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최북의 손가락 그림 ‘풍설야귀도’ 방송서 재현하자 다들 충격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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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3-22   |  발행일 2013-03-22 제34면   |  수정 201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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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베개 베고 비스듬히 누워 여봐란 듯이 웃으며 풍류담을 녹이는 청가의 모습 속에 조선풍류의 일단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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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깎은 목(木)자화상 옆에서 웃고 있는 청가. 검지로 그리고 있는 지두화. 직접 서각한 벽고재 현판. 토용같은 해학적 목각품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제2막: 지두화 납시오

주태백이 사라진 토굴.

청가가 적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지두화 삼매경을 청한다. 그날 새벽, 화중접신(畵中接神)이 된다.

옷도 거추장스러워 발가벗고 신라의 처용처럼 혼자 춤추며 논다. 마침 토굴에서 인기척이 들려 아내가 모처럼 남편의 토굴에 왔다가 기겁을 한다.

“아니,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아니예요. 지두화 귀신에 홀려 제정신이 아니니 당장 정신병원에 가 봅시다.”

“허허허, 아녀자가 대장부의 흉리를 어떻게 헤아릴손가.”

한번은 KBS1진품명품 코너에 양기훈이 그린 지두화가 나왔다.

방송국측에서 청가에게 출장감정을 의뢰했다. 전국 유일의 지두화가라서 그랬다. 그는 감정도 해주고 지두화도 즉석에서 그려보였다. 연이어 KBS 명작스캔들 코너에까지 불려갔다. 조선말 광기어린 애꾸눈 화가였던 최북의 지두화인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를 직접 손으로 재현해달라는 주문이었다. 당시 전문가들간에도 그 작품을 과연 손으로 그릴 수 있냐를 놓고 논쟁중이었다. 청가가 그 자리에서 원형대로 그려줘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두화는 손가락과 손톱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400년 역사의 한국 전통화법이지. 남사당패 같은 거리의 환쟁이가 호구지책으로 그렸던 국내 첫 민중회화(民畵)라고 생각해. 지두화는 조선 후기 화가 최북과 심사정이 즐겨그린 기법인데 일본놈들이 사람이 모인다는 이유로 멸절시켰어. 그걸 내가 재현한 거다. 사람들은 그 재주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는 데 모두 피나는 연습의 산물이지.”

15년전이었다.

인사동의 한 갤러리와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만난 지두화에 청가가 감전된다. 붓으로 그린 산수화와 터치가 확연히 달랐다. 고졸질박했다. 속으로 이거다 싶었다.

갑자기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청가에겐 쟁이의 피가 흘렀다. 강진읍 목리에서 태어난 그는 다산초당과 김영랑 시인의 생가, 남도 동백꽃 명소인 백련사를 끼고 성장했다. 9살 때 한국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 문하에서 산수화의 기본, 이어 송백 최봉수·운초 차유전 문하에서 서예를 배운다. 그러니 지두화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 재빨리 간파할 수 있었다.

전문가도 없었다. 홀로 지두화첩을 갖고 3년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그리고 또 그렸다.

동양화는 ‘농담(濃淡)의 예술’인데 그럼 어떻게 먹의 짙음과 옅음을 조절할까. 각기 다른 면적의 손가락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손톱을 이용해서 윤곽을 잡는다. 자연 손톱과 지문이 닳아없어졌다. 수묵화 기본이 없으면 흉내를 못낸다. 그렇게 해서 ‘지두화가 청가’가 탄생된다.

그는 토굴보다 저잣거리를 더 좋아한다.

서예·장승 퍼포먼스를 하듯 관객 속에서 제 흥을 붙들고 춤추며 소리하면서 즉석화 그리길 좋아했다. 1993년부터 9년간 천하 잡놈의 집합소인 서울 인사동에서 정말 원도 없이 걸팡지게 논다. 인사동 한량들의 모임인 호연회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주말이면 회원들과 모여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의 어머니도 재담가였다. 강진의 강강수월래 선소리 치던 소리꾼이다. 고향에서 훈장이었던 조부(경수당 고기언)의 막내 손자로 태어나 서당공부도 죽어라 했다. 중3 때 죽은이를 위한 명정도 썼다. 고향사람에겐 ‘희한한 아이’였다.

전천후 예술가다.

