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길옥윤도 성량 인정…曲 제의받았지만 이게 아니다 싶어 사양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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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15   |  발행일 2016-01-15 제35면   |  수정 2016-01-15
■ 4대를 이어온 ‘소리’… 경주 정순임 명창
방황 끝에 국악의 길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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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와 어머니, 그리고 호남의 소릿제를 몸에 넣고 경상도로 넘어와 호남과 영남의 소리를 혼융시켰던 지난날, 그리고 2007년 기라성 같은 판소리 가문 중에서 최고의 소리명가로 선정된 그날의 감격을 떠올리며 자택 안방에서 소리의 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순임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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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고종 앞에서 적벽가를 잘 불러 혜릉참봉이란 종9품 벼슬을 받고 ‘어전판소리꾼’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장판개의 복원된 모습(위)과 명창으로서는 드물게 무용과 기악, 심지어 작창 능력까지 겸비했던 장월중선. <사진제공=세천향예술단>


국창 임방울의 스승인
정응민 선생 등에게서
나는 여러 판소릿제를 배웠다

어머니는 1963년 경주에 정착
시립국악원 강사로 후학 양성
나도 따라서 경주로 옮겨 활동
지역 국악발전 초석 됐다 자부

칭찬에 인색했던 어머니는
어느날 예고없이 내 공연 본 후
“딸이지만 참 잘∼ 헌다” 칭찬
그것보다 더 큰 선물 없었다

◆ 어머니는 목포의 국악 개척자

어머니는 이화중선처럼 전국을 호령하는 여류 국창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열망을 접는다. 순회공연의 나날을 중단했다. 어머니는 소리가 백척간두에 선 걸 절감한다. 트위스트 같은 양춤과 추억의 가요 등이 국악을 퇴락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공연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고 믿었다.

전쟁 중이었지만 어머니는 목포로 내려와 유달산 아래 한 노인정을 빌려 개인국악원을 개원한다. 소문을 듣고 호남 곳곳 요정의 기생들도 찾아와 한 수 배우고 갔다.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목포국악원에 이어 유달국악원까지 만들었다. 목포의 첫 국악교육기관이었다. 10여년 운영하다가 제자 배금두씨에게 물러준다.

15세 때 학교를 그만둔다. 3년간 우리 집에서 먹고 잔 친구 박길년과 함께 임춘앵이 이끄는 여성국극단에 입단한다. 어머니가 다리를 놓은 것이다.

창극단의 길은 ‘눈물의 길’이다. 공연자와 스태프 등 관계자 100여명이 식구처럼 몰려 다녔다, 서울, 광주, 전주, 부산, 대구 등 전국 주요도시를 돌아오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부모상 외에는 일절 외출이 금지돼 있었다.

출연료는 언감생심. 무대 서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공연은 가는 곳곳마다 만원사례였다. 돈도 적잖게 들어왔을 것 같은데 우리는 도무지 돈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주역들에게만 은밀하게 개런티를 주었다.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돈은 단장의 차지였다. 무대는 기쁨이지만 일상은 슬픔이었다. 옷도 화장품도 살 돈이 없었다. 한겨울 빨랫감은 모두 내 차지였다. 얼음을 깨고 찬물에 빨래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저체온증으로 기절해 동사할 뻔했다. 내가 좋아하는 극단이라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1년 넘게 전국을 떠돌다가 대구 공연 때 외삼촌(장태화) 집으로 잠적해버렸다. 도저히 열악한 극단과 함께할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도 그 내막을 알게 된다. 아는 체면의 임 단장이 자기 딸을 고생시킨 것을 내내 섭섭해 했다.

◆ 한때 제2의 패티김이 될 뻔도

부모는 자식을 직접 가르치기 어려운가 보다.

나의 잠재능력을 본 어머니는 직접 가르치기 뭣해서 전남 보성 강산제 보성소리의 명창인 정응민 문하로 보냈다. 그 문하에서 임방울 국창, 조상현 명창 등이 배출된다. 장판개 할배의 아들, 그러니까 어머니의 사촌(장영찬)도 정응민 문하에 있었다. 일단 숙식하며 석 달을 거기서 지낸다. 엄마는 쌀 열 가마니 값을 돈으로 환산해 갖다주었다. 한꺼번에 다 배울 수가 없었다. 다들 형편이 어려웠다. 학채(레슨비)는 무대에서 벌어서 선생에게 갖다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날 불러 소리를 테스트했다. 어머니는 ‘여자 소리꾼은 곱게 소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서편제적 나긋나긋함이 아니라 동편제적 우렁찬 소리였다. 어머니는 기겁했다. “야, 이것아. 도대체 소리 공부를 어떻게 혔기에 이 모양이냐.” 속상해하며 내 가슴을 마구 두들겨팼다. 그렇게 나는 여러 판소릿제를 우여곡절 익혀 나갔다.

나는 다시 목포로 내려간다. 그 어름 대구에 있는 외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구로 와서 함께 살자고 간청한 것이다. 내 나이 21세 때 대구로 온다. 외삼촌은 훗날 대구MBC관현악단장을 역임하는 등 대구에서 알아주는 뮤지션이었다. 외삼촌은 미8군 무대도 주름잡고 있었다. 누구보다 세상 돌아가는 판을 빨리 읽었다. 판소리 대신 가요를 배워보라고 했다.

