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임종 직전 자신도 모르게 설사하자 “梅兄 보기 송구스럽네” 농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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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3-22   |  발행일 2013-03-22 제35면   |  수정 2013-03-22
최치원서 구활까지 역사 속 풍류의 계보
퇴계, 임종 직전 자신도 모르게 설사하자 “梅兄 보기 송구스럽네” 농담

‘풍류(風流)라.’

매일 술만 퍼마시면 될까, 학문이 고매하면 될까, 한없이 맘이 좋으면 될까, 남을 잘 도와주면 될까, 돈이 많으면 될까, 견성성불하면 될까, 매일 기행과 괴팍함을 일삼으면 될까, 절세미인을 품고 평생 산천유람하면 될까, 예술의 한 경지를 개척하면 될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게 뭘까.

풍류는 모르긴 해도 누구의 흥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탈속의 힘이 아닐까.

연꽃 피는 소리 들으려
다산, 새벽에 귀 갖다대

일제때 최고 풍류가인
서병오는 8가지 기예

변영로·오상순 등 문인
만취해 나체로 소 타


챙기는 게 아니고 푸는 정신. 웅변과 주장이 아니라 읊조림. 수축이 아니라 활성의 에너지. 대자유·정의 정신이면서 카타르시스의 핵심. 지식이 아니라 지혜. 뻐김과 으스댐이 아니라 측은지심, 착한 마음을 복원시키는 힘. 마치 나옹선사의 시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없이 사는 것’. ‘진검 풍류’ 앞에선 부귀공명까지 모두 허망타. 카리스마를 일신의 영달에 악용하지 않는 호연지기.

수많은 유학자는 조선조 성리학의 종장격인 퇴계 이황을 진정한 풍류인으로 꼽는다.

그 어른은 광장과 대로가 아니라 사색의 오솔길을 ‘물새발자국’처럼 걸었다. 퇴계는 임종 직전 자신도 모르게 설사를 했다. 고통의 순간, 제자에게 ‘갓 피어나기 시작한 매형(梅兄·매화) 보기 송구스럽다’며 ‘유담(遊談·농담)’을 날렸다. 두향과의 애틋한 정분도 후학의 화젯거리로 후세에 남겼다.

신라의 승려 원효와 풍류도를 체득한 고운 최치원은 대한민국표 풍류의 첫단추. 원효는 성과 속의 경계를 무애행으로 붕괴했다. 파계해 요석공주를 취해 설총을 낳는다. 그 피는 모르긴 해도 조선조 토정비결의 주인공인 이지함, 단종의 폐위를 보고 세상을 등진 매월당 김시습, 조부를 능멸한 시를 지은 걸 한탄하며 유랑시인이 된 김삿갓(김병연), ‘조선의 고흐’로 불린 최북 등을 거친다.

조선조 사대부는 풍류의 화신이었다. 사랑방 거문고 소리가 그걸 말해준다. 사군자도 한몫했다.

한말로 접어들면 초의선사·추사 김정희·다산 정약용, 이렇게 풍류삼인방이 남도풍류를 강진과 해남을 축으로 그려낸다. 해남 녹우당에 진을 친 윤선도도 뱃사공버전의 풍류를 날린다. 유배가 풍류의 자양분이 된 것이다.

특히 정약용은 중국발 죽림칠현풍의 풍류마인드를 치밀하게 푼다.

한시 짓는 모임인 ‘죽란시사(竹欄詩社)’를 통해서였다. 죽란은 ‘화초를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대나무 울타리’이다. 회원은 모두 15명. 정조 재위 태평시대에 서울과 인근에 거주하면서 초급관리 시절을 보내던 남인계 청년들의 사교모임이었다.

그 규약이 운치있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대문 옆 서지(西池)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번 모인다. 꽃에서 나는 ‘개화성(開花聲)’을 듣기 위해서다. 다산은 늦여름에서 초가을 연꽃이 필 때 새벽같이 일어나 조각배를 직접 몰고 꽃 곁에 가서 귀를 댔다.

일제 때는 문화예술이라면 죄다 풍류인의 범주에 들었다.

그 중심에는 여인과의 연정보다 술로 인한 기행과 괴담이 우선시됐다. 일제 때 최고 풍류가는 단연 대구 출신의 석재 서병오. 그는 지역 권번을 호령하면서 바둑, 의학 등 8가지 기예를 구사해 ‘팔능거사’란 병칭을 얻었다.

일제 때 최고의 문인 누드해프닝도 벌어진다.

수주 변영로·공초 오상순·성재 이관구·횡보 염상섭이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진우에게 원고료 50원을 받아 성균관 뒤 사발정 약수터 부근에서 술을 마시고 대취하여 발가벗은 채 풀을 뜯고 있는 소를 타고 서울 시내로 진입한 사건이다.

조지훈과 구상 시인은 6·25전쟁 때 피란지 대구 향촌동과 자갈마당까지 안으면서 ‘문인표 풍류’를 날렸다.

인사동은 90년대초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풍류의 진검승부처였다.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등지의 숨은 도인들이 자신의 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거기엔 천상병 시인도 살았고 ‘허튼소리’의 중광 스님도 섞였다. 속리산엔 국내에서 처음 민학회를 만든 에밀레박물관장이었던 조자용이 있었다. 새해에는 민족정신을 가진 풍류인들이 속리산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수필가 구활도 포함돼 있었다.

◆ 한량이란 뭔가

조선조에선 선비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처사(處士)의 경지에 들기는 더 힘들고 그보다 풍류인(風流人) 되기는 더욱 어려웠다.

풍류의 기운을 받은 이 중에는 ‘한량(閑良)’이 있다. ‘선달(先達)’로도 불린다. 아무래도 풍류인이 한량보다 조금 격조있게 봐준다. 풍류는 정삼품 이상 높은 벼슬을 가진 사대부의 몫이고, 한량은 무직 선비를 지칭한 탓이다.

보통 일정한 직업 없이 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며 협기 있고 호걸스럽게 노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항상 동일한 의미로 쓰이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조선 초기에는 관직을 가졌던 자로서 향촌에 거주하는 유력계층을 의미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벼슬을 못하고 직역 없는 사람을, 조선 후기에는 아직 벼슬하지 못한 무인 또는 무과응시자를 의미했다. 한량은 지방의 유력자층으로서, 비록 형식적이나마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여 중의(衆議)를 대표하는 계층의 하나였다. 재산과 학력을 갖추고 유향소(留鄕所)를 설립하여 향촌사회를 주도했으며,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한량은 호적과 군적(軍籍)에 누락되어 직역이나 역역(力役) 부담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사족자제(士族子弟)나 부유한 양인자제로서 군역을 기피해 호적과 군적에 등재되지 않은 반면, 무예를 익혀 무사 또는 무과응시자로 관념화한 무인들을 의미하게 됐다. 1696년(숙종 22) 최석정(崔錫鼎)의 건의에 따라 양반 가운데 무(武)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정조 때의 ‘무과방목’에서는 무과합격자로 전직이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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