조선말 대자유 정신을 구가한 화가 오원 장승업 스타일. 취흥이 오르면 차 뒤에 상비하고 다니는 지필묵과 국악기를 갖고 와 선심쓰듯 술집 벽에 지두화를 그려놓는다. 호주머니 다 털고 귀가하던 중 택시비가 모자라면 택시기사를 위해 스님처럼 축원해주고 되레 용돈까지 받아간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을 방불케 한다. 경계가 없게 노니깐 되레 일반인들은 그를 가볍게 여긴다. 원래 성인도 고향에선 대접을 못받는 법. 하지만 해외로 가면 사정이 다르다. 일본 NHK 초청으로 오사카 극장에서 지두화 퍼포먼스를 했을 때는 5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지두화는 ‘막돌’이지. 도자기보다는 ‘질그릇’에 가까워. 손가락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런 터치가 나오는 거야.”

청가의 재주는 지두화에서 자연스럽게 서예와 한시, 판소리의 세계와 맞물려 유장하게 돌아갔다.

전통문화 말살 이유
기독교 목회활동 중단, 우리문화 찾기 나서

指頭畵로 유명세 탔지만 술집 벽에 그려주는 등 경계없이 놀자 푸대접도

못생긴 글씨체 위해 두 자루 붓으로 쓰는 쌍봉악필법 첫 개발
국전 출품했지만 쓴잔
서예계와 담 쌓아…그럼에도 유명인사들 현판 글 청탁 줄이어

판소리 전수자에다 국악기·목각·서각 능해
골동품 감정사이기도 바보만담땐 포복절도

10여년전 강도 들어 그림·낙관 다 훔쳐가
식당 접고 처가살이, 돈 때문에 고생 많이 해


◆ 제3막: 서예가 청가

청가가 주태백을 위해 봄 춘(春) 자를 붓 두 자루를 꽉 움켜쥐고 쓴다. ‘악필(握筆)’이다.

검정 먹 속 흰 공간인 비백(飛白)이 살아 있다. 서기가 용등(龍登)한다. 고매(古梅)의 가지처럼 구불거린다. 그는 왜 붓을 두 자루를 사용할까? 글의 맛과 멋을 위해서다.

두 자루를 동시에 움직이면 삼전법(三轉法·한번에 획을 다 긋지 않고 두세 번에 걸쳐 긋는 것)과 행기(行氣)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추사처럼 ‘기괴미(奇怪美)’를 좋아한다. 토우처럼 좀 못생긴 글씨체를 위해 그가 국내 처음으로 개발한 게 바로 ‘쌍봉악필법’이다. 원래 악필의 대가는 대전 출신의 석전 황욱인데 그건 석전이 수전증 때문에 개발한 기법이다.

시서화를 하려면 당연히 서예를 섭렵해야만 된다. 5살 때 강진읍에 있는 운초서실을 다녔다. 고교 때부터 악필을 뿜어낸다. 그는 여느 서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청가체’를 만들고 싶었다. 중봉(붓끝)이 종이와 만나 먹물이 퍼지면 양(陽)이고, 들면 음(陰)이라. 그래서 한번에 두 자루 붓을 쥐고 쓰면 음양의 기운을 동시에 장악할 수가 있고 거기서 독특한 행·초서체가 나온다.

그라고 왜 속세의 욕망이 없었겠는가. 한번은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국전을 노크했다. 그런데 독특한 서체로 찍혀 배척을 당했다. 그때부터 서예계와도 담을 쌓는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그에게 현판 글을 청한다. 문경의 도예가 천한봉의 도천산방, 토암 김성기의 토암산방, 팔공산 도림사 사운당 등 얼추 100점이 된다. 대구MBC 사극인 ‘경상별곡’ 타이틀 글자도 그가 기증한 것. 이 프로에서 붓글씨 쓰는 장면 대역도 5년째 하고 있다. 그는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쓰는 ‘족서(足書)’에도 능하다.

“서예를 하면서 한시에도 문리가 트였어. 청학동 훈장 선생한테 한 수 배웠지.”

이젠 지역의 유명 문중에서도 그에게 시 한 수를 청할 정도다.

그의 한시에 대한 감각이 어느 정도일까. 갑자기 봄 춘(春)과 구름 운(雲)자를 운으로 내밀었다. 그가 번개처럼 화답한다.

