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황제 대구 어가길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삼성상회∼달성공원이 맞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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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2-21   |  발행일 2012-12-21 제34면   |  수정 2012-12-21
순종 황제 대구 어가길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삼성상회∼달성공원이 맞다”
<자료1 : 1910년대(추정) 달성에서 촬영한 대구 전경>
순종 황제 대구 어가길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삼성상회∼달성공원이 맞다”
<자료3 : 1905년 제작 대구 시가지 지도>
1905년에 제작된 지도(오른쪽·자료3)에 없던 신작로가 1911년 지도에는 나타난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대구 달성공원으로 간 길은 어느 쪽일까?’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순종황제 어가길에 대한 고증에 나섰다.

지난 13일 이정웅·정만진·전영권·구본욱 대구지오 자문위원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대구 달성공원방문(1909년 1월7일 및 12일)루트와 관련해 옛 지도와 사진 등 자료를 비교해보면서 직접 현장을 답사했다.

대구중구청은 이달 초 ‘순종은 어느 길로 갔을까’를 주제로 중구청 상황실에서 2차 자문회의를 열었지만 중구청이 위촉한 자문위원간 의견 불일치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다.

논란의 핵심은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 정문~삼성상회~달성공원’이냐, ‘북성로~대구은행네거리~달성공원 혹은 북성로~대구은행네거리~수창초교 후문~수창초교 정문~삼성상회~달성공원’이냐다.

논란이 벌어진 이유는 1905년~07년까지의 지도는 있는데 비해 순종이 다녀간 1909년 1월 당시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팀은 1910년대 달성에서 대구시가지를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작자미상·김종영씨 소장·자료1)과 1911년 1월 편찬한 ‘대구일반(저자 미와 조테츠)’원서에 나온 글 및 지도(자료2), 1930년 출간한 ‘대구이야기(저자 카와이 아사오·역자 손필헌)’등을 바탕으로 꼼꼼히 살펴본 결과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 정문~삼성상회~달성공원 루트’로 순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 신작로가 보인다(1910년대 사진)

먼저 김종영씨가 소장한 사진은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사진 왼쪽 6m가량 폭의 신작로(자료1-A)가 뚜렷이 보이고 이 길은 정토종광명사(淨土宗光明寺)로 추정되는 건물(자료1-B) 동남방향 어행정(御幸町·황제가 지나간 지역)쪽으로 희미하게나마 확연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광명사 앞거리는 북서 방향의 네거리를 의미한다” (1911년 지도)

광명사(현 수창초등 정문과 강당 부근으로 추정)는 일본식 사찰로 한국의 전통사찰과 그 건축양식이 다르다. 대구이야기에 따르면 ‘순종은 12일 행재소(行在所), 즉 지금의 경상감영에서 대화정(大和町·현 대안동)을 지나 정토종 광명사 앞으로 해서 공원으로 올라가셨다. 그래서 광명사 앞거리를 그 연유에 따라 어행정(御幸町)이라는 동네 이름을 붙였으나 지금 그 이름이 폐지되고 팔운정(八雲町·현 수창동)으로 되었다’고 나와 있다.

먼저 구본욱 위원(대구향교 장의·철학박사)는 광명사 앞거리를 주목했다.

구 위원은 “1911년 1월 지도상 앞거리에 네거리가 있는 것으로 봐서 앞거리는 바로 그 네거리를 일컫는 것(자료2-A)”이라며 “앞이란 것을 꼭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위치에서 건물을 바라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최범순 영남대 일문과 교수는 “1917년 지도를 보면 광명사를 중심으로 동서남쪽으로 담장이 오목하게 둘러싼 것으로 봐 문이 북쪽으로 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939년 3월 수창학교를 졸업한 박두포 전 경일대 교수(88)는 14일 “수창학교와 광명사 사이에 담장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수창학교로 추정되는 건물(자료1-C)은 광명사 서편에 있는 것으로 사진으로 판독됐다. 이는 수창학교의 당시 위치와 일치한다. 광명사가 밭 한가운데 있었다고 한 것도 사진과 일치한다. 광명사 서편을 제외하고 사진에 민가가 보이지 않는다.

● ‘갑작스러운 도로공사 진행’ 기록은 신작로를 냈다는 증거(1930년 출간 ‘대구이야기’)

대구이야기에 따르면 ‘1909년 1월7일, 순종의 대구 1박이 결정되자 대구는 상하가 대소동이었다. 갑작스러운 도로공사가 시작되고 홍백(紅白)의 막을 쳐서 도로좌우의 낡은 집들을 감춘다. 큰 길목에 아치문을 세운다. 양복점에는 프록코트의 주문이 쇄도한다는 등 추석과 설이 한꺼번에 닥친 소란이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각 동네마다 제 각각의 생각대로 치장에 골똘하고 있는데 도착 2~3일 전이 돼 만막(慢幕·화투패 삼광 벚꽃 밑에 그려진 막으로 일본인들이 경조사 때 사용하는 일종의 천막)에 다홍색의 카네킨 옥양목(빛이 흰 면직물)이 품절되고~(중략)’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순종이 지나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도로좌우의 낡아빠진 집들을 감춘다’는 점이다. 즉 불량주택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도로공사를 새로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는 기존에 있던 옛길과는 다른 신작로를 낸 것을 말한다.

