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맨발과 블랙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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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8   |  발행일 2018-01-18 제30면   |  수정 2018-01-18
美·英의 미투운동과 달리
한국선 일시적 폭로 그쳐
사회운동이 되지 못한 건
우리 사회의 인식에 문제
구성원 의식적 노력 절실
[여성칼럼] 맨발과 블랙드레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2016년 제69회 칸 영화제 시사회 현장. 칸의 상징인 레드카펫 계단 앞에 유명 여배우가 환한 미소를 띠고 서 있다. 그녀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드레스 치맛단을 올리자 탄성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하얀 ‘맨발’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귀여운 여인’ 영화 한 편으로 단박에 세계적 연인이 되었던 줄리아 로버츠가 맨발로 당당하게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을 올라 칸에 입성한 것이다. 그녀가 구두를 벗고 맨발로 등장한 이유는 이전 해인 2015년 칸 영화제에서 하이힐이 아닌 플랫슈즈를 신었다는 이유로 한 여성관객이 입장을 거부당했던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칸 영화제에선 ‘칸의 레드카펫을 밟는 여성은 하이힐을 신어야만 한다’라는 암묵적 전통이 수십 년간 지켜져 왔고 이에 맞지 않을 경우 입장조차 불가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칸 영화제의 보수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다음해 영화제에서 여자배우들이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오래된 전통에서 벗어나 바지 정장을 입거나 운동화, 심지어는 맨발로 레드카펫에 서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칸의 성차별적 전통에 정면으로 맞섰던 줄리아 로버츠의 당당한 맨발은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였고 아낌없는 환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번엔 할리우드로 가보자. 올해 연초에 열렸던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수상자보다 ‘블랙드레스’가 그 주인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엠마 왓슨, 메릴 스트립, 나탈리 포트만 등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성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블랙드레스를 입고 시상식에 대거 참석했기 때문이다. 남자배우들도 타임스 업(Time’s Up) 배지를 달고 나와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끝이다’라는 의미의 타임스 업은 할리우드의 배우, 프로듀서, 작가 등 여성 300여명이 성폭력과 성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결성한 운동단체로서 올 1월1일 발족한 후 첫 공식행사가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날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는 수상 소감을 통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더 이상 누구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라고 말하지 않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상을 받은 첫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을 지켜보고 있는 소녀들이 있다. 나는 모든 소녀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새날은 다가오고 있다. 마침내 그 새로운 날이 밝아 올 때, 그것은 훌륭한 여성들 때문일 것”이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수상 소감 이후 오프라 윈프리는 대선 출마설이 나올 정도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지난해부터 미국과 영국에서는 미투로 인한 사회 유명인에 대한 폭로와 사죄, 정치인의 낙마 사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잠깐 SNS를 통해 문화예술계의 성추행·성폭력 폭로가 이어졌지만 사회운동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왜 그럴까? 한 언론에서는 유명 배우들이 줄지어 나섰던 미국의 미투 운동과 달리 우리나라의 폭로자가 대부분 어린 학생, 신입사원 같은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도 크지만 무엇보다 성희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허용적 사회 분위기, 조직내 성차별이나 성희롱을 밝힐 경우 조직을 위해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조직문화,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빌미를 제공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성차별적 통념이 더 문제라는 생각이다. 오늘도 저녁 회식자리를 고민하거나 권력차이 때문에 부적절한 행동을 당해도 말 못하는 여성들이 많다. 제도가 있다고 해서 사회가 금방 변화하지 않는다. 이를 수용하는 문화의 변화 속도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적 노력만이 이러한 간극을 좁힐 수 있다. 우리에겐 15년 전 여성 언론인의 무릎에 손을 여러 번 올렸던 행동으로 사퇴한 영국 국방장관의 사례가 여전히 ‘이해 안 되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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