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2] 청가 고홍선편 - “나는 대한민국 한량”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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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3-22   |  발행일 2013-03-22 제33면   |  수정 2013-03-29
“내 풍류가 대단하다 한들 저 초봄 꽃만 하리”
새벽…그는 손가락으로 그림 그리다 말고 갑자기 발가벗었다, 그리곤 춤추며 혼자 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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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지두화가인 청가 고홍선이 손가락으로 수묵화를 치고 있다. 그는 그림 이외에도 서예·조각·판소리 등 다양한 예술적 재주를 가진 달구벌 대표 풍류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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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한 훈장같은 청가가 붓같은 손가락을 펴 보이고 있다.


탁주 아홉잔에 기분이 혼곤해진 주태백.

중국 당나라 시선(詩仙)이었던 그가 대구에서 반짝 환생한 사연을 누가 알까. 분위기 메이커인 주태백은 술과 가무, 그리고 시가 없는 저승살이가 너무 무료해 최근 우울증에 걸렸다. 자연 저승의 분위기도 초상집 지경. 안되겠다 싶었던지 천존(天尊)이 몰래 그를 콜한다.

“주태백, 그대한테 딱 아흐레 특별휴가를 줄 테니 대구에 사는 청가(靑家) 고홍선(高洪先)이라는 작자를 만나보고 와. 그자가 정말 천하의 한량인지를 감별해보란 말이지”

“예~이~”

휘리릭~. 계사년 첫 봄비가 내리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안지랑시장 곱창골목. 이날 밤 지역의 굵직한 호사가들이 여기에 모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주태백은 주탁에 앉아 불로막걸리를 마시다가 운을 떼며 담론에 슬쩍 끼어든다.

“청가란 자의 풍류가 그렇게 놀랍소.”

“나도 몇번 그자와 날밤을 새웠소. 그의 예재(藝才)가 어찌나 현란·출중한지 도무지 사람같지가 않았는데,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은 물론 판소리, 민요, 국악기 연주, 조각, 서각, 골동품 감정, 만담은 물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발가락으로 붓글씨까지 쓴다고 합디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1분 만에 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하고.” 주태백이 비를 뚫고 작정한 듯 청가의 누거(陋居)로 행한다.

◆ 제1막: 청가의 토굴

대구시 서구 평리4동 호남예술원.

누거는 현대판 아방궁 같은 몇 채의 모텔에 포위돼 있다. 그래서 더 고적(孤寂)해 보인다. 천자문 적힌 담장이 눈길을 끈다. 여느 집과 아우라가 사뭇 다르다. 언뜻 서당·법당·산신각·선비의 사랑채·골동품 진열장을 뭉쳐놓은 것 같다. 일반인에겐 더없이 괴기스럽고 어질해보이지만 주태백에겐 ‘적거(謫居)’처럼 보여 더없이 편했다.

청가는 말쑥하고 스마트해 보인다. 한량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런데 말투는 남도 육자배기톤. 반지하형 허름한 토굴 같은 공간에 기거한다. 요즘도 도심에 그런 풍류방이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허나 거기는 자기 집이 아니다. 처가댁이다.

아내는 한량 남편을 위해서인지 토방에 거의 내려오지 않는다. 한량 서방이 속을 썩였겠지?

그는 유건을 쓰고 찻상 앞에서 소일한다. 그의 재주를 알고 종일 온갖 빛깔의 방문객이 줄을 잇는다. 인생상담을 위해서, 살기 싫다면서, 한 해 신수가 궁금해서, 만담(漫談)이 궁해서 찾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소리판이다가 어떤 날에는 시인묵객과 종일 술잔 들고 예담(藝談)을 나눈다. 또 어떤 날에는 중광 같은 선승이 찾아 선문답을 주고받는다. 청가는 ‘팔색조’처럼 상황에 따라 자기를 잘 바꾸지만 맘의 중심은 맑다.

청가의 흉중을 지탱하는 3개의 금과옥조가 있다.

진광불휘(眞光不輝)·대교약졸(大巧若拙)·상선약수(上善若水).

진정한 빛은 발하지 않는다는 것과, 최고의 기교는 못난 듯 소박하며, 최고의 선(善)은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항상 낮은 데로 임하는 물과 같다는 뜻이다.

주태백이 청가를 부르기 위해 헛기침한다. 기침소리는 단아하면서도 청기(淸氣) 가득했다. 청가가 ‘사철가’의 허두로 화답을 한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왔건만 인생사 쓸쓸타….”

주태백도 잊었던 흥이 발아한다.

“나는 시선 주태백이라 하오. 아흐레 일정으로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 아호가 어떻게 되시는지.”

“청가라고 하오. 어린시절 동양화를 배울 때 의재 허백련(1891~1977) 선생이 내게 지어준 아호요. 스승은 훗날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와 인연이 될 거라고 했는데 2년 전 그 말이 사실로 드러났소. 이명박 대통령한테 내 지두화(指頭畵)를 올릴 수 있었소.”

“천하의 한량이 그깟 대통령한테 그림 한 점 준 걸 갖고 으스대다니.”

청가가 국궁삼배를 하며 주태백을 안으로 모신다.

둘은 수인사 삼아 한시를 주고받는다. 주태백이 당나라 시절을 추억하며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올리자 자작 칠언율시의 한 대목으로 화답한다.

‘한평생 부귀와 권세를 원하지 않았으니 심사가 편안하구나/ 남은 여생 청류를 읊으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리라(不願富權心事寧/淸流吟誦自然歸)’

주태백이 덥석 청가의 손을 잡는다. 두 한량이 일심이 된다.

이때 땟국이 흐르는 청가의 오른손 검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검지로 모닥불을 피웠단 말이오.”

“ 그게 아니외다. 지두화 때문이오.”

“지두화? 무슨 꽃이름이오.”

“꽃이름이 아니외다. 이건 수백년 내려온 조선의 전통 회화법이온데….”

“붓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어떻게 그림을….”

청가가 검지를 붓처럼 치켜세운다. 이어 지두화를 시범 보이며 향불처럼 판소리 한 소절을 깐다. 중간중간에 무속인의 ‘공수’ 같은 추임새도 넣는다. 덩실덩실 양반춤을 추면서 순식간에 무릉도원 한폭을 길어 올린다. 음악과 그림이 상응한다.

“부족한 실력이오나, 승천하실 때 갖고 가시죠.”

주태백은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청가의 르네상스맨적인 재주를 아흐레 동안 만끽하다 선물로 내민‘산천(山泉)’이란 화제의 지두화를 품고 저승으로 돌아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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