. 장판개 할배의 셋째 아들인 영찬은 14세 때 임방울 명창한테 소리를 배운다.

◆ 나의 목포 시절

나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17세에 나를 낳았다. 광복되기 3년 전에 태어났다. 4남매 중 장녀였다. 광주는 어머니의 친정이었다. 아버지 집안은 아들이 귀하다. 큰아버지는 딸만 내리 5명을 낳았다. 그러던 차에 나까지 아들이 아니라서 친가에서는 날 데리고 오지마라고 했다. 6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게 된다. 남동생(경호)이 세상에 태어나자 한숨을 돌린 친가에서 그제서야 날 데려오라고 했다. 6세 때 난생 처음 목포시 죽동 162번지로 간다. 다른 건 다 잊어버리는데 그건 잊히지가 않는다.

아버지는 만능 스포츠맨. 주먹이 강해 거친 나날을 많이 보낸다. 원래 운동가가 예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소리를 하는 어머니를 본 아버지는 보쌈하듯 어머니를 아내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소리꾼으로 성장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냥 곱게 키워서 현모양처로 시집보낼 요량이었다. 툭하면 예술은 어머니 대에서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목포에 온 어느 국극단 공연을 구경하던 날, 내 운명은 이미 결정돼 버린다. 나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인 듯 배우지 않아도 공연의 전체 내용이 손금처럼 훤히 보였다. 가사와 몸짓까지 몽땅 외워버렸다. 그걸 본 어머니는 애가 탔다. 워낙 명이 센 남편이라 그걸 보면 경을 칠 것이라고 판단해 시간만 나면 날 감시했다. 나도 그걸 눈치챘다. 화장실에 가서 뒤를 보며 국극 속 공주와 왕자 역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아버지한테 들켜버린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버지는 날 발가벗겨 키가 넘는 눈밭에 얼어죽어라고 내던져버렸다. 1시간여 덜덜 떨었다. 아버지는 소리 안 한다고 약속을 하면 방으로 데려올 심산이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을까.

아버지는 39세에 세상을 떠난다. 소리밖에 모르는 엄마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다. 자라나는 자식의 끼를 본 어머니는 속으로 장탄식을 한다. ‘순임이 하나도 아니고 자식 넷 모두 국악쟁이라니 이를 어쩌나….’

남동생 경호는 한때 대구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촉망받았지만 국악집안의 혈통 때문인지 어머니한테 배워 현재 아쟁 명인이 됐다. 첫째 여동생 경림이는 어머니 재주를 고스란히 받은 천재적 국악인이 될 재목이었는데 19세에 세상을 떠난다. 둘째 여동생 경옥이는 가야금 병창으로 서울에서 이름을 날린다.

◆ 내 어머니 장월중선

1925년 전남 곡성군 오곡면 묘천리에서 태어난 어머니. 그녀는 7세 때부터 경주의 권번에서 장판개 할배와 배설향 할매한테 ‘만고강산’ 등 단가를 배우고 나서 흥보가, 춘향가, 적벽가, 심청가, 수궁가 등을 배운다. 13세 때 광주에서 서편제 명창 박동실한테 4년여 심청가 전 바탕, 고모 장수향한테 가야금풍류와 가야금산조를 배운다. 이어 오태석한테 가야금병창, 정자선한테 살풀이와 승무, 이동안으로부터 진쇠춤, 승전무, 심불로, 한량무, 태평무, 신칼대신무 등, 박송암 스님으로부터 범패 홋소리, 짓소리, 나비춤, 천수바라, 법고 등을 이어받는다. 52년 조선창극단 단원으로 창극 반주를 했는데 더 놀라운 능력은 이때 국내 여러 산조를 참조해 아쟁산조를 창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창극단과 임방울협률사 단원으로 전국은 물론 일본과 만주 등지로 순회공연에도 나선다. 광복 직후에는 여성국극단체인 여성국극동지사 등에서 창극공연에 매진한다. 어머니는 연주 능력 못지않게 작창 능력이 탁월했다. 비취거울, 청사초롱, 이차돈, 이순신장군 등에 이어 94년에는 국립창극단에서 ‘명창 임방울’을 작창해 호평을 받았다. 77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범패로 대통령상을 받은 어머니는 이후 판소리, 아쟁, 가야금, 거문고, 춤 등에 능통해 91년 한국국악협회가 주는 국악대상 등을 받았다. 소리는 물론 악기, 거기에다가 춤, 작창 능력까지 겸비한 국악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지만 어머니는 그 재능을 세상에 공격적으로 펴보이는 걸 꺼렸다. 다들 서울로 가라고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국악계의 시골에 불과한 경주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묵묵세월을 보낸 그 심정을 이제야 조금 알 듯하다. 어쩜 청상과부로 자식 뒷수발에 더 헌신하겠다는 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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