외삼촌 지도로 당시 유명한 가요와 연주곡, 팝송은 물론 기타까지 배우라고 했다. 그 인연으로 나는 30대 때 일본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한번은 민요를 부른 뒤 맛뵈기로 길옥윤의 명곡 ‘이별’을 불렀다. 그 자리에 길옥윤이 앉아 있었다. 길옥윤은 풍부한 성량의 내 목소리에 큰 관심을 보이며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가 보니 데뷔 준비 중인 앳된 혜은이가 있었다. 길옥윤은 내게 자신의 곡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허락하면 내 삶도 거덜날 것 같아 고사했다. 이게 아니다 싶어 다시 목포로 도망친다. 만약 눌러앉아 있었다면 또 다른 패티김, 정훈희 등이 됐을지도…. 그런데 외삼촌의 피를 물려받아 빼어난 기타리스트로 발돋움하던 남동생(정경호)은 서양음악과 결별하고 아쟁 연주자로 성공했다. 대단한 동생이 아닐 수 없다.

외삼촌의 집은 옛 매일신문사 뒷골목에 있었다. 바로 옆에 작고한 국민 여배우 황정순이 살고 있었다.

요즘과 달리 당시 나 같은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일제강점기 권번 기생의 본거지였던 요정밖에 없었다. 훗날 요정은 무척 음성적으로 변모하지만 초창기 요정은 격조가 있었다. 정식 국악당이 생기기 전 요정이 소리꾼의 최대 무대였다. 당시 메이저 요정에는 국악반이 있었다. 6명이 한 조로 움직였다.

◆ 드디어 경주에 입성하다

어머니는 63년 경주에 입성한다.

당시 경주에는 이렇다 할 만한 국악 인프라가 전무했다. 경주의 유명 한약방 원장이 경주에 제대로 된 풍류문화를 정착시키고 싶다면서 엄마를 경주로 부른 것이다. 어머니도 사명감을 갖고 경주로 내려온다. 그렇게 해서 ‘경주관광요원교육원’이 태동한다. 79년 경주보문단지가 생기기 직전 경주에 크고작은 접객업소 종사원의 품위와 교양을 위해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접대부들을 위한 교육원을 만들었다. ‘성림장’에 사람을 모아놓고 교육을 했는데 이수증이 없으면 영업활동도 할 수 없었다.

이 교육원 이전에 경주 국악계에 감동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제강점기 경주의 최고 기생 중 한 명이었던 유난곡이 평생 모은 재산(부동산 9만9천㎡)을 경주시에 기증한다. 이 자금 때문에 55년 <사>동도국악원이 생길 수 있었다. 그걸 토대로 조경규씨가 67년 ‘경주시립국악원’을 개원한다. 어머니는 그 국악원의 실기강사였다. 시립국악원은 사라지고 81년 ‘신라예술단’이 뒤를 잇는다. 그걸 발전적으로 통폐합한 게 지금 내가 단장을 맡고 있는 ‘세천향예술단’이다. 돌아보면 우리 모녀가 경주 국악 발전의 초석이 된 건 분명한 것 같다.

당시 경주시립국악원은 황남동 황남초등학교 앞에 있었는데 중·고교과정이 있었다. 어머니는 대구에 있던 나를 불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시립국악원 강사가 된다.

초창기에는 다들 사는 형편이 어려워 그런 학교에도 보냈는데 점차 형편이 좋아지자 국악원을 외면했다. 자연히 문을 닫게 되고 우리 모녀만 남게 된다. 나는 새로운 공연 사업을 개척했다. 전국의 어머니 제자들에게 SOS를 요청했다.

당시 보문호 주변에 도쿄·조선호텔이 지어졌다. 도쿄호텔 한정식 식당 옆에 조그마한 무대가 있었다. 관계자를 만나 무료로 한 달만 공연하자고 간청했다. 처음에는 밥 먹는데 무슨 국악공연이냐며 무시했다. 재능기부식으로 공연을 올렸는데 대박이었다. 공연 덕분에 매상이 두 배로 뛴다. 코오롱·조선호텔도 공연요청을 했다. 하루에 세 군데를 뛰어다녔다. 그렇게 해서 보문야외무대도 생겨난다. 그런 베이스에서 ‘신라예술단’도 태동하는데 당시 국악계에선 남원·전주급으로 경주를 인정했다.

1985년 나는 대통령상도 받고 심청가 완창 발표도 한다. 마치 내 세상이 된 것 같았다. 이 실력으로 1986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간다. 9년여 창극단 시절을 끝내고 경주로 내려왔다. 움집 같은 인왕동 내 판소리연구소에서 소리와 동고동락한다. 내 소리도 중류를 지나 하류로 접어든 것 같다.

현재 세천향예술단 사무국장인 조카(정성룡)도 동국대 국악과를 졸업한 뒤 전주 조용복씨에게서 소리 북을 사사했고 나한테 판소리를 전수 중이다. 2003년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소리꾼으로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박동실이 작창한 ‘열사가(烈士歌)’ 중 ‘유관순 열사가’를 누구보다 잘 불렀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열사가는 항일투쟁 영웅들의 전기적 사실을 엮은 것으로 현대 창작 판소리의 효시다. 창극단 시절 매년 삼일절 즈음 난 유관순처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댔다.

언론도 열광했다. 유수 일간지, 심지어 가수 조영남까지 날 인터뷰하러 왔다. 13번의 판소리 완창 때도 안 오셨던 어머니. 당신이 유관순 열사 공연 때 덜컥 오셨다. 나를 딸이 아니라 제자로 본 것이다. 공연 직후 어머니가 내게 한 말이 지금도 날 설레게 한다.

“내 딸이지만 소리 참 잘~ 헌다.”

평소 ‘잘한다’란 칭찬에 인색했던 당신이라 내게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없었던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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