영남청문지상춘(嶺南淸文紙上春·영남일보의 맑은 문장은 종이 위의 봄이로구나)

만고청풍회사화(萬古淸風會社花·만고의 맑은바람 신문사의 꽃인데)

천지영남일보운(天地嶺南日報雲·천지의 영남일보 구름속에 흘러가는데)

미구차사갱하구(微軀此士更何求·하찮은 이 한량은 그밖에 뭘 구할까)

◆ 제4막: 소리꾼으로 몸을 바꾸다

소리꾼으로 넘어가는 청가.

주태백은 얼이 빠져 청가의 소리를 듣는다. 판소리도 취미 수준이 아니다. 명창 박록주 전국국악대전 일반부에서 입상할 정도다. 웬만한 국악기는 다 다룰 줄 안다.

주태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현재 국립국악원장인 이동복 경북대 교수가 등장한다.

“청가의 탁월한 리듬감이 도드라진 북장단 실력은 따라올 자가 없지.”

주태백이 동요 ‘섬집아기’를 쳐보라고 주문한다. 청가가 쿵따라따 삐약삐약~ 리듬을 베이스로 니나노버전으로 절묘하게 변주한다. 엇박자 리듬과 빨래판 긁는 소리가 얽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런 대목에서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전수자. 12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다. 광주 무등산 증심사 근처에 있던 의재 허백련이 꾸려가는 연진미술학교를 다니는 한편, 겨울방학 때는 소리 공부를 위해 단재 오병수(서편제 심청가 기능보유자)·진봉규(동편제)·박동진(중고제) 문하에도 들어간다. 지리산 등 전국 유명 산을 유람하며 ‘소리삼매’에 빠졌다. 청가는 심청가 중 ‘심봉사 한성 가는 대목’, 춘향가 중 ‘이별가’ 대목을 특히 잘 부른다. 진도아리랑 등 남도민요도 능청스럽게 부른다.

“청가야, 네 목구멍은 타고났다만 이것해선 밥을 먹지 못할 것 같으니 맘을 단단히 먹어라.”

스승은 청가에게 험난한 소리꾼의 길을 권하지 않았다. 청가의 한량스러움을 일찍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날 더 충격을 받는다.

난타는 수백만원 개런티를 받는데 판소리는 기껏해야 수십만원, 자존심 상한다. 차라리 소리를 접자. 하지만 그의 소리는 삶의 동반자이고 한량의 필수품. 그래도 지금까지 22명의 제자를 길렀고 지금도 2명이 소리를 배운다.

◆ 제5막: 기타 잡재주도 수두룩

“이놈 청가야, 어떻게 하다가 조각에까지 손을 대니.”

주태백이 화가나서 퉁명스럽게 묻는다.

“서울 인사동 한창 시절 일본에 사는 한 재일교포 조각가를 만났어. 그는 파계승으로 인사동 호연회 회원이었는데 어느 날 내게 선물로 관세음보살 조각상을 주었어. 그걸 보니 또 환장하겠더라. 두문불출하며 나무를 깎은 끝에 비슷한 작품을 만들었어. 안목이 있었던지 사부가 더 이상 조각을 가르치지 않았어. 이미 내면에 감각을 갖고 있는 걸 본 거겠지.”

그때부터 꼭두에 몰입한다. 하나같이 못생긴 목각이다. 국내 목각계의 거장인 목아박물관 박찬수 관장의 기예도 섭렵했다. 용, 스님, 산신, 용왕, 부처, 청가 자화상까지 깎고 나중엔 몇달에 걸쳐 나무젓가락으로 이층전각까지 만든다. 죽은 소나무 분재를 갖고 용도 만들었다. 남근이 익살스럽게 각이 된 누드목도 즐긴다. 지금껏 100여점 깎았다.

서각에도 능하다.

토굴 입구 ‘벽고재(癖古齋·옛 것을 즐기는 집)’란 현판도 청가의 작품. 한국서각협회 자문위원을 역임한 그는 인사동 회장 할 때 서각 전문가를 만나면서 서각에도 매력을 느껴 2년간 배워 프로 못지 않은 실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청가가 골동품 감정사란 사실을 잘 모른다. 집에 수백점의 도자기와 골동품, 1천여권의 고서적도 갖고 있다. 남구 이천동 골동품점 관계자도 뭘 의논하려고 그를 부른다. 출장감정도 자주 다닌다.