당시 순종이 지나갈 때 4만여명의 군중이 밀집한 것으로 봐 기존 좁은 길로는 황제의 행렬이 다닐 수가 없다. 도로좌우에 낡아빠진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면 보·차도 구분이 제대로 없던 당시의 좁은 길은 온통 군중으로 메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넓은 밭 한가운데 신작로를 낼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 이 신작로는 현 북성로와 폭이 50~200m사이에 있고 현 태평로와 일직선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북쪽으로 약간 둘러가는 듯하지만 실제 길을 따라가 본 결과 대구지오 자문위원팀은 직선 루트나 다름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정웅 위원(달구벌 얼찾기모임 대표)은 “기록에 대구의 옥양목이 동이 날 정도였다면 그 규모가 대단했을 것” 이라며 “가릴 곳이 많은 것으로 봐 굳이 지저분한 옛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달성공원 입구에 새로 낸 길 왼편을 따라 만막에 다홍색 옥양목이 펼쳐져 있는 광경은 당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 1911년 편찬 ‘대구일반’에 신작로 첫 등장-광명사 북쪽 길임을 입증

대구일반 원본(1911년 1월)에 있는 지도에는 순종황제 어가길로 추정되는 신작로가 최초로 나타난다. 이 길 또한 북쪽 길이란 점을 뚜렷이 밝히는 증거다. 책 앞면 대구시가지 약도를 보면 현 삼성상회 인근 달서천을 가로지르는 교각에 ‘황제가 지나간 다리’를 의미하는 어행교(御幸橋)가 있고, 교각 주변과 현 북성로 북편 수창동과 신작로 사이에 어행정(御幸町), 즉 ‘황제가 지나간 동네’라는 글이 명기돼 있다.

● ‘1909년 가을 북부신시가도로 개수’ 기록(대구일반)

대구일반에는 1909년 가을 현 수창1길을 포함하는 북부신시가도로를 신설 또는 개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일각에선 순종이 다녀간 시점이 1909년 1월이라서 북편 신작로가 어가길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개수(改修)’라는 건축용어는 ‘초기 성능이나 초기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내용을 갖는 전면적인 수선’이라는 사전적 의미이기 때문에 거꾸로 1월과 가을 사이 북편 신작로에 대한 보강공사를 실시했다는 증거가 된다.


■대구지오자문단 결론


1910년대 촬영 사진서
신작로 확연히 확인…


1911년 지도 분석결과
광명사 앞거리라 함은
북서쪽 네거리가 확실
1905년 지도에는 없던
신작로도 뚜렷이 표시
어행정·어행교 표기도


일각서 주장하고 있는
다른 길보다 근거 확실

순종 황제 대구 어가길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삼성상회∼달성공원이 맞다”
영남일보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들이 지난 13일 대구인문사회연구소를 방문, 권상구 <사>시간과공간연구소 이사 등과 함께 순종황제 어가길을 주제로 토의를 하고 있다.
순종 황제 대구 어가길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삼성상회∼달성공원이 맞다”
영남일보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들이 순종황제 어가길로 추정되는 수창초등학교 정문 부근을 답사하고 있다.
순종 황제 대구 어가길   “북성로∼수창1길∼수창초교∼삼성상회∼달성공원이 맞다”
순종황제 어가길 신작로 출발점으로 추정되는 북성로 옛 삼덕상회 부근 삼거리. 길 오른쪽 좁은 도로가 옛 신작로이고 왼쪽 도로는 북성로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최 교수는 “1909~10년 일제는 대구신·구시가지도로를 광범위하게 개·보수하는 대공사를 했는데 대구일반이란 책에서는 디테일하게 어디어디를 공사했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또 “대구일반 원본의 책 출간 날짜가 1911년 1월인데, 적어도 출간 이전에 저자는 대구시가지의 지도를 확보했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지도는 적어도 1910년이나 1909년 1월 가까이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장영진 대구대 건축공학과 겸임교수는 “1911년 1월 모눈종이에 토지의 지목을 근대적인 측량방법으로 기록한 최초의 대구시가 지적원도에 북편 신작로가 뚜렷이 나와 있는데 비해 현 대안동 주변 동서쪽 북성로는 건물로 막혀있다(자료1-D)”고 밝혔다.

무엇보다 중요한 단서는 1910년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시가지 사진이다. 1910년대란 것을 밝힌다면 이 사진에서 오른편 동산에 스윗지 선교사 주택 등이 보이는데 계산성당에 종탑(계산성당은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해 1918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또한 달성공원 앞 넓은 도로가 순행당시 건설돼 영남대로와 연결됐는데, 사진에서 현 북성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개천만 보인다는 사실이다. 좁은 개천의 둑을 따라 어가가 달성공원으로 갈 리는 없다.

그러므로 어가가 정토종 광명사를 지났다고 했으니, 달성공원 정면 북성로와 남쪽 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달서천을 건너 왼쪽으로 굽어서 달성공원 정문으로 들어간 것이 된다.

한편 전영권 위원(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은 대구이야기에 나온 대구신문사를 주목했다. 신문사 앞에 봉련(鳳輦·꼭대기에 황금봉황을 장식한 임금이 타는 가마)을 맞이하는 아치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대구신문사는 경상감영 앞에 위치한 것으로 지도상 나타났다. 어가가 현 대안동을 지나 경상감영에 들렀다는 증명이 된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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