만담은 고춘자·장소팔 못지않다. 그가 시작하면 그날 식당문은 내려야 한다. 기분이 나면 앞니에 김을 붙이고 바보만담을 해서 좌중을 모두 포복절도케 한다.

◆ 제6막: 원래 목사가 되려고 했다

주태백은 그가 원래 목회활동을 하던 성직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놀란다.

청년기에는 운동권학생이었다.

미국 선교사 권유로 고향의 한 교회에 나갔다.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면서 그때 그가 대학교 투쟁위원장이 됐다. 5개대학(조선대 전남대 광주대 등)과 함께 데모하다가 끌려가 뒤지게 터졌다. 선배(문영동 시인)가 그 무렵 죽었다.

대학교 시절부터 고무신에 전통한복 차림에 말총머리였다. 민중신학 영향 탓에 진보적 발언을 잘 했다. “목사는 사회참여 못하게 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 목사도 총대를 메야한다. 임진왜란때 유명 승병을 보라며 목사에게 압력을 넣었다.”

7년만에 졸업한다. 기독교 전도사를 5년간 했다. 서울시 강남 서광교회에서 정장복 교수(장로회신학대) 밑에서 목회 활동을 한다. 신앙 노선이 안맞아 나와버린다.

목회와 단절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130년 전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좋은 학교 세우고 양로원 세우고 병원 세웠어. 그러나 오점도 남겼지. 전통문화를 말살시킨 거야. 우리 민족은 동방예의지국으로 효를 부르짖는 나라이고 부모가 돌아가면 시묘살이도 한다. 그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기독교가 상당부분 말살시켰어.”

그가 목회를 그만둔다. 그때부터 우리문화를 찾기 시작한다. 한량 고흥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제7막: 청가의 울음

13년 전 서울 풍류를 정리하고 대구로 온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한량의 삶이라는 게 그들에게는 희극이지만 나와 가족에게는 ‘비극’이지. 그걸 안다면 날 문화재로 대우해야겠지만 푼돈으로 다가서는 짓궂은 속인도 많아 참 절망도 많지. 시서화 삼절에서 나온 아우라가 한량스러움이지만 내가 기껏 한량을 파는 사람은 아니야. 한량도 먹고살아야지. 10여년전 현재 집 근처에서 ‘소릿재’란 흑태찜 전문 식당을 열었어. 날 보려고 단골이 몰려왔어. 살판이 났지만 뻑하면 술판이었어. 자꾸 외상값이 늘어났어. 설상가상 어느 날 저녁에 강도 4명이 들어와서 날 두들겨패고 내가 전시할 그림과 낙관까지 다 뺏어갔다. 그 무렵 내가 KBS 아침마당에 뜨다보니 누가 내 작품을 노린거겠지. 청천벽력이었지. 물적 손해가 막심했어. 너무 절망했어. 예술이 이런 지경에까지 오다니, 정말 한탄스러웠어. 대구 출신으로 수간호사 출신인 아내는 아내대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그래서 소릿재를 접어야만 했어.”

첫번째 눈물을 흘렸다.

“남은 돈이 없었어. 그래서 처가살이를 했지. ‘남자는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고 했는데 나는 궁여지책으로 평리동 처가댁에 기댔어. 난 지하에, 1층에 장모, 2층에는 처형이 살아. 천사 같은 아내가 고생하자 장모는 이혼까지 권유해 그래서 맘이 편한 건 아니었지. 토방에선 웃음소리, 위에선 한숨소리가 들린 날도 있었어. 그게 인생 아닌가. 첫째가 돈이 없어 학원에 안간 날도 있었는데 내가 아들을 불러 부자(父子)가 매화 밑에서 춤추는 지두화를 그렸는데 이게 우리집 가보야. 이젠 작품도 조금씩 팔리고, 특강 요청도 있고, 생활이 안정되니 마누라 표정도 무척 밝네그려. 그런데 말야, 소생의 풍류가 대단하다고 해도 요즘 저 초봄 꽃을 보면 내 재주란 것도 조족지혈(鳥足之血) 같아. 그래도 어쩌겠나, 남은 인생 구름에 달 가듯 멋지게 놀다 죽어야지!”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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